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29 회)

제 2 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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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남도인민위원회에서는 도앞에 제기된 명년도 알곡생산목표를 놓고 각 군들에서 얼마씩 증수해야 한다는 예비수자를 타산해보는 한편 군들에서 예비와 가능성을 찾아내여 얼마큼씩 증수할수 있겠는지 토의하고 그 결과를 올려보내도록 하였다. 이렇게 한것은 10월의 협의회때 김일성동지께서 하신 가르치심에 따른것이였다. 그이께서는 회의에서 다음해 알곡생산계획을 기계적으로 협동조합들에 내려먹이지 말고 조합원들속에서 정치사업을 힘있게 벌려 그들이 알곡증산에 적극 떨쳐나서도록 하여야 한다고 교시하시였다. 그런데 군들에서 올라온 예비수자들을 종합해보니 100만톤이 되지 못했다. 도에서 군들의 알곡생산예비계획을 타산해본것보다 군에서 올라온 수자가 적었다. 문덕군만은 도의 예상과 맞았다. 이전 문덕군인민위원장였던 지금 도인민위원장이 직접 내려가 논벼를 정당 평균 6톤 내는것으로 계획을 세웠던것이다.

피창린은 도인민위원장, 부위원장, 국장들과 함께 모여앉아 심중하게 토론했다.

농산국장이 말했다.

군들에서도 토론이 많았을것이다. 현실적으로 애로가 있다.

우선 논면적이 딸린다. 뜨락또르와 자동차가 속히 더 들어와야 한다. 연유와 부속품이 제대로 보장되지 않는다. 로력이 부족하다. 비료가 계획대로 들어오지 않는다, 등등.

《제일 문제로 되는것은 비료입니다.》

마지막으로 그가 강조했다.

《비료는 곧 쌀이지요.》

듣고있던 피창린이 그 말을 받았다.

《쌀은 곧 사회주의고!》

몇사람이 웃었다. 피창린이 퍼렇게 성이 났다.

《여보, 농산국장동무, 그런데 문덕군에서는 정보당 평균 6톤을 내겠다고 했소. 그래 도인민위원장이 내려가서 관료주의적으로 〈동무들이 수상님을 모시고 진행한 협의회에서 결의했으니 무조건 그렇게 계획을 세우시오.〉 이렇게 내리먹였다고 생각하지는 않소? 아니요,

예비와 가능성을 집체적토의를 거쳐 찾아냈단말이요.

국장동무가 곤난하다고 한 그 애로를 푸는것이 바로 예비와 가능성이란 말이요. 래년에는 뜨락또르를 비롯한 농기계들이 더 많이 나오는데 그 가동률을 높이는것이 우리가 할 일이요. 토지가 딸리기때문에 새땅을 얻어내여 논면적을 늘이는것도 우리가 할 일이요. 이렇게 하는것이 예비를 찾는것인데 동무는 비료타령만 하고있소.

우리 도는 수상동지의 배려와 관심속에서 늘 비료를 다른 도보다 많이 받아썼소. 지금 비료가 계획대로 나오지 못하고있소.

그래도 농업성에서는 우리 도에 비료를 많이 주고있소. 그런데 전국적인 사정으로 하여 계획했던대로 다 받아올 형편이 못되오.

그래 비료공급계획이 현재 긴장해졌소. 위원장동무가 성에 가서 제기했지만 통하지 않았소.

그렇다고 수상동지께서 도에 주신 알곡 100만톤생산전투목표를 조절할수 있겠는가?!…

농산국장동무는 머리통에 병이 들었소. 도인민위원회 일군들부터 사상적준비가 이 모양이니 군들에서 올라온 계획예비수자들이 그 꼴이란 말이요.》

모임에서는 다음과 같이 결정했다.

군당위원장들과 군인민위원장들을 전부 숙천에 불러다 회의를 열고 거기서 먼저 그들이 정신이 번쩍 들게 하고 이어 도당위원회와 인민위원회 일군들이 전부 군들을 하나씩 맡아가지고 내려가기로 했다.

성미가 급하고 행동적인 피창린은 도인민위원회 부위원장을 데리고 이튿날 아침 서둘러 숙천을 향해 차를 달리였다.

승용차가 열두삼천리벌의 한복판에 있는 숙천군에 들어서자 그는 깊은 감회에 잠기였다. 이 지방의 벌과 산, 마을들 모든것이 그를 반겨마주오는듯싶었다.

피창린은 자기를 숙천사람이라고 말하기를 좋아했다. 그것은 그가 전쟁시기 숙천군당 부위원장을 한적이 있으며 전후에도 군당위원장으로 한동안 일하면서 고생을 많이 했기때문이였다. 그때 그는 사업성과도 많이 냈으며 그것으로 하여 이 고장과 친숙해졌다.

그가 도당위원장이 되여 숙천을 떠날 때 군사람들이 몹시 섭섭해하였다.

그는 성천군에 있는 류동리라는 마을에서 태여나 자랐다. 어린시절에 대한 추억은 쓸쓸하고 눈물겨운것이였다.

대동강류역에 있는 이 고장사람들은 땔나무를 평양에 가져다 팔기도 하고 쪽배로 소금을 나르기도 했다.

강류역이여서 그런지 땅이 기름져 농사가 잘되였다. 하지만 류가성을 가진 지주가 얼마나 작인들을 혹독하게 착취했는지 피창린의 머리속에는 어린시절에 늘 배고파했던 기억이 깊이 박혀있었다. 이 류동리는 피가, 옥가, 명가 등 희성을 가진 사람들의 은거지이기도 했다. 희귀한 8성이 모여살았는데 그들의 생활은 비참했다.

피창린의 아버지 5형제가 다 가난뱅이인데다가 성이 피가라고 누구도 딸을 주려하지 않았다. 그래서 5형제는 다 처녀장가를 들지 못했다.

가난하게 살았지만 마치 그것에 도전이라도 하려는듯 피씨네 집안은 모두 배짱이 세고 싸움을 잘했다. 배사공이던 할아버지는 왜놈신사가 배를 타고 거들먹거리는 꼴이 보기 싫어서 그자를 강에 처넣었었다. 아버지는 나무하러 산에 갔다가 벌금을 내라고 하는 산림간수를 때려눕히고 더 깊은 산골로 피신해들어가 거기서 농사를 지었다. 그의 아들 피창린은 지주놈의 손자가 《너 피가라는게 사람의 피라는 뜻이냐, 밭에서 자라는 피라는 뜻이냐?》 하고 놀려대자 그놈을 이마로 받아 넘어뜨렸다. 이 사건으로 할머니가 주재소에 불리워가서 매를 맞고 수모를 당했다. 소학교시절 이마받기명수인 피창린을 당해내는 아이가 없었다.

마을에서는 피씨네가 3대를 내려오며 싸움군이라고 하면서 그집과는 엇서지 않으려고 했다. 소학교를 마친 피창린은 징병이요, 징용이요, 《보국대》요 하는것들을 피해서 산속을 돌아다니다가 해방을 맞이했다.

선각자의 지도밑에 그는 리에서 청년단을 조직하고 그 단장이 되였다. 청년들은 면소를 소각하고 면서기를 내쫓았다. 그때 북을 치고 연설을 하며 굉장하게 활동했다.

군에 올라가 공산당에 들었으며 평남도공산당위원회에 가서 강습을 받고 면당위원장이 되여 내려왔다. 조국해방전쟁시기에는 숙천군당 부위원장을 했고 평남관개공사가 한창이던 때에 숙천군당위원장이 되여 농민들을 공사장에 동원하느라 뛰여다녔다. 그자신이 등짐을 지고 흙을 나르기도 했다.

이렇게 그는 숙천과 인연이 깊어졌다.

농촌경리를 협동화하던 나날에 제일 고생을 많이 하였다.

피창린은 우의 지시를 창발적으로 받아들이고 집행하였다.

우선 전쟁시기부터 해오던 소겨리, 품앗이반을 그대로 유지하면서 협동조합이라고 이름만 바꾸었고 다른 한편으로는 새 협동조합을 경험적으로 3개 조직하였다. 이것이 문제로 되였다.

좁다란 얼굴에 검버섯이 낀, 쏘련에서 나왔다는 중앙당 부부장 송아무개가 군에 내려와서 몇개 리를 돌아보고 군당에 와서 피창린을 불렀다. 그는 키가 작은 피창린을 우습게 여기고 내려다보며 꽥꽥 소리쳤다.

《왜 당에서 하란대로 하지 않는가, 왜 집단화를 크게 벌리는가, 기계화가 될 때까지 천천히 하란 말이야.

공명주의자! 프로수를 올려 칭찬을 받자는거지?》

피창린이도 배짱이 간단치 않은 사람이라 눈섭 한오리 까딱하지 않았다.

(이 얼마우재가 꽤 떠드는데?) 하고 코웃음을 치며 《가을에 가서 누가 옳은가 봅시다. 지금부터 가타부타할게 있소?》 하고 맞섰다.

송가는 이런 배짱군과 더 상대해야 망신만 할것 같았던지 《그래그래! 가을에 가서 보자.》라고 내뱉고는 돌아섰다.

그리고 종로에서 뺨맞고 행랑뒤골목에서 눈 흘기는 식으로 도당에 올라가 우주베끼스딴에서 자기와 함께 조국에 나온 부위원장에게 화풀이를 해댔다.

《그놈새끼, 젊은놈이 건방지게 가을에 가서 보자구? 가을까지 가기 전에 철직되지나 말라지.》

그자가 어떻게나 벼르었던지 평남도안에서는 피창린이 공명주의한다더라, 철직시킨다더라, 재판에 회부된다더라 하는 소문이 돌았고 피창린을 찾아와 주의하라고 충고하는 사람도 있었다.

어쨌든 일이 시끄럽게 됐다고 생각하고있는데 이번에는 안경을 낀 농업성 부상이라는 사람이 내려왔다.

《협동조합을 리단위로 조직하시오.》

그가 이렇게 말했다.

(이건 또 뭐야?)

억이 막힌 군당위원장 피창린이 긴말을 하지 않았다.

《당장 리단위로 조직하는건 정책과 맞지 않소.》

종파분자들은 숙천군에서 협동화의 속도가 빠르다, 어떻다 하며 억눌렀고 지어 조선로동당 제3차대회에도 참가시키지 않으려 했다.

수령님께서 대회참가자들의 명단을 보시다가 피창린의 이름이 없는것을 아시고 그를 대회에 불러주시였으며 대표들의 숙소를 방문하실 때 그를 만나 경험토론을 하라고 고무해주시였다.

숙천군에서 그는 군당위원장을 5년동안 했다. 이 기간에 잊을수 없는 사연들이 헤아릴수 없이 많았다.

하지만 그중에서도 수령님을 숙천땅에 모셨던 못잊을 나날들은 지금도 그의 가슴에 깊이 새겨져있다.

《숙천읍을 문화농촌도시로 건설하여봅시다. 숙천은 농사도 잘하고 농업발전에서 전망성이 있습니다.》

김일성동지께서 1957년 1월, 숙천군농업협동조합열성자회의를 지도하시기 위해 읍에 도착하시여 피창린에게 하신 말씀이였다.

이 회의에서 수령님께서는 전국적으로 먼저 협동화를 끝낸 숙천군을 높이 평가하시였다. 이는 군당위원장에 대한 평가이기도 하였다.

1958년에 김일성동지께서 피창린에게 평남도당위원장의 중책을 맡겨주시였다. 그때 피창린의 나이는 37살이였다. 평안남도는 다른 도와 달리 평양시를 끼고있으며 당중앙위원회와 가까이 있어 이 도의 당위원장인 피창린은 사흘이 멀다하게 수령님의 부름을 받고 가르치심을 받았으며 수령님께서 현지지도를 나가실 때면 동행하군 하였다.

피창린은 자기가 어떤 신임을 받고있는지 생각할수록 심장이 높뛰는것이였다.

그는 오래간만에 고향에서 농사를 짓고있는 아버지를 보려갔다. 아버지는 집안에서 도당위원장이 나왔다며 기뻐서 어쩔줄 몰라했다.

피창린은 허리가 휘도록 농사를 지어오고있는 아버지에게 기쁨을 더해주려고 승용차를 타고 마을을 한바퀴 돌아보시라고 권고했다. 고정한 아버지는 아들을 이윽히 쳐다보더니 머리를 가로저었다.

《이 차는 네가 일을 잘하라고 수상님께서 주신 차다.》 하고 아버지는 아들의 성의를 물리쳤다.

혈기가 왕성한 젊은 나이에 도당위원장이 된 피창린은 사업의욕이 넘쳐났고 한편 들뜨기도 했다. 수령님께서 그를 만나실적마다 잘못한 일에 대해 깨우침을 주시고 늘 데리고다니셨기에 그는 도당위원장사업을 큰 편향없이 할수 있었고 당적 및 인간적수양도 쌓을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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