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78 회)
제 3 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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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가을걷이가 시작되자 뜨락또르운전수들은 벼단들을 탈곡장으로 날라들이는 작업에 분주했다. 3작업반 탈곡장에서 최동익과 기계화반의 기술자들이 창안제작한 뜨락또르의 발동기를 리용한 벼탈곡기가 씽씽 돌아가고있었다. 전동기를 쓰지 않는 탈곡기이다.
리규성이와 리당
가을걷이가 끝나자 텅 빈 논밭에서 곧 가을갈이가 시작되였다. 이에 앞서 동익이네들은 포전정리와 새땅개간을 계획한대로 진행하였다.
… 가을걷이를 앞두고 운전수들과 기계화반기술자들이 합심하여 벼탈곡기를 창안제작하던 때의 일이다.
이 나날에 《고문아바이》 김덕준이도 운전수들과 함께 분주하게 지냈다. 때로는 밤늦게까지 손과 팔굽은 말할것 없고 이마에까지 시꺼먼 기계기름을 묻히며 기술자들옆에서 돌아쳤다.
《아바이, 그만 들어가십시오. 집에서 할마니가 기다립니다.》
운전수들이 이렇게 권고하면 《왜 내가 짐이 되는가. 내가 옆에 지켜서있는게 시끄럽나?》하고 골을 냈다.
운전수들이 아니라고 하며 용서를 빌었다.
《아버지!》
혜영이가 큰 눈을 빨며 말했다.
《노여워할게 뭐 있어요. 운전수들의 마음이 얼마나 고마와요.》
《됐다. 가재는 게편이고 초록은 동색이라더니 뜨락또르운전수가 됐다고 이 사람들의 편에 섰구나. 너 너무 우쭐대지 말아.》
《하ㅡ하ㅡ하ㅡ》
모두들 유쾌하게 웃었다.
《얘 혜영아, 너같은 햇내기가 여기서 할일이 없으니 어서 집에 갔다오너라. 네 어머니가 기다릴게다.》
김덕준아바이가 딸에게 지시했다.
무슨 뜻인지 알고있는 혜영이는 두말없이 집으로 갔다가 떡함지를 이고 나타났다.
《야!》 운전수들과 기술자들이 환성을 올리였다.
다들 떠드는데 동익이만은 입을 다물고있었으며 그저 떡을 먹기만 했다.
요새 와서 그는 혜영이의 눈길을 피하고있었다. 혜영이가 이 작업분조에 배속되여온 후부터 동익은 웬일인지 이렇게 처녀와 눈길이 마주치는것을 두려워하고있었다. 작업지시를 줄적에도 땅바닥을 내려다보며 무뚝뚝하게 말하군 했다.
혜영이 역시 동익을 피하고있었다. 뜨거운것이 속에 차있기때문인지, 그것의 분출을 두려워해서인지 알수 없었다. 그것은 폭풍전야의 정적과도 같다 할가.
어느날 동익의 형인 동철이가 동생을 찾아 암적에 나타났다. 형의 출현으로 동익은 생활의 중요한 계기를 맞게 되였다.
동익은 형님이 또 장가들라는 소리를 하려고 온것이라고 짐작했다. 형 동철은 동생과 키가 비슷했으나 더 다부지고 등이 구붓했다. 평생 농사일을 해오는 그는 말이 없고 푸수했지만 때로는 눈을 사납게 흘리며 성을 내기도 했다. 동익은 형을 존경하였고 두려워했다.
형님은 봄가을내의와 산꿀 몇병을 내놓으며 어머니가 보내는것이라고 했다. 그러면서 필요되는것이 있으면 말하라고 했다.
동익은 뜨거운것이 치밀어 올랐다.
《필요되는것이 없어요. 조합에서 우리를 잘 돌봐주고있으니까요.》
《어디 앓지는 않았니?》
《앓지 않았어요. 아버지 허리병은 좀 어때요?
왜정때 가대기를 끄느라 고생하시며 얻은 병인데 이 둘째놈은 아버지 아픈 허리에 솔잎찜질 한번 해드리지 못하는구만요.》
동익은 눈굽이 확 뜨거워났다.
《내가 있지 않니. 큰 손자도 있고. 너는 네일이나 걱정해라.》
《난 걱정이 없어요.》
《너는 걱정이 없겠는지 모르겠지만 집에서는 너를 걱정하고있다.》
형님이 형답게 그리고 묵직하게 말했다.
《너는 왜 장가를 들려하지 않니? 부모님들은 너를 장가들이고야 마음 편하게 세상을 하직하겠다는거다.
방금 네가 아버지의 허리병을 말했는데 동익아, 아버지는 올해를 넘길것 같지 못하다.》
동익은 소스라쳐 놀랐다.
《아니, 형님! 그건 무슨 소리입니까?》
《그렇게 됐다. 그래서 내가 만사를 제쳐놓고 너를 찾아온거다.》
《아, 아버지…》
동익은 눈물을 쏟았다.
《아버지의 한을 풀어드려야지. 올가을에 무조건 잔치를 하자.
색시감을 정했다.》
형님은 웃옷안주머니에서 사진 한장을 꺼냈다.
《보아라, 마음에 드는지 어쩌는지…》
동익은 사진을 받아들었으나 별로 눈여겨보지도 않고 방구들에 내려놓았다.
《왜? 마음에 없니?》
《형님, 이 사진은 건사하십시오. 그리고 지금 김덕준아바이네 집에 갑시다.》 동익은 드디여 결심을 내렸다. 그리고 즉시 걸어놓은 상의를 벗기였다.
《거긴 왜?》
《그 집에 맞춤한 딸이 있습니다.》
형님의 얼굴이 환해졌다.
《그러니까 네가 벌써 색시감을 구해놨구나.》
《아닙니다. 아직 처녀에게도 그의 부모님들에게도 그런 말을 비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훌쩍 가서 어쩐다는거야.》
《우린 서로 말없는 약속을 한것이나 같습니다. 가서 당장 락착을 지읍시다.》
《그래, 가자! 소뿔은 단김에 빼라구 했지.》
《그럼요.》
《내 생각엔 너를 싫다고 할 처녀는 이 고장에 있을것 같지 않다.》
합숙을 나와 어둑어둑해오는 마을길을 걸어가며 형님이 사기가 나서 하는 말이다.
김덕준아바이네 집에 가서 긴말을 할 필요가 없었다.
덕준아바이는 동철이가 청혼의 말을 꺼내기 바쁘게 입이 귀밑까지 벌어지며 《그래! 이제는 때가 되였지요. 무르익었소. 더 기다릴수 없소.》하며 당장 잔치를 하자고 했다.
《그런데요, 아무리 내가 동익의 형으로서 집일을 주관하는 위치에 있다 해도 부모님들이 계시는데 먼저 선을 보이고 승인을 받아야 하지 않을가요? 내가 좋다면 좋은것이고 부모님들도 다른것이 없을것입니다. 그러나 우리 형제끼리 대사를 정하고 이리이리하리다 하면 늙은이들이 서운해할수 있습니다.》
동철의 우려에 김덕준은 전적인 동감을 나타냈다.
《참 동익의 형님은 효성이 지극한 분이요. 그래야 하구말구요. 참 좋은 형님을 두었소, 동익이!》
동철은 다음날로 돌아가고 김덕준아바이네는 잔치준비에 착수했다.
김덕준은 동익과 딸을 데리고 동익이네 고향에 다녀오려고 떠났다.
셋이 기차를 타고갔다. 혜영이는 가슴이 부풀어올라 좀처럼 진정할수 없었지만 꾹 참고 제법 얌전하게 처신했다.
손님들을 잠간 기다리게 하고 집안으로 먼저 들어간 동익은 아래목에 이불을 깔고 누워있는 아버지한테로 무릎걸음으로 다가가며 눈물을 줄줄 쏟았다. 그는 흐느끼며 용서를 빌었다.
《아버지, 이 불효막심한 자식을 용서하십시오.》
힘이 장사같고 둥실한 얼굴에 구레나릇이 거세게 뻗치고있던 아버지는 피골이 상접하여 알아보기 힘들 정도였다.
《동익이 왔느냐.》
아버지는 가죽만 남은 앙상한 손을 내밀었다. 동익은 그 손을 잡아 뺨에 가져다댔다. 얼음처럼 차거웠다.
《색시를 얻었다지?》
아버지가 헐떡이며 묻는데 눈에 기쁨의 불꽃이 일었다.
《예, 아버지의 승인을 받자고 데리고 왔습니다.》
《나는 네 형의 말을 듣고 이미 승인했다. 그러니 이 흉한 꼴을 보여주지 말고 돌려보내라. 잔치는 언제 하느냐?》
《아버지, 어머니가 승인하면 토론해서 년중에 하려고 합니다.》
《좋도록 해라. 됐다. 물러가거라.
같이 온 사람들을 다른 집에 모시고 대접을 소홀히 하지 말아라.》
아버지는 피로를 이기지 못해 눈을 감고 이내 잠에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