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4 회)
제 1 장
푸른 호수
2
(2)
송영숙은 여닫기는 문소리를 듣고서야 눈길을 들고 출입문쪽을 쳐다보았다. 생산부기사장의 출현으로 그의 마음은 더욱더 무거워졌다.
모든 생활이 그에게 괴로움을 주기 위해 계획되고 꾸며진듯 했다. 서정관의 말과 함께 정의성의 모습이 또다시 눈앞에 다가들었다.
그는 서정관과의 대면을 통하여 또 한방망이 맞은 심정이였다.
이윽고 송영숙은 설레설레 머리를 저었다.
(더는… 이제 더는 생각지 말자. 정의성과 나는 지금 아무런 관계도 없다. 나는 기사장이고 그는 공장의 종업원이며 또 기사일따름이다. …)
머리속에 맴돌던 불쾌한 생각을 애써 털어버린 송영숙은 책상앞으로 다가갔다. 그는 의자에 앉아 년간생산실적자료를 펼쳐들었다.
배합먹이직장과 종금직장들, 알깨우기직장과 청년직장이며 생산직장들과 가공직장 차례로 수자화된 자료들을 하나하나 눈여겨보면서 읽어내려갔다.
계획과 실적의 차이며 생산량과 판매량을 비교해보기도 하면서 구체적으로 따져보던 그는 자리에서 일어나 창문쪽에 놓인 콤퓨터앞으로 다가갔다.
그는 능숙한 솜씨로 콤퓨터를 켜고 년간계획과 실적, 계획수행정형을 다시금 대조해보았다.
한동안 자료의 세계에 파묻혀 계획수행정형을 파악하며 콤퓨터화면을 바라보던 그의 눈앞에는 또다시 정의성의 모습이 떠올랐다.
그리고 상대방의 속마음을 투시해보듯 빤히 쳐다보던 서정관의 눈빛과 반짝거리던 송곳이가 기분나쁘게 되새겨졌다.
다음순간 그는 쓸데없는 생각에 빠져든 자기
그는 소리나게 의자를 앞으로 당기고 콤퓨터화면에 눈길을 모았다.
이때 가벼운 손기척소리가 다시금 들려왔다.
응답소리에 뒤이어 문이 열리더니 뜻밖에도 초급당비서(당시) 김춘근이 들어왔다.
《오늘도 현장에 나갔다왔습니까?》
당일군이라기보다 마음후더분한 농사군처럼 보이는 김춘근당비서는 구레나룻이 퍼릿한 얼굴에 웃음을 담고 울림이 좋은 목소리로 물었다.
콤퓨터앞에서 일어선 송영숙은 책상앞의 의자를 권하면서 지배인과 함께 현장을 돌아보았다고 대답하였다.
김춘근당비서는 의자에 앉으며 도목장관리국에서 소집한 회의에 참가하느라고 함께 현장에 나가보지 못해 미안하다고 말하였다.
합숙생활이 불편하지 않는가고 묻던 그는 기사장이 콤퓨터능수라는 말을 들었는데 앞으로 자기에게도 배워달라고 말하였다.
《참, 세대주는 군인민위원회 계획부원이라지요?》
김춘근당비서가 송영숙을 쳐다보며 물었다.
송영숙은 빙긋이 웃었다.
《친정어머니를 모시고 산다던데… 집살림을 돌보면서 어린애까지 맡아키우느라 어머니가 수고많겠군요.》
당비서는 관리국에 회의갔다가 거기에서 새로 온 기사장의 가정래력에 대해 다 알게 된것같았다.
이윽고 김춘근당비서는 크지 않은 목소리로 공장에서 해야 할 일이 적지 않으며 해결해야 할 기술적문제들도 많다고 하면서 정보산업시대의 일군으로서 어깨가 무거울거라고 하였다.
송영숙은 격식과 틀이 없고 어려움도 주지 않는 이 당비서에게 마음을 푹 의지하고싶은 생각이 들었다.
닭공장에서도 그곳 당비서를 친정아버지처럼 믿고 의지하면서 지배인으로 사업해온 그였다.
김춘근당비서의 모습은 문득 닭공장 당비서의 모습으로 바뀌여졌다.
3대혁명소조생활을 마치고 공장에 뿌리내린 송영숙을 걸음걸음 이끌어주고 그의
그는 송영숙의 열렬한 탐구심과 능숙한 사업실천능력을 보고 20대의 처녀를 지배인으로 내세워주었었다.
그뿐이 아니였다.
정의성이 남긴 마음속 상처를 안고 한생 처녀로 살리라 모진 마음을 먹었던 그에게 가정을 이루도록 진심으로 권고하면서 친부모의 정을 기울여준 당비서였다.
잊을수 없는 그의 모습을 그려보던 송영숙은 김춘근이 자리에서 일어나는것을 보고서야 자기에게로 돌아왔다.
《앞으로 사업에서나 생활에서나 걸린 문제가 제기되면 아무때건 찾아오십시오. 함께 풀어봅시다.》
김춘근당비서는 성큼성큼 큰걸음으로 사무실을 나섰다.
송영숙은 출입문이 닫기는것을 보고서도 인츰 자리에 앉지 못했다.
지금까지의 어둡고 무거웠던 마음이 김춘근당비서로 하여 얼마간 가셔지는것같았다.
그는 천천히 창문가로 다가갔다. 청사의 3층에 자리잡은 그의 방 창문가에서는 호수가기슭의 공장전경이 한눈에 안겨왔다.
송영숙은 창문을 활짝 열었다.
4월의 청신한 바람이 호수가쪽에서 불어왔다.
송영숙은 몸도 마음도 깨끗이 정화시켜주는 봄기운을 새삼스럽게 느끼며 크게 심호흡을 하였다.
그의 숨결에는 당의 신임과 기대에 어긋남이 없이 굴지의 오리고기생산기지를 한몸바쳐 떠받들고 생산과 기술을 힘있게 밀고나갈 굳은 결의가 담겨져있었다.
송영숙은 공장전경을 바라보며 오래도록 창문가에 서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