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112 회)

제 8 장

을미사변의 전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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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정위님, 엄정위님, 좀 쉬였다 합시다.》

누군가 자기에게 소리치는 바람에 엄병무는 삽질을 멈추고 허리를 폈다. 경희루의 련못변두리에 웃동을 벗고 검정군복바지를 무릎까지 걷어올린 사병들이 줄느런히 앉아있었다. 그제야 쉴참이란것을 알아차린 병무는 정갱이까지 푹푹 빠지는 감탕에서 발을 옮겨짚으며 못가로 나왔다.

사병들 틈에 끼워앉은 병무가 허리춤의 수건을 뽑아 얼굴이며 목덜미에 즐벅한 땀을 씻는데 젊은 사병이 그에게 담배쌈지와 종이를 내밀었다.

《정위님, 한대 마십시오.》

그러자 곁의 나이지숙한 사병이 그를 핀잔했다.

《자넨 엄정위 님이 담배를 피우지 않는다는걸 여적 모르고있었나?》

사병들은 여느 군교들과는 달리 상하차별을 두지 않고 자기들과 허물없이 섭쓸릴뿐만아니라 무슨 일에서든 몸을 아끼지 않고 직심스러운 그를 친근하게 대했다.

하지만 병무는 자기 나이또래는 물론 나이가 많은 사병들로부터 존대를 받을 때면 매양 거북스러움을 느끼군했다. 그는 며칠전에 부위(중위)로부터 정위(대위)로 승급하였다. 그의 때이른 승진을 두고 동료들도 놀라와했지만 병무도 좀 어리둥절하지 않을수 없었다. 하지만 그것이 병무를 자기의 심복으로 만들려는 민비의 계략에 의한것임은 누구도 몰랐다.

《제길, 우리가 군댄가, 부역군인가. 대궐안의 온갖 역사질에는 우리 시위대를 내모니 말일세.》

누군가 볼부은 소리로 두덜거렸다. 그의 말에 다른 사병들도 이구동성으로 불평을 부렸다.

그럴만도 하였다. 오늘만 해도 그렇다. 일과에는 상오(오전)에 내무규정과 병기학에 대한 상학을 하고 하오(오후)에는 도수체조와 창격전훈련을 하게 되여있었다. 그런데 갑자기 그 모든것을 그만두고 경회루련못의 바닥감탕퍼내기작업을 하라는것이였다.

엄병무는 곧장 시위대대장인 현홍택을 찾아갔다. 현홍택은 교도중대가 훈련대로 개편되면서 시위대로 전근해왔었다. 이것도 역시 왕궁호위를 담당한 시위대의 중요성과 관련하여 민비가 취한 조치였다. 일과를 변경시킨 까닭이 무엇인가고 들이대는 병무의 말에 현홍택이도 딱한 기색으로 미국군사고문들이 군무대신에게 말해 그렇게 되였다고 하는것이였다. 그래서 병무는 사병들과 함께 역한 냄새를 풍기는 감탕판에서 줄땀을 흘리였다.

이때 병무에게 담배를 권하던 사병이 빈정거리는투로 말했다.

《저 미국량반들은 또 어디로 나들이 가시나?》

병무도 그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군복대신 중절모에 신사양복을 쭉 빼입은 미국군사고문들이 말을 타고 거들거리며 광화문쪽으로 가고 있었다.

병무는 대번에 눈살이 찌프러졌다. 7년전에 자기의 어린 녀동생 병옥이가 미국선교사놈에게 유괴되여 행방불명이 된 후로 그놈들에 대한 감정이 좋지 않던 병무는 시위대를 교련시키는 미국군사고문들을 상대하면서 더더욱 그들을 질시하게 되였다. 왕궁시위대의 미국교관은 륙군소장 다이, 대좌 가민스, 소좌 리이였는데 그들은 조선정부로부터 높은 봉급을 받으면서도 시위대의 교련에는 아주 등한시하였다. 가끔 시위대를 정렬시키고 다이장령이 나타나군 하는데 뚱뚱한 몸에 운두높은 군모를 쓰고 까만 군복의 어깨에는 손바닥같은 누런 견장을 달고 어깨로부터 허리까지 누런 금줄을 늘어뜨리고 번쩍번쩍하는 누런 단추를 단데다 가슴에는 각종 훈패를 한가득 달고 떡 버티고 서있을 때면 과연 장군다운 어마어마한 위풍과 체모로 하여 시위대사병들은 잔뜩 긴장한 자세로 그에게서 눈길을 떼지 못하군 하였다. 그의 훈시의 태반은 미국 남북전쟁시기 자신의 용감성에 대한 자랑이였으며 훈시의 마감에는 반드시 《미국의 초대대통령인 죠지 워싱톤장군을 보라. 군인은 지략과 용감성을 기본으로 한다.》는 말로 끝내군하였다. 그는 조선에 온지 8년째여서 웬간한 조선말, 더우기 군사용어는 조선말로 자유자재로 하였다.

그러나 엄병무가 보건대 미국교관들은 자기가 교도중대에 있을 때의 일본교관들보다 더 직무에 태만하였다. 그들은 조선시위대에게 상식적인 제식훈련이나 사격훈련을 간단히 주고는 어디로 무엇을 하러 가는지 사라지군하였다. 사병들이 수군거리는 소리를 들으면 그들이 《정동구락부》에 도박놀이를 간다는것이였다. 그리고 더운 여름철에는 명사십리나 송도원과 같은 경치좋은 해변가에 해수욕놀이를 가군 하였으며 가을철이나 겨울철에는 승마바지에 가죽 덧옷을 입고 쌍알배기렵총을 메고 송악산이나 구월산에 수렵놀이를 가군 하였다.

병무는 그런 미국놈들이나 일본놈들을 볼 때마다 눈에서 불이 일고 피가 끓었다.

그런데 더욱 괴이쩍고 수상쩍은것은 미국군사고문들이 왜놈들과 곧잘 섭쓸리고 친숙하게 지내는것이였다. 류류상종이라고 다같이 우리 나라를 먹자는 강도들이여서 그런가. 저런 놈들밑에서 언제 강건한 조선군대가 육성된단말인가. 그런데도 민중전이나 조정의 대관들은 대국의 도움이 없으면 우리 나라가 자체로 살아갈수 없는것으로 생각한다.

얼마전에 아정은 민비가 약속한대로 자기를 궁밖으로 내보내주지 않으면 자기네 둘이 몰래 발전된 나라에 도망가서 고학으로 기술을 배워가지고 고국으로 돌아오자고 했다.

그때는 기연가미연가하여 그 말을 들었지만 이제는 그럴 결심이 드놀지 않는 바위처럼 그의 가슴속에 자리잡고있었다. 자기가 류학한다면 쪽발이왜놈장교들은 말할것도 없고 양코배기미국의 다이보다 얼싸하게 훌륭한 군사가가 되여 돌아올것이다. 그리하여 그 누구도 범접하지 못하는 씩씩하고 용감한 조선군대를 만들어놓을것이다.

이런 생각을 하던 병무는 저도 모를 한숨을 내쉬였다. 왜놈들이 우리 나라를 총칼로 타고앉아 주인행세를 하는 판국에서 언제 어떻게 조선군대를 만든단말인가.

기울어지는 나라의 형세를 두고 병무는 점점 생각하는 품이 많아졌다. 아니, 고민하였다. 그럴수록 태봉이가 하던 말이 골수에 사무치도록 마쳐왔다. 나라가 칠성판에 올랐는데 어찌 제 일신상의 안위를 생각할수 있으랴. 정녕 나라가 없으면 아정이와의 사랑도 유지할수 없으며 가정도 부지할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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