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116 회)
제 8 장
을미사변의 전야
10
공사관의 현관으로 들어서는 참으로 스기무라를 만난 오까모도는 엄지손가락으로 우를 가리켰다.
《계시오?》
《계시는가보오.》
스기무라는 시답잖게 대꾸했다. 그의 곁으로 가까이 다가서며 오까모도가 각근히 물었다.
《공사는 요즘 어떻소?》
《나도 모르오.》
《매일 낯을 맞대고있으면서도 모르다니?》
《글쎄, 불경책만 읽고있으니 어디 그 속내를 알겠소.》
이윽고 웃층의 공사방으로 들어간 오까모도는 불경책을 보고있는 미우라에게 지금 조선정부에서 벼슬아치들의 복장을 원래대로 고치는 소동을 벌리고있다고 고하였다.
미우라는 불경책에서 눈길도 들지 않은채 민비네가 원래의 복식대로 궁신들을 입히겠으면 입히고 말겠으면 마는게지 그게 우리와 무슨 상관이 있는가고 심드렁하니 대척했다.
《이거야 이노우에각하가 고심끝에 내정개혁의 일환으로 단행한것인데… 이건 분명 우리 일본에 대한 반항적표시입니다.》
미우라는 이마너머로 오까모도를 쳐다보았다.
《저들 하고싶은대로 하게 모른체 하오.》
오까모도는 쓴입을 다시고나서 다시 입을 벌렸다.
《복식은 그렇다치고 인사문제처리는 간섭해야 할것 같습니다.》
《인사문제?》
《예, 배일분자인 민영환을 주미공사로 임명하고 일본과 친한 내무협판 유길준을 멀리 의주부사로 좌천시키고 대신 친로파인 리범진을 그 후임으로 임명했습니다.》
미우라가 느닷없이 웃음을 터뜨렸다.
《하하하…》
미우라가 웃음을 멈추자 오까모도는 랭랭한 표정을 띠웠다.
《이게 웃으실 일입니까. 이런 반발은 처음입니다.》
《처음이라…》
오까모도에게 무슨 말을 할듯말듯 하던 미우라는 넓둥그런 얼굴에 초연한 빛을 띠웠다.
《난 남의 나라에 내정간섭을 하러 온 사람이 아니요.》
《예?!》
《그뿐이요.》
한동안 미우라를 불순하게 쏘아보던 오까모도가 열띤 소리로 뇌까렸다.
《각하께서 하루종일 독경이 아니면 산책이나 하시니 이 불안하고 위급한 대세를 모르시지 않습니까?》
《난 정치엔 문외한이라 당신이 좀 가르쳐주오. 비꼬는 소리가 절대 아니요. 방금 조선에 오다보니 모르는게 너무도 많소.》
《각하의 말씀이 거짓이 아니라면 제 속생각을 좀 말씀드리겠습니다.》
오까모도는 지금은 그 어떤 외교적수완보다 과단성있는 행동만이 절실히 필요한 시기라고 하면서 조선과 로씨야의 관계를 그냥 내버려둔다면 일본의 세력은 완전히 조선반도에서 배척당하게 되고 조선의 운명은 로씨야가 틀어쥐게 된다고 하였다. 그런데 이것은 단지 조선반도의 위기로 될뿐만아니라 동양의 위기, 나아가서 일본제국의 일대 위기라고 해야 할것이라고 하였다.
열기로 번뜩이는 오까모도의 눈을 마주보는 미우라의 넓둥그런 얼굴도 어느덧 긴장한 빛을 띠였다.
잠시 말을 끊었던 오까모도는 다시 계속했다.
《그러면 여기에 대처할 길은 어디에 있겠습니까? 오직 비상수단을 써서 조선과 로씨야의 관계를 끊어버리고 로씨야가 의거할수 있는 곳을 없애버리는것외에 다른 방도가 없습니다. 다시말하면 궁중의 중심인물이며 조선의 실제적통치자인 민비를 제거하여 로씨야와 결탁할수 있는 당사자를 없애버리는것보다 다른 좋은 대책이 없단 말입니다. 칼로 자르지 못하면 도끼로 찍어야 합니다.》
벌겋게 상기된 오까모도의 낯은 잔인하게 일그러져있었다. 독이 오를대로 오른 가을철의 푸독사같은 오까모도의 낯에 눈길을 박은채 그의 말을 심취하여 듣던 미우라는 저윽 감동된 기색으로 고개를 끄덕거렸다.
《칼로 자르지 못하면 도끼로 찍어야 한다. … 음, 오까모도, 당신한테 전적으로 의거하라고 하던 무쯔외상의 말이 옳았소. 나도 부임된 이상 한몸을 희생할 결심이요.》
방으로 들어온 스기무라가 미우라의 집무탁우에 수십장의 사진을 내놓았다. 인화지가 채 마르지 않아 눅눅한 그 사진들은 한결같이 민비의 초상이였다.
미우라가 사진 한장을 들고 유심히 들여다보았다.
(이 연약한 녀인이 그 작은 손으로 동양 3국을 밀가루반죽처럼 주무른단 말인가.)
속으로 이렇게 중얼거린 미우라는 불현듯 집무탁앞에서 움쭉 일어섰다. 오까모도와 스기무라도 얼결에 따라일어섰다.
미우라에게서 촌늙은이와 같은 어리숙한 모습은 씻은듯이, 가뭇없이 사라지고 대신 일선군인과 같은 랭철하고 날카롭고 살기에 찬 모습이 살아났다.
미우라의 송곳같은 눈초리가 스기무라를 걸쳐 오까모도에게 가멎었다.
그는 서랍에서 종이 한장을 꺼내 오까모도에게 주면서 엄숙하게 지시했다.
《오까모도군, 이 명단에 있는 사람들을 래일 오전 10시까지 남한산성에 오라고 하시오. 명색은 가을철사냥놀이를 한다고 하시오.》
오까모도와 스기무라는 놀란 눈길로 서로 마주쳐다보았다. 이 위급한 때에 사냥놀이를 한다는것도 그렇지만 그런 일을 자기의 서기관을 제쳐놓고 오까모도에게 맡기는것도 의외였던것이다.
교정지를 검토하고있는 아다찌사장에게 편집장 고바야가와가 관보를 내밀었다.
《사장, 오늘관보에 또 인사발표가 나왔소.》
교정지에서 눈을 뗀 아다찌가 관보를 받으며 중얼거렸다.
《엊그제 민영환의 주미공사임명과 유길준내무협판의 좌천이 있었는데 또?》
고바야가와가 관보지면을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울기있는 소리로 내뱉았다.
《자, 보시오. 농상공무대신 김가진의 해임!》
《이거야 신통히 친일적인 각료들이 아닌가?》
《이제는 민비가 로씨야를 끌어당기고 우리 일본을 배척하는 친아배일로 파죽지세로 나가고있소.》
《그런데도 미우라공사는 스님처럼, 농군처럼 팔짱을 끼고있으니 에이.》
이러는 아다찌를 흘겨보며 고바야가와가 더 어성을 높여 떠들었다.
《그렇게 뒤에서만 시비질하지 말고 다시 찾아가서 정면대결을 하든지 아니면 우리 〈한성신보〉사일동의 명의로 본국에 제소하든지 량단간에 어느 하나를 택해야 하지 않소?》
울화가 치받친 그들의 기분을 부채질하듯 원화기가 귀따갑게 울었다.
고바야가와가 수화기를 들어 귀가에 가져갔다.
《〈한성신보〉편집장입니다. 예?… 아, 오까모도상입니까?… 있습니다.》
아다찌가 시끄러운듯이 수화기를 바꾸어들더니 송화구에 입을 가져갔다.
《예, 사장입니다.… 뭐요, 래일 10시에 남한산성으로 오라고… 알겠소.》
수화기를 제자리에 덜컹 놓은 아다찌는 혼자소리하듯 중얼거렸다.
《외진 산속에서 결투를 하려나…》
이튿날 아침, 캡을 눌러쓰고 당꼬(승마)바지에 장화를 신은 아다찌는 허리에 칼을 차고 어깨에는 사냥총을 멘 차림새로 남한산을 향해 걸음을 걸었다.
구름 한점없이 청명한 가을하늘아래 산야에는 단풍이 들기 시작하였다. 깊은 골짜기가 굽어보이는 남한산의 칼벼랑우의 번번한 바위에 미우라, 오까모도, 스기무라, 구스세가 각기 사냥총을 어깨에 기대세우거나 무르팍에 놓고있었다.
좀 아래 둔덕진 곳에 그들이 타고온 말들이 한가스레 풀을 뜯고있었다.
미우라가 시계를 보더니 산아래를 살폈다. 그만은 사냥총도 일본도도 없었다.
《아다찌가 왜 아직 오지 않는가? 오까모도?》
《분명 10시까지 오라고 했습니다.》
이때 칼벼랑을 향해 스적스적 올라오던 아다찌가 미우라를 보고 주춤했다. 그는 미우라와 그옆에 앉아있는자들을 유심히 살폈다. 미우라의 앞에 다가선 아다찌가 그를 노려보며 물었다.
《여기가 결투장소요?》
미우라는 웃으며 머리를 가로저었다.
《그럼?》
《결투장소는 바로 저기 경복궁이요.》
《뭐요, 경복궁?!…》
저 멀리 운무속에 잠긴 경복궁이 아슴하게 내려다보였다.
자리에서 움쭉 일어선 미우라는 아다찌를 보고 의미심장하게 웃었다. 그는 견장이 없는 프랑스식 검은 군복에 장화를 신고있었다. 군복차림이 미우라에게 잘 어울린다는것을 여기에 모인 작자들모두가 새삼스럽게 느꼈다.
누가 구령을 주지 않았으나 모두가 자리에서 일어나 미우라앞에 일렬횡대로 정렬했다. 아다찌는 아직 영문을 알수 없으나 오까모도의 곁에 가섰다. 미우라가 그들을 하나하나 일별하였는데 그의 무인다운 엄정성에 모두가 긴장해졌다. 미우라에게서 로승이나 촌늙은이같은 그런 어리무던한 구석은 어디에서도 찾아볼수 없었다. 그는 총포탄이 울부짖는 전장의 불비속에서 닦고 깎고 쓸어낸듯 한 그런 절제와 엄격성, 화약내, 쇠내, 땀내와 열기가 한데 뒤엉킨 그런 융합체와도 같았다.
이 순간 미우라의 뇌리에는 자기를 조선공사로 파견하면서 특별히 강조하던 내각총리 이또 히로부미의 말이 떠올랐다. 정한, 즉 조선정복은 일본의 최대급선무로서 국시중의 국시인데 그것이 왕후 민비로 하여 애를 먹고있다. 지난날 청국에 의존하던 그가 일청전쟁에서 청국이 패하자 이번에는 로씨야에 가붙고있다. 사태는 아주 엄중하다. 지금의 사태를 방관시한다면 일청전쟁을 포함하여 조선정복을 위해 기울인 우리의 모든 고심참담한 노력은 백지화될수 있다. 일청전쟁을 전후하여 지금까지 청국공사를 하던 오또리 게이스께, 내무상인 이노우에 가오루를 조선공사로 파견하였지만 그들은 다 민비를 견제하지 못하였으며 도리여 교활무쌍한 민비에게 업혀돌아갔다고 할수 있다. 때문에 정부는 완강하고 무자비한 륙군중장인 자작, 당신을 후임공사로 조선에 파견하기로 하였다. 왜 이런 조치를 취하게 됐는가를 당신은 리해하리라고 본다. 문제는 조선의 왕후 민비의 존재, 그 실체를 없애버려야 한다. 이 길이외에 다른 방도가 없다. 우리 일본속담에도 있듯이 칼로 자르지 못하면 도끼로 찍어버려야 하는것이다. 시일은 빠를수록 좋다.
이런 생각을 한 미우라의 낯은 보기에도 무섭게 일그러졌다.
《사냥군》들은 자기들도 모르는 사이 공포에 가까운 두려움을 품고 그를 바라보았다. 그들은 마치도 1인2역을 수행하는 능숙한 배우의 연기를 보는것만 같았다. 미우라는 불꽃이 번쩍이는 눈으로 다시한번 부하들을 훑어보고나서 입을 열었는데 그 목소리는 사람들의 페부를 찌르는듯 찌렁찌렁하고 날카로왔다.
《에또, 본관은 먼저 군들에게
선자리걸음을 하며 미우라는 말을 계속했다.
《눈은 마음의 창문이라고 하는데 본관은 마음속의 불길을 감추기 위해 눈에 안개를 끼게 했다. 또한 언어란 자기 뜻을 표현하기 위한 수단이라고 하는데 달리말하면 언어란 자기 속생각을 감추기 위한 수단이기도 한것이다. 때문에 본관은 속에 없는 소리를 하군 했다. 그러면 본관이 무엇때문에 이런 너절한 위장술책으로 군들의 오해를 사게 했는가? 그건 바로 저 경복궁에 도사리고있는 암여우, 민비를 속이기 위해서였다. 〈정한〉을 위한 청국과의 전쟁에서 얼마나 많은 우리 일본남아들이 목숨을 잃었는가. 그런데 그들이 흘린 피가 바로 암여우, 민비로 하여 물거품이 되고있다.》
미우라는 손가락을 뻗쳐 창으로 찌르듯 경복궁을 가리켰다.
《제군들을 이 남한산에 부른것은 가을사냥을 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경복궁사냥을 하기 위해서란것을 이제는 알만 할것이다. 우리는 어떤 수단과 방법을 써서라도 민비를 꼭 없애야 한다. 이 작전에서 여기에 모인 제군들이 명치유신의 지사들처럼 앞장에 서야 한다. 구체적인 시행날자와 시간, 행동방향에 대해서는 차후에 구체적으로 언급하겠다. 끝으로 한가지, 이 비밀은 우리만이 알고있어야 한다. 비밀은 목숨으로 담보되여야 한다는것을 명심하라. 이상!》
이어 남한산골짜기에서는 사냥총소리가 《탕! 탕!》 울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