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69 회)
제 3 장
36
(1)
8. 15명절날 오전에 학교기숙사정문앞에 승용차 한대가 와서 멈추어섰다. 농업상이 보낸 빈 승용차였다.
운전사 종팔이가 접수원에게 녀학생 박미순이를 찾아달라고 하였다.
졸업시험도 다 치고 배치를 기다리며 시간이 많아 시내에 있는 이모네 집에 놀려가려고 준비하고있던 미순이는 접수로 나왔다.
어디선가 본것 같은 젊은이가 다가왔다.
《안녕하십니까?》
눈꼬리가 처진 울상인 그가 점잖게 인사를 했다. 미순이는 머뭇거리며 답례했다.
《안녕하세요.》
《저를 모르시겠습니까?》
《글쎄 낯이 익은데…》
《농업상동지의 전용승용차운전사 유종팔이라고 합니다. 언젠가 상동지가 보낸 물건들을 싣고왔댔지요. 그때 소개도 했었고…》
미순이는 반가와하면서도 왜 또 왔을가 하는 의문이 실린 눈으로 승용차운전사를 보았다.
《기억납니다.》
《그런데 말이요, 나는 오늘이 명절날인데도 휴식을 못하고 차를 몰아야 하는 신셉니다.
모르는 사람들은 간부들의 차를 모는 운전사는 팔자가 늘어졌다고 하지만 천만의 말씀, 간부들이 휴식일에나 명절날에 쉬는줄 압니까?
그러니까 그들에게 붙어다니는 운전사도 쉬지 못하지요.》
미순이는 우정 가긍한척 하면서 불쌍한 흉내를 내는 운전사의 장광설이 재미나서 제지시킬 생각이 없었다.
운전사의 말은 과장되기도 하고 자기식으로 윤색되기도 했지만 그의 《연설》을 쥐여짜놓고보면 미순이를 차에 태워가지고 집으로 데려오라는것이였다.
《외출복을 입고 속히 행차해주기를 바랍니다.》
유종팔이가 승용차를 가리켰다.
《번쩍거리는 차가 아까부터 기다리고있습니다.》
미순이는 결심이 내려졌다.
《저는 갈수 없습니다.》
《그래요?》
종팔이의 눈섭이 치솟았다.
《오늘은 명절날이여서 친척집에 가려고 계획했으니까요.
그리고 저같은 녀학생이 어떻게 큰 간부의 집에 갈수 있겠어요? 우선 부끄럽고 그리고 격에 어울리지도 않지요.》
《그렇다?》
종팔이는 락심하는것 같았다.
《저를 불러주는건 고맙지만 갈수 없었다고 전해주세요.》
《그렇다면 하나 물어봅시다. 저… 미순동무,
내가 알건대 미순동무는 상동지의 추천에 의해서 전문학교에 왔고 상동지가 친아버지처럼 돌봐주는것 같은데 〈딸〉과 함께 명절을 쇠자고 하는 성의를 물리치면 그것이 옳은 도리일가요?》
종팔이는 과연 솜씨있게 정통을 찔렀다. 미순이는 대답할 말을 찾지 못했다.
《〈딸〉이 얼마나 보고싶었으면 이 종팔이가 데려오지 못하면 당장 해임시키겠다고까지 엄하게 말했겠습니까?》
미순이는 가쁜숨만 쉴뿐이였다.
《물론 명절날이니 친척집에 가는것도 의의가 있고 더 자유롭고 더 즐거울것입니다. 그러나 때로 그러한 유혹을 물리치고 의무에 복종해야 하는 경우도 있는것입니다.
비록 옹색하고 차렷해야 하는 엄엄한 장소에 간다고 해도 말입니다.》
(이 사람은 변호사처럼 말을 잘하는구나. 정말 어쩔수 없게 론리적으로 납득시키고있어!
어쨌든 이 사람 말이 옳아.)
미순이가 이렇게 생각하고있는데 종팔이는 녀학생이 아직 마음이 돌아서지 않았는가 하여 공격을 계속했다.
《그럼 기숙사호실에 들어가 동무들에게 물어봅시다. 내 말이 옳은가그른가 판단을 내려달라고 합시다.》
그는 상이라고 하는 《큰 산》을 등지고있었음으로 이길
《아니, 됐어요. 그럴 필요가 없어요. 좀 기다리세요.
내 가서 동무들에게 량해를 구하고 외출복을 입고 나오겠습니다.》
종팔이는 외국영화에 나오는 신사처럼 정중하게 머리숙여 감사를 표시했다.
미순이는 난생처음 승용차를 타고 시내를 달려 농업상의 집에 갔다. 전실에서 실내복을 입은 나이든 녀인이 미순이를 반갑게 맞이하여 의자에 앉도록 했다.
미순이는 녀인이 농업상의 부인임을 알수 있었다.
부인은 얼음보숭이가 담긴 접시를 다반에 놓아가지고 들어와 미순이가 앉은 의자곁의 탁자우에 올려놓았다. 그리고는 탁자옆의 다른 의자에 앉으며 접시에서 차숟가락을 들어 미순의 손에 쥐여주며 같이 먹자고 했다.
《나는 이 얼음보숭이를 좋아해. 더운 여름에는 이것 이상 없어.
자, 처녀도 어서 들어요.》
《고맙습니다.》
미순이는 얼음보숭이를 작은 숟가락으로 조금 떠서 입에 넣었다. 청량음료점에서 먹던것과 맛이 같았다.
아마 청량음료점에서 사온듯싶었다.
《집이 순안 농촌마을에 있다지?》
부인이 물었다.
《네.》
《부모님들은
《아닙니다. 쉰살이 넘었습니다.》
《자식은 처녀말고 또 누가 있나?》
《저 혼잡니다.》 미순은 미소를 지었다.
부인이 미소짓는 처녀를 황홀하게 바라보았다. 처녀는 아름답게 핀 한송이 꽃같았던것이다.
《그러니 외동딸이로군. 부모들의 사랑을 독차지하며 성장했겠지.》
《아버지는 그랬지만 어머니는 귀애하면서도 욕을 할적에는 무섭게 했습니다.》
《평안도에서는 어머니를 오마니하고 부르지. 그런데서 아마 자식을 하나 키우는데 오만자루의 품이 든다는 말이 나왔겠지.》
이런 이야기들을 하며 얼음보숭이를 먹는중에 미순이는 객실을 살펴보았다.
제일 눈길을 끄는것은 피아노였다. 운전사 종팔이가 피아노를 치며 즐기도록 해야 하겠다는 상의 말을 자기식으로 인용한것이 아주 엉터리는 아니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