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111 회)

제 8 장

을미사변의 전야

7

 

이노우에와 머리를 맞대고 새로 구성된 조선정부의 각료명단을 들여다보고있던 스기무라는 랑패스러운 표정으로 얼굴을 쳐들었다.

《각하, 새 정부는 한마디로 말해 〈김피민육〉의 내각입니다. 겉으로는 김홍집내각이지만 알속은 민비내각이란 말입니다.》

《으음.》

이노우에도 골살을 찌프리며 신음소리를 냈다. 스기무라는 각료명단을 손가락으로 짚어가며 설명했다.

《각하, 보십시오. 김홍집이나 김윤식이는 중도적립장이라고 하겠으나 새로 탁지대신이 된 심상훈은 완전한 민비의 심복이고 군무대신 안경수는 친일파로 출세했으나 이제는 거의 민씨쪽으로 기울어졌으며 내무대신 박정양은 친미파로서 민씨계렬에 흡수되였고 법무대신 서광범이도 지금은 리완용이나 리범진의 정동파에 가담하고있습니다. 그러니 3차 김홍집내각은 대내적으로는 왕실을 위한 내각이고 대외적으로는 유미파가 우세한 내각입니다.》

신경질적으로 벌떡 의자에서 일어난 이노우에는 성난 기색으로 방안을 오락가락하였다.

그는 악에 받쳐 고아댔다.

《흥, 이게 민비의 대답이란 말이지.》

어느새 의자에서 몸을 일으킨 스기무라는 저도 이노우에와 걸음을 맞추며 떠벌였다.

《이뿐이 아닙니다. 지금 조선정부는 운산금광은 미국에, 금성광산은 도이췰란드에, 은산금광은 영국에, 경성과 경원광산은 로씨야에 할당했거나 하려고 합니다.》

《흥, 조선이 서양모리배들의 즐거운 사냥터로 되였단 말이지.》

《하지만 우리 일본은 그 즐거운 리권사냥에서 철저히 배제당하고있습니다.》

치받치는 울화를 참을수 없어 우뚝 걸음을 멈춘 이노우에는 두주먹을 쳐들고 발악하듯 고함을 질렀다.

《민비, 이 암여우같은 년! 발기발기 찢어죽일테다, 찢어죽이겠단 말이야!》

한참 히스테리적광기를 부린 이노우에는 허탈감에 잠겨 안락의자에 털썩 주저앉았다. 그는 방안의 기물들이 빙글빙글 돌아가고 커다란 산이 앞을 콱 가로막는듯 한 환각, 끝없는 나락속으로 굴러떨어지는듯 한 환시 그리고 죽음의 공포속에서 자신이 지르는 비명을 듣는듯 한 환청속에 빠져들었다. 하더니 눈이 째지고 머리를 풀어헤친 민비가 불을 뿜는 혀를 날름거리며 자기에게로 한발한발 다가오는 환상이 눈앞에 펼쳐졌다.

《아!-》

눈을 딱 감은 이노우에는 두팔을 허우적거리며 절망적인 비명을 질렀다.

《각하!》

스기무라가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이노우에를 불렀다. 그제야 환각에서 깨여난 이노우에는 《후-》한숨을 내쉬며 손바닥으로 이마전을 훔쳤다. 손바닥에 식은땀이 즐벅하게 묻어났다.

이때 방에 들어선 전신수가 스기무라에게 전보장을 넘겨주었다.

《각하, 도꾜에서 긴급전보입니다.》

《읽게.》

이노우에는 모든것이 귀찮고 성가시다는 태도였다.

스기무라가 전보문을 들고 읽었다.

《〈예비역륙군중장 미우라 고로자작이 신임공사로 곧 부임하게 된다. 이노우에는 속히 관무를 인계하고 귀국하라. 림시의회도 소집하지 않기로 결정된 이상 기증금의 확답은 할수 없다.〉》

스기무라는 전보장에서 눈길을 들지 못했다. 일락천장하여 너무도 비참한 상태에 처해있는 이노우에의 꼴을 차마 볼수 없었던것이다.

얼마후 체념에 잠긴 이노우에의 입에서 까닭모를 시조 한수가 흘러나왔다.

 

이슬로 태여나 이슬로 사라지는 이내 몸

인생의 어려운 물결도 꿈 또한 꿈이려니…

 

시조를 외운 이노우에는 락심한 어조로 중얼거렸다.

《300년전에 조선을 정복하기 위해 7년간이나 싸우고도 패전했을뿐아니라 권력의 자리에서마저 쫓겨난 관백 도요도미 히데요시의 시조요.》

의자에서 일어난 이노우에는 천천히 창가로 다가갔다. 그의 시야에 저 멀리 위엄스런 북악산이며 웅건한 경복궁이 안겨왔다.

그의 입에서 우수에 찬 처량한 소리가 흘러나왔다.

《미지의 산천이요, 미지의 민족이로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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