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109 회)
제 8 장
을미사변의 전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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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 아시아와 아프리카를 포함한 세계의 거의 모든 지역이 렬강에 의하여 분할되고 그의 식민지 또는 반식민지로 전락되였다. 조선과 린접하고있는 청국의 경우만 놓고보더라도 영국은 양자강류역을, 프랑스는 운남, 광동, 광서 등 남청국일대를, 로씨야는 만리장성이북을, 그리고 도이췰란드는 산동반도와 북청국일부를 각각 자기들의 세력권안에 넣었다.
이런 의미에서 볼 때 조선도 세력권분할을 위한 렬강들의 각축전장의 하나로 되고있었다. 조선을 차지하기 위한 렬강들사이의 쟁탈전은 전례없이 강화되고있었다.
일본이 십년동안 간고하게 키운 국력으로 청국과의 전쟁에서 승리하고 조선을 독점적지배지로 만들수 있었으나 바로 조선에 대한 렬강들의 이런 리해타산으로 말미암아 초기의 목적을 달성하지 못하고있었던것이다.
조선을 차지하기 위한 싸움에서 일본에 맞서는 가장 큰 적수는 로씨야였다. 그러나 로씨야는 중근동문제에서 영국과의 대립을 풀지 못한데다가 극동진출을 위한 군사적목적에서 건설하기 시작한 씨비리철도도 완성하지 못한 조건에서 아직 일본과의 정면대결은 시기상조라고 타산하고있었다.
일본 역시 로씨야의 세력을 물리치고 조선을 차지하기 위해서는 일청전쟁에서 입은 피해를 회복하고 로씨야와 전쟁준비를 하는데 일정한 기간이 필요하였다. 그리하여 또다시 십년동안 힘을 키운 다음 조선에서 로씨야세력을 영영 물리치려고 하였다.
이에 대해 일본천황 무쯔히또는 총리 이또 히로부미에게 이렇게 말하였다.
《조선을 먹는것은 그렇게 빨리 되지는 않을것이다. 이번 청국과의 전쟁에서 지리와 풍속도 알게 되였으니 멀지 않아 조선이나 또는 다른 곳에서 로씨야와 전쟁을 할 기회가 올것이다. 그때에 가서 조선을 먹어도 늦지는 않다.》
조선을 둘러싸고 격화된 로, 일 두 침략세력사이의 화해할수 없는 근본적인 대립은 얼마동안 표면상 평온상태를 유지한듯싶었으나 사실상 더욱 격화되여갔다. 그들은 서로 정면대결을 피하면서 제각기 조선에서 국왕을 자기 손아귀에 틀어쥐려고 악랄하게 날뛰였다. 그런데 친로배일적인 민비일파가 로씨야에 동조함으로써 일본이 일청전쟁에서 피로 거둔 성과가 백지화될 위험에 처해있었다.
이리하여 일본정부는 자국에 와있던 공사 이노우에 가오루를 급급히 조선으로 다시 보냈다.
일본에서 돌아와 귀임인사차로 입궐하는 일본공사 이노우에를 맞기 위해 함화당으로 가던 고종과 민비는 향원못가의 느티나무그늘에서 잠시 휴식하였다. 그들의 낯색은 밝지 못했다.
참을성없고 살기에 찬 이노우에가 무슨 야료를 부리겠는지, 또다시 병력을 이끌고 궁성과 이 땅을 어지럽히지 않겠는지. …
민비가 고개를 숙인채 시름겹게 말했다.
《상감마마, 신첩은 어쩐지 소름이 끼칩니다.》
《짐도 그렇소. 그가 이제 박영효를 비롯한 친일당을 조정에서 전부 내쫓은거며 그들의 〈내정개혁〉을 전면거부한것을 따지고들 생각을 하면 벌써부터 진땀이 나오.》
《이 마음고생을 언제까지 해야 하옵니까?》
민비의 눈에 비탄의 눈물이 어렸다.
《후-》
고종도 불같은 장탄식을 하였다.
함화당에서 흰 양복차림을 한 60살의 이노우에와 강굴강굴한 파마머리에 양장을 한 45살의 그의 처 다께꼬가 고종과 민비를 알현하였다.
얼굴에 웃음을 한가득 띠운 이노우에가 고종에게 값진 선물을 주었다.
선물곽을 받아 열어본 고종의 얼굴이 대번에 환해졌다.
《오, 금시계!…》
《페하, 시가로 6천원상당의 스위스제 오골금시계입니다.》
이노우에의 말에 고종은 저으기 놀란 눈으로 그를 건너다보았다.
《아니, 그렇게 비싼 시계요?》
《페하, 저의 성의일뿐입니다.》
이노우에가 경건히 머리를 숙였다.
때마침 시계에서 시간을 알리는 음악소리가 울려나오자 고종은 아이들처럼 좋아서 어쩔줄 몰라했다.
《공사, 뭐라구 감사의 말을 해야 할지 모르겠소.》
이노우에는 다시금 공손히 고개를 숙였다.
그가 제자리로 돌아와 앉자 이번엔 양장을 한 그의 처 다께꼬가 또한 해반주그레한 얼굴에 애교가 함뿍 담긴 웃음을 짓고 민비에게 선물을 바쳤다. 선물곽을 열어보이며 나직이 입을 벌리는 그 녀자는 아름답다기보다 유럽녀인마냥 세련되고 우아해보였다. 그도 그럴것이 그는 1년나마 남편과 함께 유럽제국을 순방하면서 유럽의 문명을 섭취하였으며 조약개정을 위해 자기 남편의 발기로 세운 유럽식나이트클럽인 《로꾸메이깡(록명관)》에서 녀주인공역을 놀았던것이다. 이를 《로꾸메이깡외교》 혹은 《로꾸메이깡시대》라고 한다.
《왕후페하, 다이야몬드목걸이입니다.》
고종처럼 민비도 놀라마지 않았다.
《금강석목걸이를?! …》
《시가로 3천원인 희귀한 보석입니다.》
《그래요?》
민비의 얼굴에도 놀람과 기쁨의 표정이 한데 어울려 떠올랐다.
《고맙습니다. 부인, 어서 앉으세요.》
《황송하옵니다.》
뒤걸음질로 다께꼬는 의자에 와서 무릎우에 두손을 놓으며 얌전히 앉았다.
시립한 궁내대신 리경식이며 외무대신 김윤식 등 여러 대신들의 얼굴에도 안도와 기쁨의 표정이 어렸다.
참가자들이 다 물러가고 이노우에 혼자 남게 되자 그는 단독으로 고종과 민비를 상대로 이야기를 계속했다.
《그간 조선에서 오랜 가물뒤에 장마비가 내려 농촌이 큰 피해를 받은데다가 북부에서 발생한 장티브스가 서울에까지 퍼져 이미 수천명의 사망자가 나왔다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페하께서 얼마나 걱정이 크시겠습니까?》
얼굴에 동정의 빛을 띠우고 이렇게 말한 이노우에는 또 공손히 머리를 숙였다. 고종도 머리를 주억거렸다.
《말해 무엇하겠소.》
이노우에가 못내 송구스러운 표정으로 낯색을 바꾸더니 사과하듯 겸양스럽게 말했다.
《페하, 지난 기간 우리의 간섭으로 인해 조선왕실이나 정부사이에 더러 오해와 반목이 조성되기도 하였는데 이는 본 사신이나 일본정부의 본의가 아니였음을 량해해주시기 바랍니다.》
《…》
늘 거물스럽고 거벽스러운 고자세를 취하고 상대를 깔보듯이 기염을 토하군 하던 이노우에의 너무도 달라진 태도에 고종과 민비는 좀 어안이 벙벙한 모양이였다. 어디 그의 말을 끝까지 듣고보자 하는 식으로 고종과 민비는 침묵을 지키고있었다.
자기의 언변에 도취된 이노우에는 저도 모르는 사이 방안을 거닐고있었다.
《우리 천황페하와 정부의 성심성의는 어디까지나 조선국의 독립을 공고히 하며 동시에 왕실의 안전을 도모코자 함에 있으니 금후 이 나라 왕실에 대하여 만일이라도 반역을 도모하는자가 있을 경우 일본정부는 단연 병력을 사용해서라도 왕실을 보호하며 귀국의 무사, 안녕을 담보할것입니다.》
민비는 눈을 쪼프리고 자기의 마음속 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어찌된 일인가?… 한달남짓 귀국했다가 다시 온 이노우에가 박영효의 망명사건이나 일본의 내정간섭을 거부한 상감마마의 칙어에 대해 아무런 언급도 없으니… 확실히 이노우에의 태도는 이전과 퍽 다르다. 그가 변했단 말인가? 아니면 우리 나라에 대한 일본의 정책이 달라졌단 말인가? …)
민비의 의혹은 사실에 부합된것이였다. 이노우에의 태도가 이처럼 180도로 달라지게 된데는 그럴만한 까닭이 있었다. 그는 조선에로의 출발에 앞서 이또총리, 무쯔외상과 함께 조선문제를 의논하였다. 이른바 일본정계의 《3두마차》라고 하는 3거두회합이였다.
이날 무쯔는 그래도 조선에 있어서 일본세력기반의 최후교두보로 믿었던 박영효마저 축출당하고보니 이제 일본이 발붙일 곳은 완전히 없어지고 일본이 추진시킨 내정개혁도 물거품으로 되였다고 두덜거렸다. 또한 그는 얼마전에 조선국왕이 대신회의에서 국가대사를 자기가 친재, 시행할것이라고 언명했는데 이것은 일본의 내정간섭을 정면으로 거부한 로골적인 도전이라고 하면서 일본으로 볼 때는 조선내정에 깊숙이 파고들었던 지배력의 완전한 소멸이라고밖에 말할수 없다고 울분에 넘쳐 뇌까렸다.
이또는 이노우에를 언짢게 바라보면서 그가 민비에 대해 지내 강경책을 쓴것은 실책이였다고 비난했다. 상대국의 유력자를 손아귀에 넣고 그를 조종함으로써 자국의 리익을 증진시키는것이 제일 중요한데 조선에 있어서는 민왕후를 빼놓고 리용할만 한 단 한사람의 인물도 없으며 민비야말로 조종해서 리용할만 한 유일한 인물인데 이러한 야심있고 실력있는 인물을 눌러서 정치간섭을 금지한다는것은 거의 불가능한 일일뿐더러 억지로 누르려고 하면 녀성특유의 음험한 수단을 쓰기에 그 피해는 오히려 더 커질뿐이라고 하였다. 속담에 녀자가 독을 품으면 돌벽도 뚫고나가고 오뉴월에도 서리친다고 하지 않는가. 압박하여 음성적으로 반발하게 하는것보다는 차라리 드러내놓고 참정의 길을 열어주어 야심을 만족시키게 하는척 하며 그를 리용하는것이 상책이니 이번에는 강압정책대신 미소정책, 온화정책으로 민비를 틀어쥐라고 이노우에의 등을 떠밀어 조선으로 되보냈던것이다.
걸음을 멈춘 이노우에는 고종과 민비를 갈마보고나서 진중하고도 온화한 태도로 그리고 저도 기뻐 못 견디겠다는듯 말했는데 그것은 마치도 귀중한 비밀을 토설할 때 사람들이 짓군 하는 그런 표정과 비슷하였다.
《페하, 본 사신이 보건대 조선에서 가장 중요하고 가장 시급한 문제는 뭐니뭐니해도 재정문제입니다. 돈이 없이는 독립의 기초도, 근대사회건설도 사실상 불가능한것입니다. 에, 그래서 일본정부는 피페한 조선의 재정을 개건하기 위해 300만엔의 거액을 조선정부에 기증하기로 하였습니다.》
고종과 민비는 깜짝 놀라 강직된 사람들마냥 움직이지 못했다. 고종은 벌린 입을 닫지 못하고 민비는 가슴우에 모두어잡은 두손을 내리우지 못했다. 거덜난 국고금때문에 늘 허덕이는 그들이고보면 놀라지 않을수 없는것이다. 오죽하면 감사 한자리에 10~20만냥, 고을원 한자리는 최하 5만냥에 팔아 국고금을 충당하는 매관매직놀음까지 벌리겠는가? 더우기 이노우에가 말한 기증금은 우방이라고 하는 로씨야에서도 엄두를 낼수 없이 많은 액수였다.
이윽하여 고종이 제 귀를 의심하듯, 자기가 입을 벌리면 방금 이노우에가 말한 그 기증금이 가뭇없이 사라지기라도 하듯 조심스럽게 물었다.
《공사, 방금 말한 그것이 사실이요?》
이노우에는 득의양양한 기색으로 고종의 말을 받았다.
《페하, 일국을 대표하는 공사가 그런 망언을 하겠습니까? 300만엔 기증은 사실입니다.》
민비도 기쁨의 소리를 뿜어던졌다.
《공사, 어쩌면 그런 큰 돈을!…》
이노우에는 일본정부로서도 그런 엄청난 돈을 조선에 기증한다는것은 여의치 않은 일이라고 하면서 하지만 조선사정을 잘 알고있고 또한
제국정부에서 발언권이 있는
《공사, 감사의 마음을 어떻게 나타내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민비의 말에 이노우에가 으시대는 투로 또 입을 벌렸다.
《에, 본 사신은 이번 기증금의 배정안까지 마련하고있습니다. 에, 300만엔중 200만엔은 경인간의 철도부설에 사용될것인바 그 가운데서 100만엔은 왕실소유의 주식자본으로 할것입니다. 그리고 나머지 100만엔중에서 50만엔은 정부경비의 부족을 보충할것이고 에, 남은 50만엔은 왕실재산으로 충당할것입니다.》
고종과 민비는 기쁨에 겨워 서로 마주보았다. 그들은 정녕 이것이 꿈인가싶었다.
하지만 우쭐대기 좋아하는 이노우에가 아직 일본정부에서 정식으로 결정하지도 않은 기증금문제를 경솔하게 발설함으로써 그도, 조선왕실도 후에 골탕을 먹게 될줄은 이때는 누구도 몰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