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121 회)

제 9 장

력사는 과거가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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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부터 모든 행동은 무언속에 진행되였다. 유령같은 몇명의 검은 무리가 신보사의 현관문을 열고 밖으로 나갔다. 조금뒤에 또 한무리가 밖으로 나갔다.

밖에 서있던 하나꼬가 맨뒤에 나오는 아다찌를 보고 와락 품에 안겼다.

《하나꼬답지 않게 왜 이러오?》

아다찌가 젊은 안해의 잔등을 쓸어주며 비장감에 잠겨 말했다.

《함께 가고싶지만 허락안하시겠지요? 하지만 내 마음만은 가슴에 품고 가주세요.》

하나꼬가 남편을 힘있게 끌어안았다. 아다찌는 자기가 살아서 돌아오리라는것을 번연히 알면서도 오늘 밤 안해와의 작별이 마지막이라는, 이제는 사랑하는 젊은 안해를 영원히 다시는 만나지 못한다는 거짓감정으로 자신을 달래였다. 이렇게 자신을 기만하는것이 비감을 더해주어 그의 심정을 만족스럽게 해주었던것이다.

하나꼬도 비장한 표정을 띠우고 남편을 쳐다보았다.

《제 걱정은 마세요. 전 명치유신지사의 딸이고 일본의 래일을 위해 현해탄을 건너온 야마도민족의 녀인이예요.》

《고맙소, 하나꼬! 내 기어이 성공하고 돌아올테요.》

《기다리겠어요!》

굳게 포옹하는 젊은 년놈의 눈에 눈물이 글썽거렸다. 남의 나라 왕비를 살해하기 위해, 연약한 녀인을 죽이려는 흉책을 꾸미면서도 그것을 그 무슨 정의를 위한 의거처럼 자기들의 행위를 위장하고 자기들의 감정을 기만하는 이처럼 철면피하고 파렴치한 족속이 왜놈들말고 또 어데 있겠는가.

이밤 시간이, 력사가 이 살인귀들을 지켜보고있었다.

이 시각 경복궁의 건청궁연회장에서는 청국의 베이징에 도망가있다가 귀국한 민씨들의 우두머리 민영준이를 환영하고 그의 영전을 축하하는 연회가 한창이였다.

연회에 참가한 여러 대신들과 궁내 특진관들은 물론 상좌에 앉은 고종과 민비도 만족한 기색이였다. 흥겨운 풍악소리, 아악의 건드러진 선률이 연회장의 흥취를 더욱 돋구었다. 천정에서 비치는 산데리야의 휘황한 불빛…

하지만 민비의 표정에는 웃음기만 어리지 않았다. 그는 가끔 눈빛이 예리해지군하였다. 까닭모를 불안이 가끔 가슴속에 배회하군 했던것이다. 독경승으로 자처하던 미우라공사의 느닷없는 남한산 사냥놀이때문인지, 아니면 살모사같은 오까모도와 구스세무관의 급작스런 귀국소동때문인지 아직은 짚어말할수 없지만 이 모든것이 어쩐지 우연같지 않았다.

민비는 뒤전에서 량수거지를 하고 대기하고있는 궁내대신 리경식이를 불렀다.

《오늘 밤 수직은 누구요?》

《농상공무협판 정병하옵니다.》

《정병하? … 때가 때니만큼 잘 서라고 이르오.》

《알았소옵니다. 》

뒤걸음으로 어전에서 물러난 리경식은 신선한 밤공기를 페부깊이 들이마시며 걸음을 옮겼다.

가을날답게 구름 한점없이 맑게 개인 밤하늘에서 비치는 밝은 달빛이 궁전들의 이슬 머금은 지붕들과 고목들을 어루더듬고있었다.

건청궁대문밖에서 정병하를 만난 리경식은 수직을 잘 서라고 당부한 후 발길을 돌렸다.

정병하는 밝은 달을 쳐다보며 불평을 부렸다.

《하필이면 이런 날 궁수직을 설게 뭐람…》

두덜거리는 그의 말소리를 풍악소리가 삼켜버렸다.

누구인지 다가오는 기척을 느낀 정병하는 그쪽을 지켜보았다.

《누구냐?》

《시위대 부위 엄병무입니다.》

정병하앞에 선 병무는 차렷자세를 취했다.

《별일 없었는가?》

《예, 다른건 없고 저녁녘에 <한성신보>사 기자라는 일본인이 궁안에 들어와보자고 떼쓰는것을 쫓아버렸습니다. 그의 행색이 아무래도 수상쩍은데 오늘 밤 궁경비를 강화해야 할것 같소이다.》

《그래?… 알았소.》

정병하는 달빛어린 궁궐안의 포석길을 다시 걸어가며 생각에 잠겼다.

《일본인기자가 궁안에 들어가보자고 했다? … 하기야 구경하고싶었겠지. 한데 하필 오늘같은 날에?… 에라, 모르겠다. 일본이냐, 아라사냐 시국이 뒤숭숭한데…》

그가 엄병무의 말에 좀더 류의했더래도 이날 밤의 참혹한 사변은 미리 방지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당시 관리들의 직무태만, 더우기 정병하의 친일적경향으로 말미암아 엄병무의 경각성높은 요구는 묵살되고말았다.

뒤짐을 진 정병하는 산책하듯 궁궐뜰을 거닐며 예적 태종이 고려의 충신 정몽주를 회유하기 위해 읊었다는 시조를 제 식으로 흥얼거렸다.

 

이런들 어떠하리

저런들 어떠하리

달빛을 벗삼아

걸어본들 어떠하리

 

뒤짐을 지고 흔들흔들 걸어가는 정병하를 바라보는 엄병무는 생각이 많았다.

왜놈들이 놀아대는 꼴이 아무래도 수상한데 군무대신이하 무관들은 여전히 태평성대를 읊조리고있지 않는가. 또다시 작년 여름처럼 왜놈들이 신성한 왕궁을 습격점령할지도 모르는 일이였다. 하지만 그런 일이 되풀이되여서는 절대로 안된다는 생각으로 병무는 심신에 힘을 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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