(제 126 회)

제 8 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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봄이 왔다.

꽃샘을 하던 쌀쌀한 추위가 숙어들자 전쟁의 불길이 휩쓸고지나가 시꺼멓게 얼룩진 두만강연안 산발들에는 훈훈한 봄바람이 불어왔다. 숯으로 되여 시꺼멓게 서있는 나무숲들과 재무지들밑에서는 파릇파릇한 싹들이 창공을 향하여 머리를 쳐들었다. 골짜기들에서 달려내려오는 봄물의 기운찬 흐름소리는 신선한 바람을 일으키며 대기를 뒤흔들고 양지바른 산기슭과 벼랑턱이며 산봉우리들의 밑에는 렬사들의 피흔적인듯 진달래가 점점이 수놓아졌다.

여느해보다 일찌기 날아든 계절조들은 찬란하게 쏟아져내리는 해빛속을 누비며 아득히 날아올라가 모래알처럼 아물거리다가는 곤두박혀 내려와서 푸른 봄이 설레이는 대지우를 스칠듯이 날며 고운 목청으로 노래를 불렀다. 새는 제 혼자 혁명의 새봄을 한껏 누리는듯 하였다.

모든 근거지들에서는 겨우내 계속해온 복구사업이 다 끝났다. 겨울추위와 굶주림을 이겨내며 허리를 치는 눈속을 헤치고 산으로 올라가 통나무를 찍어 끌어내려다가 다듬어서 재무지만 남은 마을에 집들을 일으켜세우기란 헐한 일이 아니였다.

변변한 옷과 신발도 없는데다가 아무것으로나 배를 채워야 힘을 쓰겠는데 낟알이 없었다. 유격대가 전투에서 로획해오는 쌀과 간도의 곡창이라고 하는 라자구쪽에서 구해들이는 식량이나 국내에서 원호물자로 들여보내는 곡물들로 그 많은 근거지인민들을 먹여살리기에는 어림도 없었다. 게다가 어떤 마을에는 열병까지 돌았다.

과연 무슨 힘이 그들로 하여금 복구의 도끼소리를 그토록 힘차게 울리게 하였는가? 세끼, 네끼를 굶고도 대들보감을 씽씽 메나르는 아바이도, 잔등살이 벌겋게 드러난 홑옷을 입고도 땀을 뻘뻘 흘리며 톱질을 하는 청년도 그 까닭을 몰랐다.

큰 전쟁을 치르고나니 어느 마을에나 이야기풍년이 들었다. 사람들은 도끼질을 하고 자귀질을 하고 기둥을 세워놓고 땀을 들이면서도 근거지방위전때 누구는 어떻게 잘 싸웠고 누구는 어떻게 죽을 고비를 넘겼고 누구는 어떻게 꾀를 써서 왜놈을 때려잡았는가를 이야기하며 은근히 제자랑도 하고 남을 놀려도 주며 웃어대는가 하면 왜놈들이 도망치던 흉내를 내면서 배를 그러안고 돌아갔다. 그러고나면 신이 나서 허기증도 잊게 되고 팔뚝에 새 기운이 꿈틀거려 다시 도끼를 휘둘러대군 하였다.

그런 이야기들중에는 김진세와 마종삼의 《돌대포》이야기, 보금이 더운 밥함지를 이고 불길속을 뛰여다닌 이야기, 림성실이 장의날에 김중권의 호주머니에 담배쌈지를 넣어주던 이야기, 오풍헌이 왜놈 14놈을 나무단처럼 묶어놓은 이야기, 김진세가 왕청시가까지 잡혀갔다가 구원된 이야기… 등 별의별 이야기들이 다 있었다. 여러번 입에 오르고 뭇사람들의 입을 거치는 과정에 농민들 특유의 해학으로 채색된 그 인민영웅서사시의 절정은 장군님께서 왜놈들의 포위를 뚫고나가 량수천자일대와 왕청시가를 들이치자 놈들이 사태처럼 밀려서 도망치던 이야기였다. 장군님의 명령으로 창억이 고동을 울리는 마감대목에서 이야기는 웃음보가 터지도록 그럴듯하게 엮어졌다. 그 고동소리에 왜놈 《토벌》 사령관놈이 어찌나 질겁했던지 말을 타는것도 잊고 도망쳐나가다가 대왕청하의 얼음구멍에 출렁 빠져들어가 허우적거리다가 목만 내놓고 얼어붙었는데 어느 농사군이 낫으로 그 목을 썩 베니 그자식이 어찌나 속이 탔던지 시꺼먼 연기가 물씬물씬 피여오르더라는것이다.

그리고 그때 도망쳐나가지 못하고 산골짜기들에서 얼어죽은 놈들을 보면 거개가 두손으로 사타구니를 그러잡은채로 눈에 묻혀 굳어졌는데 그것은 이런 싸움을 계속하다가는 제놈종자들의 씨가 마를것 같은 걱정을 마지막순간에 했다는 증거라고들 하였다.

이래서 웃고 저래서 떠들썩해지다나니 일판은 언제나 흥성거리고 사람들은 기운들이 부쩍부쩍 나서 뛰여다녔다. 승리의 통쾌감에서 오는 해학으로 충만된 그들의 이야기들에는 범속한데도 없지 않았지만 가슴가슴들에는 장군님의 령도를 받들고 들고일어나 왜놈들과 처음으로 큰 싸움을 벌려 이겼다는 승리자의 자부, 조선사람의 민족적긍지가 차고넘치였던것이다.

그 자부심과 긍지감은 어느덧 자귀날과 대패날에도 번뜩이여 기둥 하나를 깎아도 더 미끈하게, 문틀 하나를 세워도 더 번듯하게, 주추돌 하나를 앉혀도 더 든든하게 앉히게 되였다. 우리는 이제는 남에게 업수임을 당하며 아무렇게나 허술하게 살아갈 민족이 아니라는 자각이 나날이 그들의 가슴에서 북받쳐올랐다.

그들은 허기증에 시달려 아침이 되면 신음소리를 내며 간신히 자리에서 일어났고 방위전의 나날에 제 살붙이들을 잃은 비감이 밤마다 가슴에서 울었으나 일터에 나와서는 웃으며 노래를 부르며 일손들을 다그쳤다. 그들은 왜놈들의 목을 짓누르는 마음으로 기둥뿌리를 박고 억천만번 죽더라도 일제통치를 때려부시고 내 나라를 찾는다는 결심으로 벽을 쌓아올리고 조선민족의 기개를 만방에 떨치리라는 배심으로 지붕들을 덮었다.

장군님께서는 마을과 마을들을 돌아다니시며 인민혁명정부 구, 촌위원회 일군들에게 인민들의 살림집부터 짓고 다음에 아동단학교 그다음에 기관건물들을 지으라고 복구사업의 선후차를 가르치시고 건물들의 위치와 구조에 이르기까지 세심한 지도를 주시였다.

그이께서는 때로는 사람들속에 어울려 톱질과 자귀질도 하시며 일제의 대무력과 싸워이긴 우리 인민들이 살 집인데 더 번듯하고 쓸모있고 든든하게 짓자고 사람들을 고무하시였다.

새들이 날아예는 푸르른 봄하늘밑에 이렇게 일떠선 모든 근거지들의 집들과 학교와 기관건물과 유격대병실, 무기수리소, 출판소, 병원건물들은 말그대로 그이의 두리에 뭉쳐 일제를 타승하고 조국을 광복하려는 민족의 의지가 다져진 방책이며 요새였다.

근거지의 마을들이 이렇게 꾸려졌을 때 그 복구의 나날에 사람들의 입에서 입으로 옮겨지며 다듬어지고 보태진 방위전의 이야기들도 감명깊은 인민영웅서사시로 엮어져 세상에 널리 퍼졌다. 그것이 국내인민들속에 전해지자 그들의 념원에서 피여난 환상까지 가미되여 전설로 만방에 퍼졌다. 류다섬의 한설봉로인이 퍼뜨린것인지 경원과 온성, 종성일대에는 왜군들이 근거지를 겹겹이 둘러싸고 마지막까지 좁혀들어갔을 때 장군님께서는 구름으로 되시여 하늘로 날아올라가 세상의 번개를 다 모아 놈들의 일선과 후방에 불소나기를 퍼부었다는 전설이 퍼졌다. 국내의 깊은 후방에는 장군님께서 축지법을 쓰시여 이 산에서 저 산으로 날아다니며 단신으로 왜군을 물리쳤다는 전설도 떠돌았다. 소박한 인민들은 그런 전설들을 들으며 기뻐만 하였지 방위전의 그 나날에 22살의 청년장군이 조국과 민족의 운명을 두어깨에 걸머지시고 소수의 유격대력량으로 강대한 일제침략군을 물리치기 위하여 얼마나 고심분투하였으며 지어는 칡뿌리로 끼니를 에우고 누구보다도 제일 적게 눈을 붙이고 누구보다도 제일 얇게 입으시고 혹한속을 뛰여다니며 전쟁을 지휘한것이며 어떤 심각한 배신행위와 어떤 론쟁속을 뚫고 하루에도 수십차례씩 어떤 사선을 뛰여넘으시며 유격대와 인민들을 승리에로 이끄시였는가를 다는 몰랐다.

새봄이 잡혀 무서운 추위와 굶주림속에서 방위전의 시련을 이겨낸 사람들의 얼굴에서 껍질이 벗겨지고 머리칼과 눈섭이 부슬부슬 빠질 때 병석에까지 드셨던 장군님께서도 극도로 쇠약해지시였다.

그러나 그런 내색은 조금도 보이지 않으시고 이 봄에 튼튼히 다져진 근거지에 의거하여 혁명을 보다 새로운 높이에로 앙양시키기 위하여 유격대지휘관들과 당, 공청, 부녀회 등 각 대중단체 일군들의 강습을 광범히 조직하시는 한편 만주와 국내의 광활한 대지에 혁명의 씨앗을 뿌리기 위하여 수많은 정치공작원들을 파견하시였다.

그리하여 김창억은 소대장으로 제발되여 북만으로 가게 되고 최형준은 연길쪽 지하조직에로, 림성실은 온성반유격구에 각각 파견되게 되였다.

그이께서는 농민들의 봄철농사를 돕기 위하여 여러번 전투를 벌려 소와 말, 종곡까지 로획해다가 모든 마을들에 골고루 나누어주시였다.

그날 장군님께서는 근거지인민들의 농사형편을 료해하시려고 리재명, 김진세를 비롯한 인민혁명정부 간부들을 데리고 십리평에 나가 농민들의 씨뿌리기에 친히 참가하시였다. 그이의 곁을 떠나기 아쉬운 김창억이와 최형준이도 마지막으로 같이 따라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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