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11 회)

제 1 장

눈내리는 겨울

2

(4)

 

최진성이 산골짜기밑으로 굴러떨어진 북통을 찾아가지고 온몸이 땀투성이, 털가막사리투성이가 되여 령마루우에 올라왔을 때는 이미 하현달이 중천에 뜬 캄캄한 밤이였다.

처녀도 없었고 자동차도 없었다. 그들은 이미 가버린것이였다.

비자루숨이 쑥 나갔다. 바빠서 갔겠지. 그들도 명령받은 시간이 있을테니까. 아무리 그래도 자기때문에 북통을 따라 달려간 사람을 좀 기다리면 못쓴단 말인가.

최진성은 허구픈 웃음을 지으며 일어서려다가 문득 고개마루에 보초병처럼 서있는 산뽕나무가지에서 기발같은것이 펄럭이는것을 보았다.

가까이 다가가보니 그것은 나무가지끝에 매놓은 하얀 손수건이였다.

삼삼하게 풍겨오는 복숭아냄새

적재함을 타고오면서 어느새 코에 익어버린 그 냄새를 맡는 순간 심장이 훌떡훌떡 뛰였다. 풀어내여 달빛에 비추어보니 입술연지로 꼭꼭 박아쓴듯싶은 획이 굵다란 글자들이 최진성의 망막에 정차게 날아들었다.

《송정리-포, 트렁크, 198-92026(ㅅ) 정설아》

시간이 모자랐던지, 손수건이 작았던지 암호와도 같은 짤막한 글자들을 남겼지만 최진성은 모든것을 어렵지 않게 깨달았다.

밤사이 길을 걸어 송정리에 위치한 포병대대로 찾아가니 협주단은 한발 먼저 린접군단으로 떠난 뒤였다. 턱밑이 꺼밋꺼밋한 포병대대 직일관이 북통을 멘 젊은 중위를 싱거운 눈길로 한참이나 훑어보고나서 나무트렁크를 내놓았다. 최진성은 자기의 트렁크까지 받고나자 이때껏 뼈물이 쭉 빠지도록 뛰여다닌 결과가 뎅그런 북통 한개와 알량한 글이 적힌 녀자손수건뿐인가 하는 어이없는 생각에 맥이 탁 풀렸다.

그가 터벅터벅 포병대대정문을 나서려는데 수염터가 꺼뭇한 직일관이 싱글거리며 등뒤에 대고 꿱 소리를 질렀다.

《중위동무-우! 그 배우체네가 자기한테 꼭 편지를 하라더군!- 아주 간절하게 부탁합데!- 허허허

편지? 어디다 편지를 하란 말인가? 그저 그래본것이겠지. …

그러던 진성의 눈앞에 불현듯 어제밤 달빛에 비추어본 손수건의 글자들이 확 살아났다. 북통과 트렁크를 내려놓고 바지주머니에 쑤셔넣었던 처녀의 손수건을 꺼내여 화락 펼쳤다.

《198-92026(ㅅ) 정설아》라…

그러니 처녀는 어제 벌써 나에게 주소와 이름을 대주지 않았는가!

오늘 새벽에는 저 수염쟁이직일관에게 간절하게 부탁도 하고…

이거야말로 꼭 편지를 하라는, 편지를 기다리겠다는 뜻이 아닌가!

진성은 새로 배치받은 석박골중대에 도착하자마자 편지부터 썼다.

물론 가슴속에 타오른 불은 쑥 감춰두고 언제든 평양에 가면 꼭 북을 가져다바치겠노라고. …

처녀에게서도 회답이 왔다. 자나깨나 북을 기다리겠노라고. …

《하하하… 그래서 멋쟁이군관이 이렇게 북통을 메고다니댔구만.》

김정일동지께서 호탕하게 웃으시자 진성은 목덜미가 벌깃해났다.

사실 북에 깃든 사연중에서 설아에게 품은 자기의 감정이나 그뒤로 몇번 더 오고간 편지사연은 쑥 빼놓고 말씀드렸지만 어쩐지 그이께서 구멍이 숭숭 난 이야기의 공백을 다 들여다보신것만 같았기때문이였다.

승용차는 이미 대동강다리를 건너서서 선교로타리를 지나고있었다.

《모두다 당 제5차대회를 높은 정치적열의와 빛나는 로력적성과로 맞이하자!》라는 프랑카드를 꽂은 화물차들이 윙윙 마주오고 인도로에는 울긋불긋한 종이꽃을 든 학생가창대가 와와 노래를 부르며 행진해간다.

《참… 방금 진성동문 석박골에 갔다고 한것같은데

진성은 김정일동지께서 자기가 감추고싶어하는 처녀의 이야기를 더 캐여묻지 않고 화제를 돌리시자 저으기 숨이 나갔다.

《예, 지난해에 그리로 조동되였습니다.》

《석박골중대라면 혹시 지난해에 주둔지역 농장원들과 물싸움을 일으킨 그 중대가 아니요?》

진성은 두눈을 크게 흡떴다가 이내 눈을 내리깔며 얼굴을 붉혔다.

《예, 그런 일이 있었습니다. 제가 금방 배치되여갔을 때인데

《그렇구만. …》

김정일동지께서는 잠시 생각에 잠기시였다가 진성이쪽으로 돌아앉으시였다.

《듣자니 거기엔 정치부중대장편제가 없다던데, 어떻소? 그때문에 애로되거나 제기되는것은 없소?》

진성은 당중앙위원회에 계시는 그이께서 군대일에 대하여 모르시는것이 없다고 내심 감탄하면서 얼른 대답을 올리였다.

《저… 정치부중대장이 없으니까 부업이 좀 걸립니다. 다른것은 그닥…》

최진성은 앞에 앉은 해군장령이 흘끔 돌아보는 바람에 입을 쑥 다물어버렸다. 그의 눈빛이 어떻게나 불만스러웠던지 진성은 끝내 다시 입을 열지 못하였다. 어느새 승용차가 협주단정문앞에 멎어섰다.

김정일동지께서는 하고싶은 이야기를 다하지 못한것도, 소꿉시절의 동갑친구와 만나자마자 헤여져야 하는것도 아쉬우신듯 진성의 손을 다시한번 꽉 쥐였다가 놓으시였다.

《진성동무는 이번 인민군당위원회 제4기 제4차전원회의 확대회의문헌도 아직 전달받지 못했지?》

《예, 제가 떠날 때까지는… 우리 중대는 인차 해산된다는 소문두 돌구해서 나간 집같이 썰렁합니다.》

김정일동지께서는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시고나서 차문을 열고 내리시였다. 뒤따라 배낭과 북통을 량손에 갈라든 최진성이 엉거주춤 내려섰다.

《진성동무, 시간이 없어 긴말은 못하겠지만 동문 집에 들렸다가 하루라도 빨리 부대에 내려가서 인민군당전원회의 확대회의 문헌접수토의사업에 참가하는게 좋을것같소. 그리구 옥순어머니를 만나면 내 부탁을 전해주시오, 맥을 놓지 말고 최광동지를 잘 도와달라고.》

김정일동지께서는 무엇인가 더 말씀하려 하시다가 어두운 안색으로 차에 오르시였다. 승용차는 곧 떠나갔다. 그이께서 남기신 마지막말씀은 진성에게 커다란 충격을 주었다.

《맥을 놓지 말고

그 말씀이 무엇을 뜻하는지 다는 알수 없지만 이상한 예감이 밀물처럼 가슴에 밀려들었다. 분명 집에 무슨 일이 생겼다. 수백리밖에서부터 정성스레 메고온 북통이 손에서 툭 떨어져내렸으나 최진성은 그것을 전혀 느끼지 못한채 멀어져가는 승용차를 망연하게 바라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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