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지막회)

제 9 장

력사는 과거가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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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리치는 민비에게 왜놈들이 일시에 눈길을 박았다. 오까모도의 눈이 류다른 광택으로 번들거렸다. 그의 눈앞에 민비의 사진이 전광석화처럼 번쩍 떠올랐다. 그의 입술에 실뱀같은 싸늘한 미소가 비꼈다.

《요시!(좋아!)》

오까모도는 일본도를 쳐든채 민비에게 한발두발 다가섰다.

모든것을 각오한 민비도 불이 이는 눈으로 오까모도를 쏘아보며 맞받아 걸어나갔다.

오까모도의 앞에 마주선 민비의 입에서 끝없는 증오와 경멸과 혐오에 찬 부르짖음이 나지막하게 울려나왔다.

《그래, 내가 민비다. 어서 나를 죽여라. 섬오랑캐, 이 인간백정놈들아!》

이렇게 살인마들을 질타한 민비는 사랑하는 아들을 불렀다.

《동궁!-》

오까모도가 광기어린 소리로 웨쳤다.

《이년이 암여우다!》

그러자 칼을 쳐든 왜놈살인마들이 일시에 민비에게 왁 달려들었다. 그속에는 다까하시, 우찌다, 오끼하라, 아다찌, 일본군사관, 경찰 등 여러놈들이 있었다.

어깨로부터 가슴에 걸쳐 칼에 찔린 민비가 비명을 지르며 본능적으로 앞으로 뛰쳐나갔다.

뒤따라 달려온 살인마들이 또다시 그에게 칼날의 세례를 안겼다.

《척아!-》

아들의 이름을 마지막으로 부르는 민비의 가냘픈 부르짖음이 옥호루에 메아리쳤다.

사대투항주의로 외세에 의존하여 자신과 자기일가 그리고 자기생활의 터전인 왕실을 유지하려고 모지름 써온 민비였으나 그는 바로 그 외세에 의하여 나라를 렬강들이 란무하는 각축전장으로 만들고 그 외세에 의하여 이처럼 자기 목숨마저 무참히 잃고 불우한 최후를 마치지 않으면 안되였다.

《어마마마!-》

태자 척이 민비의 몸우에 쓰러져 곡성을 터뜨렸다. 태자가 마구 흔들어도 아무 응대가 없는 민비, 빈방에 홀로 누워있는 민비의 시신…

극악한 살인범중의 한놈인 《한성신보》사 편집장 고바야가와는 후날 자기의 극비수기 《민비시해사건의 진상》에 이렇게 썼다.

《그 녀자는 반듯하게 누워 숨졌는데 피가 주위에 흐르고있었다. 잘 살펴본즉 몸집이 작고 여위였으며 피부색은 희여 아무리 보아도 스물대여섯살로밖에 보이지 않는 녀자로서 죽었다기보다는 인형을 넘어뜨린것 같은 모습으로 아름답게 영원히 잠들어있었다. 연약한 손으로 조선8도를 움직이고 호걸무리들을 쥐락펴락하던 민비의 주검이라고는 도저히 생각되지 않을 정도였다. 녀걸의 혼은 떠나서 다시 돌아오지 않는다. 방안에 그의 주검을 지켜주는 사람 하나도 없는 실로 처참한 광경이였다. 》

한편 강녕전앞에 놓여있는 좁고 어두운 가마속에서 불안과 지루감에 시달리던 대원군이 고래고래 소리를 질렀다.

《이놈들아! 문 열어라! 숨답답하다!》

파수를 선 훈련대원이 송구스럽게 여쭈었다.

《대감마님, 참으십시오. 우리에겐 열쇠가 없소이다. 열쇠는 왜인들이 가져갔소이다.》

이때 누군가 뛰여오는 투닥거리는 소리가 나더니 가마안에 대고 격한 어조로 말했다.

《대원위대감!》

《듣는다.》

《방금 민중전께서 왜인들의 칼에 시해(살해)당하셨습니다.》

《뭣이?!》

가마속에서 깜짝 놀란 대원군의 목소리가 울리더니 뒤로는 잠잠해졌다. 이 순간 굴왕신같은 가마속에 갇힌 대원군 리하응의 심경은 어떠했을것인가. 그는 무엇을 생각하고 무엇을 느꼈을것인가.

잠시후 잠잠하던 가마속에서 《흑, 흐윽…》 하는 늙은이의 석쉼한 흐느낌소리가 울려나왔다. 때늦은 대원군의 회한의 울음인지도 모른다.

민비는 수십년세월 그의 정적으로, 앙숙으로 지내던 녀인이였다.

하지만 그는 자기의 며느리요, 더우기 지엄한 왕비였다. 그런 조선녀인을 상관도 없는 바다너머에서 온 왜놈들이 칼탕쳐죽이다니. 이런 날불한당놈들이 또 어디에 있단 말인가?!

뜨거운 눈물이 대원군의 주름진 볼로 흘러내려 허연 수염발속으로 잦아들었다.

일본령사관의 원화종소리가 요란히 울렸다.

초조하고 불안한 심정으로 원화기를 지키고 앉아있던 스기무라가 성급히 수화기를 들었다.

《뭐? 민비를 죽였다고? 죽였단말이지? 죽였어!》

환성을 지르다싶이 송화기에 대고 웨친 스기무라가 미우라를 돌아보며 희열에 넘쳐 소리쳤다.

《각하! 성공입니다! 성공!》

《내가 이제 곧 간다고 말하라.》

스기무라에게 이렇게 지시한 미우라는 두눈을 감고 손을 합장했다.

《나무아미타를 관세음보살.》

미우라가 경복궁에 도착하자 오까모도 등이 그를 기다리고있었다.

《어떻게 하랍니까, 각하? 불태워버립시다.》

민비를 칼탕쳐죽인것만으로는 성차지 않은듯 오까모도가 이렇게 간청했다.

미우라는 누가 들을세라 나직이 입을 놀렸다.

《시체를 재삼 확인했겠지?》

《사진과 대조해보시겠습니까?》

손짓으로 거부한 미우라는 씹어뱉듯이 뇌까렸다.

《태워버리라! 망할년!》

아침해가 구름속으로 자취를 감추어 버렸다. 락엽이 우수수 흩날려 떨어졌다.

민비가 그늘을 즐겨찾던 향원못가의 느티나무가 오늘의 참상을 지켜보듯 가지를 무겁게 드리우고있었다.

록원의 공지에 쌓아놓은 장작더미, 살인악당들이 홑이불에 싼 민비의 시체를 장작더미우에 훌 던졌다. 다까하시며 아다찌가 시체와 장작더미에 줄줄 흐르게 석유를 뿌렸다.

《준비 끝냈습니다.》

보고하는 오까모도에게 미우라가 고개를 끄덕거렸다.

오까모도가 성냥을 긋자 삽시에 불길이 장작더미와 시체를 휩쌌다.

범죄의 흔적을 없애려고 그것을 묵묵히 지켜보는 살인귀들의 뻔뻔스러운 기색은 야수들 한가지였다.

한편 총상을 당한 배허벅을 한손으로 움켜쥔 엄병무는 비청거리며 건청궁으로 걸어가고있었다.

부서진 문짝이며 짓밟힌 병풍, 깨여진 도자기들, 처참하게 죽은 궁녀들의 시체… 비틀거리며 걷던 병무가 불현듯 걸음을 멈추었다. 그의 눈이 경악으로 커졌다.

눈을 감고 누워있는 아정이의 모습이 눈에 밟혔던것이다. 흰적삼에 흥건히 배인 피자욱을 본 병무는 풀썩 주저앉아 두손으로 아정의 얼굴을 쳐들었다. 그의 눈에서 두줄기 눈물이 솟구쳐흘렀다. 병무는 아정의 가슴에 얼굴을 파묻고 울고울었다. 그러던 병무는 문득 고개를 쳐들고 부르짖었다.

《아, 철천의 원쑤 왜놈들아!》

그의 피맺힌 절규, 분노의 웨침이 멀리, 멀리로 울려갔다.

향원못가에서 민비의 시체를 태워버린 일본살인귀들은 재더미속에서 민비의 유골을 찾아 못속에 던지였다.

그 못을 지켜보던 미우라가 의미있는 눈길로 자기 심복들을 둘러보며 뇌까렸다.

《제군들! 이제는 조선이 일본의것으로 될것이요!》

강도 일제는 이처럼 력사에 류례없는 국제적범죄행위를 저지르고도 그것을 기만, 은페하기 위해 갖은 비렬한 모략책동을 다하였다.

사건 다음날인 을미 (1895)년 10월 9일부 살인마 아다찌가 발행한 《한성신보》에는 이런 기사가 실렸다.

《대원군은 어제 밤 돌연히 병사를 인솔하고 왕궁에 들어가 일대 소란을 일으켰는바… 일순의 소전투끝에 왕과 왕태자는 무사하였으나 왕후만은 아직 그 행방을 모른다고 한다.》

후안무치한 일제는 사건 며칠후 일본공사관에 남먼저 뻐젓이 조기를 드리웠으며 그해 11월 5일에는 국왕위문이라는 명목으로 조선침략의 원흉중의 한놈인 이노우에 가오루를 서울에 파견하였다.

일본침략자들에 의한 민비의 학살은 조선인민의 민족적분노를 불러일으켰다.

조선인민의 거족적인 반일투쟁과 국내외의 항의에 바빠맞은 일제는 민비학살에 관여한 흉한 미우라공사이하 47명의 살인악당들에 대한 기만적인 히로시마공판을 벌려놓았으나 미구에 《증거불충분》이란 구실로 전원 무죄석방시킴으로써 인류의 량심을 우롱하는 또 하나의 범죄를 저질렀다.

일제는 이 국제적살인범죄자들을 《애국공신》으로 내세웠으니 조선공사 미우라 고로는 추밀고문관으로, 공사관 서기관 스기무라 후까시는 외무성 통상국장으로, 공사관무관 구스세 사찌히꼬중좌는 륙군상으로 출세시켰다. 또한 《한성신보》사장 아다찌 겐조는 내무상, 체신상 등 정부의 요료직을 차지하게 하였고 《한성신보》편집장 고바야가와 히데오는 규슈 《니찌니찌신문》 사장으로, 서울령사관령사보 호리구찌 구마이찌는 브라질 등 각국의 공사로 화려한 외교관생활을 누리게 하였다. 다만 극악무도한 살인마 오까모도 류노스께는 여전히 일본의 대륙침략을 위해 흑막적인물로 암약하다가 1912년에 상해에서 더럽게 객사하였다.

하지만 이것은 후날의 일이고 을미사변이 발생한 이날 1895년 10월8일 아침의 경복궁은 참으로 비참, 처참의 극치였다. 언제나 굳게 닫겨있고 군사들이 엄엄하게 파수를 서던 조선의 왕궁, 경복궁의 정문인 광화문은 주인없는 집처럼 활 열려있었다. 이 문으로 간밤의 참변에 대한 소문을 들은 도고 최일이가 수심에 싸인 사람들과 함께 들어갔다.

그와 몇걸음 떨어진 뒤에서 동소임 권벽이가 경악과 분노로 커다래진 눈을 두릿거리며 부지런히 발길을 옮기고있었다.

총탄에 뚫리거나 칼날에 찍힌 붉은 두리기둥, 총탄에 부서진 기와막새며 석탑들, 꺾이고 짓이겨진 꽃나무들 그리고 피를 흘리고 쓰러진 궁성시위대병정들(왜놈들이 죽은 저희들의 시체는 이미 다 거두어갔던것이다.), 숙직을 서던 조선관리들의 시체들… 참경은 궁성의 초입에서부터 펼쳐져있었다. 권벽과 최일의 발길은 국왕 고종과 왕후 민비의 처소인 건청궁 옥호루쪽으로 향해졌다.

《아니, 병무 아닌가?》

그때까지 숨진 아정이를 품에 안고 얼없이 앉아있던 병무는 천천히 고개를 쳐들었다.

머리에 쓴 갓이 찌글서하게 기울고 중치막의 실띠도 제대로 매지 못한 도고 최일이가 둥그래진 눈으로 병무를 굽어보고있었다.

《이게 누군가?!》

최일의 눈길은 병무가 품에 안고있는 녀인에게 돌려졌다.

고요히 눈을 감은 희디흰 얼굴, 칼날에 어깨가 쩍 버그러지고 흰옷을 랑자하게 물들인 붉은 피…

《아니, 이게 아정이가 아닌가?!》

최일은 풀썩 주저앉더니아정의 두어깨를 쥐고 흔들었다.

《아정아! 이게 웬일이냐?!》

얼없는 사람처럼 앉아있던 병무가 머리를 쳐들고 하늘중천에 눈길을 박았다.

최일은 울음을 터뜨리며 넉두리같이 토설했다.

《아정아, 네가 어쩌다 이 모양이 되였느냐? 내 딸처럼 잘 키워 이 엄도령과 혼례도 치러주자고, 그래서 고운 네 얼굴처럼 네 한생도 아름답게 보내게 하자고 작정했건만 네가 죄없이 저 인백정 왜놈들에게 이렇게 될줄이야 어찌 알았겠느냐! 이제 너의 부모들에게 무어라고 말하란 말이냐!》

최일은 고개를 떨구고 그냥 꺼이꺼이 울기만 했다.

마음을 다잡은 병무가 최일을 진정시켰다.

《도고님, 이젠 그만두십시오. 그런다고 죽은이가 살아나겠습니까? 저는 아정이의 원쑤를 갚기 위해, 민족의 원한을 씻기 위해 태봉이와 함께 의병을 일으키겠습니다.》

《꼭 그렇게 하게.》

최일이 이렇게 대척하자 권벽은 묵새길수 없는 자기의 심정을 터치듯 울분을 토하였다. 그 어조는 한탄과 영탄이 아닌 피의 절규마냥 서리발 차고 용암처럼 뜨겁고 절절하였다.

《저 불악귀같은 왜놈들이 우리 조선사람들에게 무슨짓을 하였느냐?!

우리도 자주독립국으로서 부국강병하여 잘살아보겠다고 일떠선 우리 민족의 모든 투쟁을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무자비하게 다 진압말살해버리지 않았는가! 임오군란도 갑신정변도 농민전쟁도 갑오개혁도… 그런데 오늘은 일국의 국모인 왕비까지 처참하게 죽였으니 세상에 이런 불법무도한 살인귀들이 또 어디에 있단 말인가!

원통하구나! 국력이 약하고 군력이 약하니 민족의 존엄도, 나라의 주권도 지켜내지 못하는구나. 아, 이 사무치는 원한을 언제 씻는단말인가! 장천이여 말하여다오!》

력사는 과거가 아니다. 력사는 오늘이며 래일이다.

《정한론》의 유령들은 오늘도 살아움직이고있다.

세월과 세기는 바뀌였어도 우리 민족의 백년숙적인 일제의 죄악의 시효는 끝나지 않았다.

놈들이 이제 다시한번 우리 조국의 산천초목, 풀대 한대라도 건드린다면 우리 인민은 대를 두고 쌓이고쌓인 민족의 분노를 터쳐 일제의 만고대죄를 기어이 결산할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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