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지막회)

제 8 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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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십리평 앞벌의 밭들에는 사람들이 하얗게 널려서 밭갈이도 하고 씨도 뿌렸다. 사람들은 피로써 지켜낸 땅에 다시 씨를 뿌리게 되니 감격이 새로왔고 기쁨이 더 커 큰 경사가 난듯 흥성거리며 일손을 부지런히 놀렸다. 여기저기에서 소들의 영각소리가 울리고 흥겨운 농부가의 가락까지 들려왔다. 길이며 밭지경에서는 아지랑이가 아물아물 피여오르고 고르게 갈아엎은 사래긴 밭이랑들에서는 김이 문문 피여올랐다.

군복저고리를 벗으신 장군님께서는 인민들과 나란히 서서 밭이랑을 따라 천천히 걸어나가시며 옆에 낀 다래끼에서 귀밀씨를 맞춤맞춤하게 쥐여내여 이랑속에 조심조심 뿌려넣으시였다.

그이께서 팔을 앞으로 내저으실 때마다 손끝에서 씨앗들이 포물선을 그리며 날아내려 땅김이 서린 이랑속에 골고루 떨어져 박혔다. 그 씨앗들은 때로는 해빛의 조화로 진귀한 구슬알처럼 빤짝거리며 날아떨어졌다.

리재명은 그이의 댓걸음뒤에서 따라가며 발로 흙을 툭툭 차서 씨앗들을 조심조심 묻어나갔다. 김창억이와 최형준은 퇴비삼태기를 안고 부지런히 뛰여다니며 밭이랑들에 퇴비를 듬뿍듬뿍 주었다.

흙을 툭툭 차며 장군님의 뒤를 따라가던 리재명은 문득 마촌이 불타던 밤 그이앞에서 절망의 눈물을 흘리던 일이 가슴을 쳐 뚝 멎어섰다. 아, 장군님의 강철의 의지, 장군님의 탁월한 전법이 아니였던들 우리가 이런 봄을 맞을수 있었겠는가! 그의 흐려지는 눈앞으로 장군님께서 여기로 오신 날부터 지난 1년동안에 있은 갖가지 가슴벅찬 일들이 언뜻언뜻 스쳐지나갔다. 참으로 지난 1년은 쏘베트좌경로선을 뒤집어엎고 장군님의 독창적인 인민혁명정부로선을 관철해온 피어린 로선투쟁의 1년이였으며 그 로선의 진리성과 위대한 생활력이 근거지방위전에서 장엄하게 펼쳐졌던 인민전쟁의 승리로써 완전무결하게 확증된 승리와 영광의 1년이였다. 그리하여 오늘 근거지는 혁명의 보루로, 책원지로 이렇듯 더 튼튼하게 다져졌으며 이런 경사로운 봄을 맞게 된것이다.

뜨거운 감회에 잠긴 리재명이 다시 흙을 툭툭 차나가는데 장군님께서 걸음을 멈추시고 저아래 길쪽을 바라보시는것이였다.

그쪽 길가의 느티나무밑에 검정치마에 흰 저고리를 입은 녀자가 자그마한 보꾸레미를 안고 서서 이쪽을 바라보다가는 머리를 소곳이 숙이고있었는데 무엇인가를 망설이는듯 하였다.

장군님께서는 다래끼를 밭이랑에 얼른 내려놓고 그 녀자에게로 걸어나가시였다.

그이께서는 그 녀자와 마주서서 무슨 이야기인가를 한참 하시다가 길을 따라 굽인돌이뒤로 내려가시였다.

얼마후 밭으로 돌아오신 그이의 안색에는 슬픔도 아니고 기쁨도 아닌 다감한 빛이 어려있었다.

《림성실동무가 아닙니까?》 하고 리재명이 물었다.

《…》

그이께서는 아무 대답도 없이 다래끼를 옆에 끼시고 다시 묵묵히 씨를 뿌려나가시였다.

《성실동무야 아침에 떠난다고 인사를 하지 않았습니까? 무슨 일이 생긴게지요?》 하고 리재명은 다시 물었다.

그이의 손끝에서 씨앗들이 반짝거리며 날아떨어졌다.

《성실동무는… 솔골로 해서 온성으로 건너가기로 되였더랬는데 사포여울쪽으로 돌아가게 해달라고 제의하러 왔소.》

《예? 그쪽길이 좀 안전한가요?》

《아, 참 동무는 잊었는가요? 사포여울 말입니다.… 원호물자를 도강시킨 두만강여울이 있지 않습니까? 그우에 김중권동무가 최후를 마친 자리가 있습니다.》

《아!…》

리재명은 걸음을 멈추었다. 두만강가에 저고리고름을 나붓기며 서서 눈물을 머금고 애인의 혁명정신이 흐르는 강물에 맹세를 다질 림성실의 모습이 뚜렷이 떠올랐다.

그이께서는 리재명이를 돌아보지 못하시였다. 리재명은 그이께서 땅김이 엇비스듬히 날리는 밭가운데서 씨앗을 뿌려나가시는것을 눈물에 젖어 지켜보았다. 그이의 손끝에서 날아떨어지는 씨앗들이 낟알씨가 아니라 그 어떤 다른 심각하고 엄숙한 의미를 띤것으로 보이면서 언제인가 국제당파견원의 유고에서 보았던 한구절이 가슴을 쳤다.

아, 그이께서는 독창적인 사상의 보습으로 혁명의 대지를 깊숙이 갈아엎으며 혁명의 씨앗들을 더 넓게, 더 깊게 뿌려나가시는것이 아닌가! 그래서 림성실은 애인의 발자취를 따라 온성으로 나가고 창억이는 북만의 광활한 대지로, 최형준이는 연길로 떠나가는것이 아닌가!

이날 정오 대왕청하의 물결우에서는 해빛이 눈부시게 부서졌다. 성림이 끌어온 장군님의 백마는 물속에 주둥이를 깊숙이 박고 쭈룩쭈룩 소리를 내며 봄물을 들이키더니 고개를 번쩍 들고 갈기털을 부르르 떨었다. 성림이와 창억이는 말다리에 물을 끼얹으며 마른풀수세미로 겨우내 더덕더덕 묻은 때를 말끔히 씻어내리고 잔등도 썩썩 문질러주며 왁작 떠들어대였다.

말은 너무도 시원하고 상쾌해져 푸른 하늘을 향하여 입을 크게 벌리고 큰소리로 울어대였다.

장군님께서는 리재명이와 함께 물가에 앉아 시원한 물에 발을 잠그고 밭흙이 묻은 손을 씻으며 물속에서 첨버덩거리는 성림이와 창억이, 말이 시원해하는 모양을 보면서 밝게 웃으시였다.

최형준은 웬일인지 심각한 얼굴로 팔짱을 끼고 잔디풀이 푸릇푸릇한 기슭을 천천히 오르내리고있었다.

손을 다 씻으신 장군님께서는 냉이잎을 뜯어 냄새를 맡아보시더니 실눈을 지으시고 연두빛이 짙어가는 멀고 가까운 산발들과 저앞 산중턱에서 타오르는 진달래며 새들이 날아예는 푸른 봄하늘을 쳐다보시였다.

어디를 보나 봄빛이 짙어가고 봄의 훈향이 차넘치였다.

리재명이 환한 얼굴로 최형준을 돌아보며 소리쳤다.

《여보 시인동무! 이런 날에 한마디 읊어볼 생각이 없소? 동무는 명색이 시인이라면서 여태 시를 썼다거나 읊은 일이 있소? 어떻게 된노릇이요?》

장군님께서도 그를 돌아보시였다. 당황할줄 알았던 최형준이 기다렸다는듯 휘늘어진 수양버들가지들을 한손으로 모아쥐고 명상에 젖은 눈으로 하늘을 흘깃 쳐다보고는 얼굴을 숙였다.

그의 머리우에 드리운 수양버들실가지들이 바람결에 고요히 흐느적이였다.

 

봄이 왔노라

겨울이 가고 봄이 왔노라

가냘픈 한 시인 두팔 활짝 벌려

이 봄을 안고 눈물짓노라

기쁨에 겨워 행복에 겨워

 

눈물짓노라 이 봄에 안겨

겨울에 깊이 머리숙여 감사하며…

초연 굶주림 피 절망과 죽음을 박차고

선조들이 떨기만 했던 왜적을 때려엎은 겨울

 

때려엎고 민족의 기개를 떨친 혈전의 겨울에

위대한 진리를 깨우쳐준

준엄한 인민전쟁의 그 겨울에…

 

수양버들실가지들 흐느적이는 밑에서

봄에 취한 가냘픈 시인

온 심혼을 담아 웨치고싶노라

우리에게

태양이 있어 이 봄이 왔다고

이 봄에 태양이 더 고맙다고

진리의 태양

사랑의 태양

위대한 리성의 태양이여!

이 봄을 안고 조국으로 가자

이 봄을 조국삼천리에 활짝 꽃피우자…

 

흐느적이는 수양버들실가지들밑에 즉흥시의 여운이 서려도는데 리성림이 군마를 끌고 물속에서 첨버덩첨버덩 뛰여나왔다.

말다리밑에서 물이 철썩철썩 튀여올랐다.

《사령관동지, 이거 봄에 취해 제가 정신이 쑥 나갔댔습니다. 십리평학교 시범교수에 참관하겠다고 약속하지 않았습니까? 저것 보십시오. 종소리가 울립니다.》

야무진 종소리가 땡- 땡- 울려오며 파란 공간에 파문을 그리는듯 하였다.

《아차, 큰일날번 했군!》

장군님께서도 밝게 웃으시며 서둘러 일어나시였다.

《사령관동지! 챠, 이거 새별눈이 다 흐려지겠습니다!》

《글쎄말이요. 허허허…》

그이께서는 말고삐를 잡으시였다가 최형준에게로 가시였다.

《좋은 시를 들려주어 정말 고맙소! 구체적인 의견은 저녁에 좀 나누어봅시다.… 그리고 내가 학교에서 일을 다 보고 떠난 다음에 꼭 오오! 이런 날에 새별눈이 흐려져서야 되겠소?》

그이께서는 일부러 능청스럽게 웃어보이시며 최형준의 가슴을 툭 때려주시고는 말에 날아오르시였다.

장군님께서 타신 백마는 휘늘어진 실버들가지들을 날리며 달려나가더니 어느덧 푸른 버덩을 지나 진달래가 불타는 저 먼 산굽이를 돌아갔다. 십리평 아동단학교쪽에서 아이들이 끓어번지는 환성이 들려왔다.

버드나무밑에 서서 그이께서 가신쪽에서 들려오는 먼 말발급소리를 듣는 리재명의 눈에 푸른빛이 짙게 비껴들었다.

(아, 얼마나 좋은가! 그래… 그렇지.… 최동무가 읊은 시대로 조국이 광복되면 장군님을 모시고 조국으로 나가 이 봄을, 이 봄을 그대로 활짝 피우자! 삼천리강산에 활짝 꽃피우자!)

창억이는 대왕청하의 시원한 물속에 선채로 이마에 손채양을 붙이고 하늘을 쳐다보았다.

아득히 높은 푸른 하늘로 기러기떼들이 두줄을 지어 유유히 날아들어오고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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