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9 회)

제 1 장

눈내리는 겨울

2

(2)

 

얼마전부터는 편지에 도간도간 처녀소리도 끼여들었다.

이제는 스물일곱이니 친한 처녀도 생겼음직한데 왜 일언반구 말이 없느냐, 녀자를 고를 때는 인물도 봐야 하지만 마음이 기본이니라, 학력이나 가정환경도 물론 놓치지 말아야 하고…

어머니의 지나친 관심과 요구가 더러 거북하기도 했지만 일일이 다 기억하지도 못할 그 많고많은 조항들속에서 진성은 애잡짤한 혈육의 정을 애틋하게 느끼군 하였다. 이번에 걸음을 한것도 어머니를 만나 협주단처녀와 알게 된 자초지종을 이야기하고 내친김에 장래문제에 대한 허락까지 받고싶어서였다.

그런데 집보다 먼저 협주단쪽으로 마음이 쏠리는것은 어인 일인가.

키워준 부모정을 다 잊고 벌써 녀자쪽에 마음이 기울어지는것인가.

최진성은 이런 죄의식비슷한 감정때문에 인차 작정을 하지 못하고 한참이나 궁싯거리였다. 그러다가 문득 의젓한 군관이 도시 한복판으로 북통을 메고다니는것은 어느모로 보나 점잖지 못한 일이라는것, 그렇기때문에 먼저 협주단에 들려 처녀에게 북통부터 넘겨주고 집으로 가는것이 옳을것이라는 아주 합리적인 리유를 찾아냈다.

협주단이 자리잡고있다는 송신방향으로 가자면 대극장앞까지 걸어가서 교외뻐스를 타야 했다. 어쩔수없이 배낭을 다시 메고 북통끈을 들어올리는데 먼발치에서 누군가 자기를 부르는듯한 느낌이 들었다. 사위를 둘러보니 모두들 바쁜 걸음을 옮기는 사람들뿐이고 길 건너켠에 멎어선 승용차안에서 누군가 자기를 향해 손을 젓는것이 보였다.

《동갑이!-》

귀에 익은 음성을 듣는 순간 진성은 한쪽어깨에 배낭끈을 걸치고 북통은 가슴에 그러안은채 허금지금 길을 건너 달려갔다.

차에서 내리신 김정일동지께서 건뎅거리는 북끈을 마주잡으시며 그의 어깨를 그러안으시였다.

《옳구만. 미타하다 하면서두 찾아봤는데 진성동무가 옳아! 하긴 내가 동갑이 얼굴을 잊었을리야 없지. 듣자니 군관학교를 최우등으로 졸업하고 전연에 나갔다지?》

최진성은 감격에 겨운듯 말도 못하고 고개만 흐덕이다가 이내 몸가짐을 바로잡았다.

《당중앙위원회에서 사업하신다는 말을 들었습니다. 찾아뵙자찾아뵙자하면서두 이젠 어려워서

김정일동지께서는 배낭을 멘채로 어쩔바를 몰라하는 최진성을 부둥켜안고 동갑이가 내앞에서 갑자기 무슨 례입을 다 쓰는가고 호탕하게 웃으시더니 승용차의 뒤문을 열어제끼시였다.

《어서 타오. 집으로 가는 길이겠지?》

최진성은 그이의 손에 들려있는 북통끈을 당겨쥐며 뒤걸음을 쳤다.

《이러지 마십시오. 제가 어떻게 그리고 전 집이 아니라 인민군협주단부터 가야 합니다.》

《협주단에?》

김정일동지께서는 의아하신듯 되물으시더니 최진성의 손에 반쯤 넘어갔던 북을 끄당겨 아예 승용차좌석안에 밀어넣으시였다.

《그렇다면 마침이요. 그러지 않아도 내 지금 볼일이 있어 그 방향으로 나가던 참인데… 회포두 나눌겸 함께 가기요.》

최진성은 김정일동지께서 자기때문에 우정 그쪽으로 가시려는것이 아닌가 하고 걱정스러웠으나 끝내 그이의 손길에 등을 떠밀리워 차안에 들어앉고야말았다. 승용차의 앞좌석에 앉아있던 낯모를 해군장령이 새로 들어앉은 진성이쪽에 고개를 돌려 가벼운 눈인사를 던지고는 자세를 바로하였다. 이윽고 그이의 승용차는 대동강다리쪽으로 방향을 잡고 쾌속으로 달리기 시작했다.

김정일동지께서는 뒤좌석 한가운데 놓인 북통우에 손을 얹으며 최진성을 건너다보시였다. 지금쯤 군복을 벗어놓고 인민경제대학 재직반에 갈 준비를 하고있을 최광의 어깨처진 모습이 진성의 순박한 얼굴우에 겹쳐 떠오르시였다. 이틀전에 수령님께서는 며칠밤이나 꼬박 새우신 끝에 최광에게 몇달 공부를 시켜 지방의 어느 자그마한 사회기업소에 내려보내자고 하시였다. 남편이 군복을 벗는 날 중앙녀맹에서 부위원장을 하던 김옥순도 당조직에 찾아와 사직신청서를 내였다고 한다.

김정일동지께서는 그사이 집에서 일어난 일을 모르는것이 분명한 최진성에게 무슨 말부터 뗄것인지 몹시 난감하시였다. 자신과 나란히 앉아가게 된것이 면구스러운듯 차창밖으로 새 아빠트들을 흘깃흘깃 올려다보며 목을 주억거리는것이 꼭 순박하던 어릴적모습 그대로다.

김정일동지께서 그를 처음으로 만나신것은 전쟁이 한창이던 1952년 동생분과 함께 최고사령부가 자리잡은 건지리에 와계시던 그해 초여름이였다. 어느날인가 가까운 산고지에서 대공방어임무를 수행하고있는 고사총진지에 올라가 비행기를 사냥하는 전투원들의 모습도 구경하고 어린 동생을 위해 산말랭이에 때늦게 핀 철쭉꽃도 한아름 꺾어안고 내려오셨는데 고수머리가 더부룩한 총각이 자신의 침대우에 쪼그리고 앉아있었다.

《넌 누구니?》

그이께서 의아하게 물으시자 고수머리총각은 긴 목을 주억거리며 푸시시 일어섰을뿐 대답이 없었다.

《어떻게 여기에 있니?》

재차 물으셨으나 이번에도 입술만 실룩거리면서 종이테프를 엇가로 붙인 손바닥만한 뙤창을 내다볼뿐이였다.

김정일동지께서는 벙어리가 아닌지도 모를 이 소년의 입을 어떻게 걸어볼것인가 하고 궁리하시다가 그애앞에서 자세를 낮추며 깨꼬하듯 올려다보시였다. 그제서야 나무로 깎아만든것같던 고수머리의 무표정한 얼굴에 피씩 웃음이 스쳤다.

《넌 몇살이가?》

《열살!》

고수머리가 처음으로 입을 열었다.

김정일동지의 존안에 밝은 미소가 확 피여올랐다.

《그럼 나하고 동갑이구나!》

동갑이라는 말이 그 무슨 《친척》이라는 말이기라도 한것처럼 머룩머룩하던 소년의 눈에 생기가 확 돌았다. 초면친구의 딱딱한 마음을 《동갑이》로 퉁겨놓으신 그이께서는 고수머리의 손을 잡아 자신의 침대에 다시 끄당겨앉히시였다.

《그런데 넌 어디서 왔니?》

총각은 대답대신 그이께서 안고계시는 꽃묶음만 후르르 쓸어만졌다.

《우리 집 뒤산에두 이런 꽃이 많아.》

《집이 어디게?》

《경상도 함양. 지리산밑이야.》

김정일동지께서는 고개를 기웃하시였다. 곧장 자신의 침실에 들어와 앉아있는것을 보면 아버님께서 데려오신것이 분명한데 전략적인 일시적후퇴가 끝난지도 2년가까이 되여오는 지금 어디서 이렇게 어린 피난민이 나타났는지 모를 일이였다. 부모들은 누구인가고 물으시려다가 아무래도 고아일것만 같아 그만두시였다.

《그런데 네 이름은 뭐니?》

《박-진-성! 바가지 박이야. 그런데…》

고수머리는 쭈밋쭈밋하더니 김정일동지쪽을 훌쩍 건너다보았다.

《날 여기 데려온 최광이라는 군관아저씨가 난 이제 장군님 아들이 된대. 그럼 성을 고쳐야겠지? 장군님은 김가성이라니까. …》

김정일동지께서는 갑자기 어른스러워진 동갑이의 심각한 표정을 보시자 절로 웃음집이 흔들거리시였다.

《걱정말어. 성은 고치지 않아도 돼!》

《정말?!》

동갑이의 눈에는 불꽃같은것이 반짝 빛났다가 인츰 사그라졌다.

《그걸 네가 어떻게 아니?》

아무래도 자기또래밖에 안되여보이는 소년의 장담이 미덥지 않은 모양이였다.

《우리한테두 너같은 아이들이 많아. 하지만 성을 고친 애들은 없어. 바가지 박이든 바구니 박이든 우린 다 장군님 아들들이야.》

《동갑친구》의 말이 무슨 뜻인지 몰라 머리를 갸웃하고 눈을 깜빡거리던 고수머리는 마침내 무릎을 탁 쳤다.

《아하, 그러니까 너도 장군님 아들이 된게로구나.》

《맞아, 바로 맞혔어. 나도 너와 같애!》

진성은 저의 생각이 신통히 들어맞은것이 즐거운듯 《동갑친구》의 어깨를 한팔로 껴안고 긴 목이 휘친거리도록 웃어제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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