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126 회)

제 9 장

력사는 과거가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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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치렬한 전투의 틈을 타서 왜놈들이 건청궁의 담을 넘어 곤녕합이며 신녕각, 옥호루의 지엄한 편전에 뛰여들었다. 궁녀들의 자지러진 비명이 울렸다.

고종이 신녕각 편전의 장지문을 쫙 열고 우뚝 서있었다.

그곁에서 왕세자 척이 겁기에 질려 떨고있었다.

《페하, 왜놈폭도들이!…》

어쩔바를 몰라하며 아뢰는 궁내무대신 리경식에게 고종이 급히 분부했다.

《빨리 중전한테 가보라!》

왜놈들이 건청궁의 이 방, 저 방을 미친개처럼 돌아쳤다.

편전으로 뛰여든 오까모도 일당이 거연히 서있는 고종을 보고 흠칫하더니 다음순간 그에게 다가들었다. 고종은 너무도 뜻밖의 사태에 어떻게 처신해야 할지 몰라 그저 우두커니 서있었다.

수염이 허연 궁신 한사람이 고종을 막아서며 소리쳤다.

《이 방은 대군주페하께서 계시오. 어서 나가오!》

오까모도가 야멸찬 표정으로 다가서며 뇌까렸다.

《우리는 국왕을 만나러 왔다. 저리 비키라!》

《뭐요?!》

항거하는 늙은 궁신을 훌 밀어제끼며 고종에게 가까이 다가선 오까모도는 품속에서 종이 한장을 꺼내여 고종에게 내밀었다.

《페하, 이 사태를 수습하자면 왕후를 페해야 합니다. 이 페후칙서에 서명하십시오.》

《무엇이?》

명함도 없는 왜놈의 건방진 수작에 고종은 눈을 부릅떴다.

《자, 어서!》

오까모도는 불경스럽게 고종의 코앞에 문서장을 들이댔다.

《무엄하다!》

오까모도의 손에서 문서장을 잡아챈 고종은 그것을 갈가리 찢어버렸다.

그러자 오끼하라경부가 위협조로 뇌까렸다.

《우리 말을 듣지 않으면 페하도 왕태자도 무사치 못하오.》

늙은 궁신이 격분으로 채머리를 떨며 항거했다.

《이게 무슨짓이냐?! 이 불법무도한 놈!》

늙은 궁신을 밀어제친 오까모도가 왕태자의 눈앞에 일본도를 쳐들며 위협했다.

《민비가 어데 있는가 대라!》

왕태자는 분을 참지 못해 몸을 부르르 떨었다. 고종도 노기찬 눈으로 오까모도를 쏘아보았다.

《좋다. 대지 않으면 우리가 찾아내겠다. 》

졸개들쪽으로 돌아선 오까모도는 살기를 띠우고 지껄였다.

《시간이 없다. 방들은 물론 벽장, 마루밑까지 샅샅이 뒤져 민비를 찾아내라.》

일본도를 쳐들고 다른 방으로 뛰여가는 오까모도를 뒤따라 아다찌며 다까하시 등 살인악당들이 달려갔다. 다른 방에서 뛰여나온 수비대장교들과 하사관, 경찰들이 오까모도의 패당에 합세했다.

마루를 구르며 달리는 장화, 군화, 게다짝들, 얼핏얼핏 지나치는 벽화들, 게다짝을 신은 발이 합문을 들이찼다. 와지끈 자빠지는 대형미닫이문짝, 황급히 달아나는 흰 버선발들, 남스란치마자락, 마주 뛰여오는 군화에 쫓기여 오도가도 못하고 갈팡질팡하다가 편전으로 쫓기여 들어가는 버선발들… 게다짝, 군화발들이 뒤쫓아간다. 대형유리꽃병이 군화발에 채워 박살난다. 스산한 광채를 뿌리며 허공을 내리긋는 일본도, 검붉은 피가 병풍에 확 휘뿌려진다.

이 수라장, 란장판을 짓누르듯 장화발이 떡 버티고섰다. 시위련대장 현홍택이였다. 그 거벽스러운 자세에, 그 서리발찬 기상에 왜놈들이 주춤거렸다.

하지만 눈에 달이 뜨고 살기가 뻗친 오까모도는 막무가내였다.

《시위련대장, 민비가 어데 있는가?》

《이 잰내비같은 놈아! 예가 어딘줄 알고 날치느냐!》

《나니?!(뭐야?!)》 하고 오까모도가 상통을 일그러뜨리는데 곁에 있던 오끼하라가 《조선놈의 새끼!》 하고 씨벌이며 현홍택한테 주먹을 안기였다.

불의의 타격에 현홍택이 넘어지자 왜놈불한당들이 그에게 왁 달려들어 마구 차고 짓밟았다.

민비 있는 곳을 대라고 궁녀들의 머리채를 쥐고 휘두르는 왜놈들, 섬돌계단아래로 달아나는 궁녀를 따라가 칼로 내리치는 왜놈들… 실로 살인귀들의 란무장이였다.

민비는 상궁, 궁녀들과 함께 편전의 구석쪽에 몰켜있었다. 합문앞에는 궁내무대신 리경식이 버티고 서있었다.

사방에서 《여우를 찾아라!》, 《민비를 죽여라!》 하는 왜놈들의 악청이 끊임없이 울렸다.

얼굴이 파랗게 질린 민비가 이발을 으드득 갈았다.

(나쯔미의 말이 맞았구나. 그런데도 내가 그 말을 명심하지 않았지. 내 명줄도 오늘로 끝장이란말이지. 분하고 원통하구나. 저 인백정불악귀같은 왜놈들에게 죄없이 죽다니?!… 아, 저 날강도 왜놈들에게 내가 나라의 문을 열어주어 결국 이런 죽음을 당하지 않는가! 우리 조상들이 그렇게 경계한 저 철천지 원쑤놈들을 집안에 끌어들였으니 백번 죽어 싸지…)

목숨이 경각에 이른 위급하고도 긴박한 순간에 민비의 뇌리속에는 자책과 반성과 희한의 생각들이 번개같이 줄달음쳤다.

자기를 지켜줄 힘이 이 세상에 하나도 없다는 생각에, 자기가 그렇게도 믿은 대국들이 팔짱을 끼고있다는 생각에 민비는 몸부림치고싶도록 안타깝고 절통하였다. 이이제이, 오랑캐로써 오랑캐를 막으려하다니, 이 얼마나 어리석고 암매한 생각이였는가. 내딴에는 묘책이라고 생각한 이이제이정략이 결국은 이 나라를 렬강이 란무하는 각축전마당으로 만들었고 그 소용돌이속에서 나도 죽음을 당하게 되지 않았는가.

이 순간 민비는 김옥균의 개화파들이 자수자강하고 부국강병해야 한다고 그렇게 절규하던 웨침들이며 전봉준의 《토왜구국》의 구호를 받들고 온 나라 백성들이 왜적들을 몰아내기 위해 목숨을 바쳐싸운 사실들이 얼마나 옳은 처사였는가를 페부로 절감하였다. 그들의 호소에 호응하고 그들과 합류할 대신 자기는 어떻게 행동하였는가. 때늦은 후회의 눈물이 민비의 볼을 타고 흘러내렸다.

아정이가 민비를 붙들고 눈물을 흘렸다.

《마마!…》

갑자기 장지문이 우지끈 자빠졌다. 장지문을 짓밟으며 오까모도, 아다찌, 다까하시, 우찌다와 같은 살인귀들과 일본군과 경찰악당들의 한 무리가 욱 쓸어들었다.

궁내대신 리경식이가 팔을 벌리고 침입자들을 막았다. 일본군 사관놈이 다짜고짜 그를 권총으로 쏴 갈겼다. 총탄을 맞고 쓰러지는 그에게 아다찌가 또 장검을 휘둘러댔다.

생천을 찢는듯 한 궁녀들의 비명이 터지고 울음소리가 울렸다.

그들에게 오까모도가 바락 악청을 질렀다.

《민비가 어데 있는가?》

아정이가 한손으로 민비의 손을 꽉 잡았다. 그의 얼굴에 결연한 빛이 어렸다. 그는 성큼 앞으로 나섰다.

《내가 왕후다.》

《엉?!》

아정의 너무도 도도한 태도에 왜놈들이 흠칫 놀라 서로 얼굴을 마주보았다.

눈을 쪼프리고 아정이를 쏘아보던 오까모도가 주머니에서 민비의 사진을 꺼내 대조해보더니 낯에 싸늘한 조소를 띠우고 악에받쳐 뇌까렸다.

《아니다! 빠가!》

오까모도는 일본도를 들어 아정이의 정수리를 내리쳤다.

《아!-》

아정은 이마를 두손으로 싸쥐였다. 손가락짬으로, 얼굴로 굵고 진한 피줄기가 콸콸 흘러내렸다. 그는 급기야 밑둥 잘린 나무처럼 쓰러졌다.

궁녀들에게 둘러싸여있던 민비가 경악으로 저도몰래 소리쳤다.

《아정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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