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88 회)

제 4 장

45

 

농촌에 대한 국가적방조와 지원에서 무엇보다도 첫자리를 차지하는것은 농촌경리를 기계화, 공업화하기 위한 농기계들, 우선 뜨락또르를 많이 생산하며 전야에 진출시키는것이다.

김일성동지께서 1963년 2월초 어느날 기양뜨락또르공장을 찾으시였다.

공장앞에서 공장의 일군들이 수령님을 맞이하였는데 그중에는 첫 뜨락또르 《천리마》1호를 만들 때 기사장을 했던 일군도 속해있었다. 몸매가 날씬하고 잘 생긴 그를 수령님께서 첫눈에 알아보시였다. 그는 수령님께서 쏘련에 류학까지 보내시여 체계적으로 키우신 기계제작분야의 유능한 기사였다.

《잘있었소?》

《예, 수상님, 안녕하십니까? 오늘 날이 몹시 춥습니다. 안으로 들어가십시다.》

《사무실에야 천천히 들어가고 우선 조립직장부터 봅시다.》

김일성동지께서는 조립이 끝난 뜨락또르들이 마당에 서있는 직장건물을 가리키시였다. 《천리마》호가 조립되는 작업모습을 보고싶으시였던것이다.

조립직장으로 가시며 그이께서는 기사장에게 75hp짜리 뜨락또르직장건설준비정형에 대하여 알아보시였다.

기사장의 설명을 들으시며 그 준비가 매우 굼뜨게 진행되고있다는것을 간파하시였다.

수령님께서는 공장의 일군들에게 75hp짜리 뜨락또르생산이 가지는 중요성을 강조하시였다.

《동무들은 75hp짜리 뜨락또르생산이 가지는 중요성을 옳게 인식하고 사상적으로 동원되여야 하오.

75hp짜리 뜨락또르를 만들어 농촌에 보내주면 보습을 여러개 달고 논밭을 갈수 있으므로 논밭갈이를 제철에 빨리 끝낼수 있으며 불도젤날을 달고 토지정리를 하는데도 유용하게 쓸수 있소. 그뿐이요? 도로건설, 관개공사에도 쓰고 인민군대에서도 필요하오. …

올해안으로 직장건설을 끝내고 한 100대만 생산해도 좋겠는데?》

지배인이 대답을 드리였다.

수상님의 교시대로 집행하겠습니다.》

《첫 〈천리마〉호뜨락또르를 만들 때의 그 정신, 그 기백으로 하면 되오.》

조립직장에 들어서시여 김일성동지께서는 천정기중기에 물려 둥둥 떠가는 뜨락또르본체를 흥미있게 바라보시였다.

현장에서는 로동자들이 조립대앞에서 나사틀개로 조이기도 하고 선반으로 무엇을 깎기도 했으며 한쪽 구석에서는 붕붕거리는 용접소리와 함께 파란 화광이 번쩍이고있었다. 기계돌아가는 소리, 쇠붙이들이 부딪치는 소리, 기중기를 지휘하는 귀청따가운 호각소리, 누구를 찾는 고함소리 등 각종 소음과 함께 기계기름내와 쇠타는 냄새가 직장안에 자욱하였다.

일군들과의 협의회에서는 75hp짜리 뜨락또르와 《천리마》호 생산문제가 폭넓게 토의되였다.

김일성동지께서 뜨락또르생산의 절박성에 대해 말씀하시였다.

《지금 농사에서 기계화되지 못한것이 많기때문에 농민들이 봄내가으내 제대로 쉬지 못하고 힘들게 일하고있으며 문화생활을 제대로 못하고있소. 그러니 청년들이 농촌에 가려 하지 않소. 제 고향인데도 말이요. 이 현상을 두고 우리가 무작정 그 청년들만 탓할수 있소?

우리가 농촌을 도시처럼 꾸려주고 공업로동처럼 농사일에도 시간로동제를 실시한다면 그들이 왜 농촌을 뜨려고 하겠소. 공업로동에서는 아무개가 어떤 제품을 얼마만한 시간에 어느 수준에서 몇개나 생산했는가 하는것으로 그 질과 량이 정확히 평가되지만 농업로동에서는 현재 그것이 불가능하오. 그렇기때문에 농촌경리를 선진적인 기업관리에 부단히 접근시켜 그 차이를 줄여야 하오.

도시와 농촌간의 차이는 로동에서만 나타나는것이 아니요. 농촌사람들이 뻐스를 타고 읍에도, 친척집에도 다닐수 있게 농촌뻐스가 다니고 집집마다 수도에서 음료수가 콸콸 쏟아져 농촌녀인들이 물동이를 낡은 시대의 유물로 치부하게 되면 그것이 바로 문화농촌이라고 할수 있소. 도시에서 새 영화가 방영될 때 농촌에서도 그 영화를 보게 되면 그때는 누구도 정든 향촌, 나서자란 농촌을 뜨려고 하지 않을것이요.

지금 로동자들의 월평균생활비는 48원정도 됩니다. 그런데 내가 어느 협동농장에 가서 한 농가에 들려 알아보니 그들은 월평균 37원정도였소.

농민들을 잘 살게 하자면 적어도 세대당 알곡 3t과 현금 천원이상 차례지게 해야 하오.

농민들의 생활을 향상시키기 위하여 국가에서는 현물세제를 페지하고 알곡수매값도 높여주려 합니다.》

제기된 안건토의가 끝났으나 참가자들은 앉은 자리에서 움직이지 못하고 우리 나라 농촌문제에 대하여 마음쓰시며 심혈을 기울이시는 수령님의 절절한 말씀을 다시금 새겨보았다.

김일성동지께서 그들을 향해 말씀하시였다.

《혹 동무들속에는 내가 농사군의 집안에서 태여났기때문에 농민들의 어려운 사정을 더 잘 알고 그 사정을 더 잘 들어준다고 생각하는 동무들도 있을수 있습니다.

물론 나의 할아버지는 평생 손에서 호미를 놓지 않은 농사군이였고 나의 삼촌은 지금 만경대협동농장에서 관리일군으로 일하고있습니다. 나는 땅을 다루는 농민들에게 누구보다 애착이 가고 한 나라의 령도자로서 그들에게 하나라도 더 주고싶습니다. 그러나…》

그이께서는 고개를 저으시였다.

《결코 그래서만이 아니고 사회주의제도하에서의 농민문제에 대하여 나는 언제나 마음써오고있습니다.

그들도 다 강력한 사회주의공업국가를 향하여 나아가고있는 우리 나라, 우리 제도의 한식솔인것입니다. 이들에게 더 좋은 미래를 담보해주지 못한다면, 이들에게 사회의 모든 성원들이 다같이 일하고 수요에 따라 분배받는 사회주의, 공산주의세상을 현실로써 펼쳐보이지 못한다면 우리가 어떻게 진정한 인민주권의 대표자들이라고 할수 있겠습니까.》

자리에서 일어선 회의참가자들은 김일성동지께서 천천히 협의회장소를 떠나실 때까지 오래도록 박수를 쳤다.

 

되돌이
감 상 글 쓰 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