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108 회)

제 8 장

을미사변의 전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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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과 물은 상극이라 땅우의 모든것을 녹초로 만들어버리는 염장철의 땡볕도 강에서는 위력을 발휘하지 못했다. 강기슭에서 빨래하는 녀인들이며 낚시대를 드리우고 앉은 사람들, 강뚝에서 다리쉼을 하는 길손들도 선들선들한 강바람에 오히려 시원한감을 느끼는데 물속에서 헤염을 치는 젊은이들이나 물장구를 치며 자맥질하는 개구쟁이들이야 더 말해 무엇하겠는가.

강우에는 짐을 실어나르는 커다란 당두리며 돛배들이며 그물질을 하는 매생이들이 떠있는데 그 가운데 채양을 친 놀이배 한척이 유표했다. 놀이배는 뚝섬쪽을 향해 강심을 타고 천천히 움직였다.

어데선가 은은히 들려오는 노래소리, 그쪽을 바라보며 힘꼴이나 쓰게 생긴 리규완이가 술잔을 들고있었다. 배에는 리규완이 말고도 신응희, 정란교 등 박영효의 심복들이 그와 함께 타고있었다. 그리고 이외에 내무협판 유길준이도 있었다. 그들은 요즘 기분이 언짢은 박영효를 위해 이 배놀이를 마련했는데 주인인 박영효는 짜장 손님격으로 흥미없는 기색이였다. 세상이야 강물처럼 흐르든말든 놀이군들은 술만 들이켰다. 놀이배에는 또한 이런 좌석에 섞이기마련인 분내, 동백기름내에 쩌든 기생들과 꿩깃을 꽂은 주립을 쓴 풍각쟁이들도 끼여있었다. 벌써 혀꼬부라진 소리를 하는 신응희가 좌중을 둘러보며 잔을 쳐들었다.

《자, 오늘이야 우리 금릉위대감을 위해 특별히 마련한 배놀이인데 잔들을 듭시다.》

리규완이가 박영효에게 불카해진 낯을 돌렸다.

《다른 생각마시고 대감께서 드셔야 우리도…》

박영효는 억지로 입에 술을 털어넣었다. 그것을 본 리규완이 얼른 기생을 부추겼다.

《자, 대감님 술맛 좋게 한가락 뽑아라.》

속이 들여다보이는 시원한 평갑사저고리에 남색치마를 입고 쪽진머리에 굵고 길다란 옥비녀를 지른 해말쑥한 기생이 일어났다. 그러자 풍류가 울리고 기생이 거기에 맞춰 《밀양아리랑》을 불렀다.

 

정든 님 오시는데 인사를 못해

행주치마 입에 물고 입만 방긋

아리 아리랑 스리…

 

흥이 난 리규완이가 손을 들어 기생을 제지시켰다.

《앉어, 앉어!》

그리고는 제가 비틀거리며 배전에서 일어났다. 장고를 치던 기생이 기급한 소리를 했다.

《아니, 나리! 그러다 강물에 떨어지겠네요.》

리규완이 눈을 흡떴다.

《내가 강물에? 야, 현해탄 건너 일본으로 몇번씩 넘나든 내다. 강물에 빠져?…》

리규완은 히죽이 웃으며 박영효에게 허리를 굽석했다.

《대감님을 위해 내가 창을 하리다.》

이렇게 떠벌인 리규완은 풍류를 울리라고 손짓했다.

《까투리타령》의 반주가 울렸다. 거기에 맞춰 리규완이 목청을 뽑았다.

 

까투리 한마리 푸르릉 나니

매방울이 떨렁

 

비록 탁성이지만 자연풍치에 어울려 흥취있고 구수하게 들리는 그의 노래에 모두가 박수를 치고 야단법석을 떨었다.

늙은 기생이 그의 입에 술을 부어주고 안주를 집어주었다.

그러나 배놀이에는 흥심이 없는듯 침울한 기색인 박영효에게 내무협판 유길준이가 은근스럽게 말을 걸었다.

《소신은 이번에 박대감께서 총리를 하실줄 알았는데 참 일이 맹랑하게 됐습니다.》

박영효가 강건너편에 시선을 주며 쓰겁게 내뱉았다.

《다 민왕후때문이네. 치마걸친 아낙네가 국사에 간참을 하니 일이 될게 뭔가.》

《쉬, 낮말은 새가 듣는다는 말 모르십니까?》 하며 유길준은 주위를 둘러보았다.

갈매기 한마리가 강우를 날아예고있었다.

박영효가 혼자소리하듯 그러나 악에 받쳐 씨벌였다.

《언제건 이놈의 조정 내 손으로 들부셔버려야지.》

《그러니 갑신때처럼?…》

《그때는 실패했지만 이번에야.》

배놀이를 파하고 집으로 돌아온 유길준은 방문과 창문을 휘장으로 가리우고 초불밑에서 밀서를 썼다. 한증탕속같은 방안의 열기와 긴장감으로 그의 얼굴과 잔등에서 줄땀이 흘렀다.

박영효를 고발한 밀서는 그날 밤중으로 박영효와 상극인 김홍집이에게 전해졌고 그것은 다시 민비와 고종의 손으로 넘어갔다.

배놀이를 끝내고 박영효의 집으로 밀려온 그와 그의 심복들은 또다시 술자리를 펼쳐놓았다. 재탕이라 그들모두는 곤드레만드레 취해 고주망태가 되였다.

리규완이가 술꽃이 핀 게슴츠레한 눈으로 박영효를 건너다보며 혀꼬부라진 소리를 했다.

《박대감은 참으로 팔자가 좋은 사람이외다. 높은 벼슬에, 고래등같은 기와집에, 천하절색인 부인을 척 끼구… 에에, 우리같은 막놈은 꿈도 못 꿀 일이지. 안 그렇소, 박대감?》

하지만 박영효는 그런 귀맛좋은 소리도 들리지 않는듯 동문서답격의 소리를 했다.

《아무리 생각해두 배놀이때 내가 실수한것 같군.》

리규완이가 《끅.》트림을 하고나서 의아쩍게 물었다.

《실수라니요?》

《유길준이한테 내 속심을 털어놨거던.》

그러자 신응희가 머리를 흔들었다.

《허어 대감, 유길준이두 대감처럼 두길보기를 하는 사람이외다.》

《두길보기라니?》

리규완이가 눈이 떼꾼해서 신응희에게 물었다.

《일본과 민비사이를 왔다갔다 한단 말이요.》

박영효가 대뜸 신응희에게 눈을 부라렸다.

《그따위 말 좀 치우게.》

《아아, 대감께서 그런다는건 아니고…》

리규완이가 머리를 기웃거리며 중얼거렸다.

《이러다가 대감두, 우리두 두 칼에 맞지 않겠소?》

《방정스러운 소리 그만두게.》

박영효가 이번엔 리규완에게 눈을 부라렸다.

이때 자개박이옻칠탁자우의 원화기소리가 전률하듯 세차게 울렸다.

박영효가 급히 수화기를 들었다.

《나요… 응?!》

수화기에서는 다급히 말하는 경무사 리윤용의 음성이 울렸다.

《대감, 어서 피하시오. 거기루 기마순검들이 떠났소이다.》

수화기를 떨구고 돌아앉은 박영효의 낯색이 까맣게 죽었다. 자기를 긴장한 눈길로 쳐다보는 심복들에게 박영효는 겁에 질린 소리로 떠듬거렸다.

《나한테 체포령이 내렸소.… 어쩐지 께름하다 했더니.… 자, 빨리!…》

그의 말에 리규완이며 신응희들은 술에 취한 놈같지 않게 후닥닥 자리를 차고 일어났다.

박영효의 집 솟을대문앞에 당도한 기마순검들이 말등에서 뛰여내려 대문으로 달려갔다.

대문을 활 열어제끼며 안으로 들어간 순검들의 눈에 안겨온것은 텅 빈 뜨락이였다.

순검 하나가 사랑방 퇴돌우에 올라섰다. 사랑방문이 열리며 사색이 된 박영효의 처가 나타났다.

순검이 사납게 따졌다.

《대감이 어데 있소?》

《…》

영효의 처는 우들우들 떨기만 했다.

순검이 버럭 어성을 높였다.

《어데 있는가 말이야!》

《금시 전화를 받고 밖으로…》

영효의 처는 말도 맺지 못했다. 순검이 골살을 찌프렸다.

《음, 어느 놈이 내통을 했구나.》

순검들이 와르르 밀려나갔다.

무너지듯 털썩 주저앉은 영효의 처는 방바닥을 두드리며 넉두리를 했다.

《아이구 내 팔자야, 일장춘몽이라더니…》

 

한편 탁자앞에 오연히 앉아 궁내대신의 말을 듣고있던 민비가 돌연 탁을 손바닥으로 내리쳤다.

《무어라? 영효가 도망을 쳤다구?!》

궁내대신이 송구스럽게 머리를 수그렸다.

《필시 일본공사관이 앞질러…》

《그따위 때늦은 소리말고 장안 곳곳에 방을 내붙여 무슨 수를 써서라도 잡아들이게 하오. 하늘땅을 뒤져서라도 그 역적놈을 내앞에 끌어다놓으라!》

이렇게 고함치는 민비의 두눈에서 시퍼런 불이 펄펄 일었다.

이 시각 박영효는 골목길로 숨가삐 달리고있었다. 리규완이와 신응희가 뒤따르고있었다.

리규완이 헐떡이며 박영효에게 말했다.

《대감! 먼저 공사관으로 갑시다.》

영효가 딱 잘랐다.

《그리로 가선 안돼!》

《공사관으로 가야 우리가 보호를 받을게 아니요?》

《공사관둘레에는 순검들이 가있을게다.》

《그럼?》

《룡산에서 배를 타고 인천으로 빠지자구.》

인천항의 황혼녘이다.

부두에 정박하고있는 일본기선의 기탑에서 히노마루가 퍼덕였다. 쌀가마니와 묵직해보이는 짐들이 기선우로 올라갔다.

드디여 배고동소리가 길게 울렸다.

갑판의 란간에 선 선객들이 배웅나온 사람들에게 손을 흔들었다.

이때 황급히 나타난 박영효와 리규완, 신응희가 허겁지겁 배우로 올라갔다.

기선은 어느덧 부두를 벗어나 넓은 바다로 나갔다. 수평선에는 저녁노을이 진하게 비꼈다.

박영효는 멀어져가는 인천의 거리와 산야를 처량한 눈길로 바라보았다. 그의 량켠에서는 리규완과 신응희가 안도의 숨을 쉬고있었다.

리규완이가 쓸쓸하게 물었다.

《대감, 우리가 다시 오게 될가요?》

박영효의 대답은 의외에도 확신적이였다.

《오지 않구!》

《무슨 수로 말이요?》

《어차피 이 땅은 일본의것이 되고말것이 아닌가!》

세사람의 자태는 서서히 깃드는 어둠속에 묻혀버리고 운명의 숨소리인양 배고동소리는 대기속으로 사라져갔다.

이렇게 친일파 박영효는 고국땅에 발을 들여놓은지 1년만에 다시 망명의 길에 올랐다. 그가 갈 곳은 일본밖에 없었다.

일본에 재망명한 박영효는 랭대를 받았다고 한다. 쓸모가 없어진 주구들에게 차례지는 응당한 귀결이였다. 하지만 그는 우리 나라가 일제의 완전한 식민지로 전락된 《한일합병조약》이후 일본정부로부터 자작이라는 귀족칭호를 받았다. 매국의 값싼 평가라고 해야 할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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