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17 회)
제 1 장
눈내리는 겨울
5
《언니 계세요? 철호언니!》
김옥순은 조심스럽게 대문을 두드리며 주인을 불렀으나 마당에는 인기척이 없었다. 한번 더 용기를 내여 문을 두드리는데 삐거덕하고 사립문이 안으로 밀리였다. 대문은 걸려있지 않았다.
몇해전만 하여도 제 집문처럼 여닫던 대문이였지만 이날따라 이 집뜨락에 들어서기가 서슴어졌다. 김옥순의 내외는 요 몇해사이 빨찌산시절의 옛 지휘관인 최현의 집에 한번도 와보지 못하였다. 자기도 그래, 남편도 그래 중앙녀맹이요, 총참모부요 하고 자기 사업에만 바쁘다보니 설날마다 꼭꼭 찾아오군 하던 걸음도 차츰 뜸해졌었다. 그리 넓지 않은 뜨락은 꼼꼼하고 알뜰한 김철호의 손길이 보이는데마다 느껴졌다.
마늘을 심었는지 벼짚나래를 툼툼히 덮은 터밭 한복판에는 무우움 아니면 김치움을 덮은듯 벼짚고깔 두개가 나란히 솟았고 울타리 한구석에 심은 누운향나무에는 한발이나 되는 시래기타래들이 탄띠처럼 드렁드렁 걸렸다. 너부죽한 판돌들이 드문드문 박힌 마당에는 추위에 잔뜩 목을 움츠린 토종닭 대여섯마리가 해바라기를 하고있고 밤빛뼁끼로 대우를 낸 토방 한구석에는 노란 복슬강아지 한마리가 바들바들 떨고있다.
제비둥지가 달랑하게 붙은 처마밑에 감빛곰팽이를 폭 뒤집어쓴 풋강냉이말리가 오사리채로 묶여있는가 하면 꼭지채로 꿰여단 빨간 고추타래가 문발처럼 드리우기도 하였다. 어디선가 한줄금 바람이 불어오더니 고추꿰미가 자륵자륵 소리를 내며 흔들거렸다. 그통에 조글조글 말라버린 고추 한꼭지가 토방우에 톨랑 떨어져내렸다. 김옥순은 외롭게 나떨어진 그 고추꼬랭이를 집어들고 토방돌우에 올라섰다. 타래를 지은 실오리사이에 그것을 끼워넣어보려다가 성냥가치같은 꼭지만 부러뜨렸다. 꼭지마저 부러졌으니 타래속에 끼워넣기는 틀렸다. 김옥순은 댕그라니 밑둥만 남은 고추꼬랭이를 내려다보며 발밑이 꺼질듯이 한숨을 내쉬였다.
고추를 만져서인지 눈언저리가 쓰려났다.
《거 누구요?》
대문쪽에서 귀에 익은 김철호의 목소리가 울리였다. 김옥순은 손에 들었던 고추를 얼른 토방우에 내려놓고 돌아섰다.
어디에 물을 길으러 갔댔는지 연풀색법랑바께쯔를 량손에 갈라든 김철호가 옥순의 얼굴을 알아보고 대문앞에 우뚝 굳어졌다가 물이 철렁거리는 바께쯔를 번갈아보며 휘청휘청 걸어들어왔다. 이 겨울에 물을 길러 다니는것을 보면 수도관이 다 얼어든 모양이다. 김옥순이 달려나가 바께쯔를 받아들려 했지만 철호는 허리를 외로 비틀었다.
《옷 적시겠어. 그런데 부
김옥순은 머리가 핑그르르 도는것 같았다. 자기가 중앙녀맹부
《그래그래, 나야 그저 〈옥순이.〉하고 부르는게 좋지.》
아직도 그때의 정찬 목소리가 귀전에 쟁쟁했다. 물바께쯔를 부엌문앞에 내려놓은 김철호는 토방 한모서리에 걸터앉으며 말뚝처럼 굳어진 옥순을 물끄러미 쳐다보았다.
《어떻게 오래간만에 왔니?》
《병원에 들렸댔어요. 최현동진 오늘… 퇴원했다고 하더군요. 댁에서 안정치료를 받는다기에…》
《그러니까 면회를 온거니? 아니면 무슨 속죄를 하러 온거니?》
김철호의 목소리는 얼음처럼 차거웠다.
《우리가… 죄를 졌어요. 진성이 아버지때문에 최현동지가 심장발작까지 일으키게 될줄은…》
옥순이 미처 말을 끝맺기도 전에 철호는 벌떡 일어서더니 그의 손목을 와락 그러쥐였다.
《너 아직 정신이 덜 들었구나. 좀 들어가자.》
아귀센 철호의 손에 붙들린 옥순은 어쩔사이없이 집안으로 끌려들어갔다. 방안에 들어선 철호는 목에 걸쳤던 수건을 풀어 방 한구석에 놓인 재봉기우에 던져걸고는 구름노전이 깔린 바닥에 올방자를 틀고앉았다. 집에서 안정한다던 최현은 어디로 나갔는지 보이지 않았다.
《앉아라!》
노전바닥을 탕 두드리는 소리에 옥순은 무릎을 굽히며 조심스럽게 앉았다. 철호는 옥순이쪽으로 한걸음 바투 다가앉으며 따지듯 물었다.
《그러니 네가 우리 룡택이 아버지한테 용서를 빌러 왔겠다?》
《알아요.… 용서나 빌어선 안된다는걸.》
철호의 맵짠 손바닥이 다시한번 노전바닥에 탕 떨어졌다.
《알긴 뭘 알아? 네가 룡택이 아버지한테 용서요, 뭐요 하는걸 보니 아직두 제정신이 아니다. 철봉이가 누구냐? 〈민생단〉에 몰려 다 죽게 된 너희 서방은 누가 살려냈구 화룡유격대 정치위원하던 철봉이 아버지는 왜 희생됐니?》
김옥순의 눈앞에는 리영찬의 얼굴이 불쑥 떠올랐다가 사라졌다. 그는 좌경기회주의분자들이 벌려놓은 반《민생단》투쟁을 반대하여 견결히 싸운 투사들중의 한사람이였다. 자기의 남편인 최광이 작식근무에 나갔다가 밥을 한번 설군것으로 하여 《숙반공작위원회》의 영창에 갇혔을 때 단신으로 《숙반》본부에 찾아들어갔던 사람이 바로 리영찬정치위원이였다.
그는 최광이 애젊은 산골내기청년으로서 유격대에 입대하기 전까지 쌀밥구경을 한번도 못해본 감자바우라는것 그리고 이 지대는 기압이 낮아 웬간한 사람들도 방법을 잘 모르면 밥을 설구거나 태우기가 일쑤라는것, 그런것을 가지고 사람을 함부로 가두어서는 안된다는것을 사리정연하게 주장하여 끝내 최광을 구원해냈다. 뿐만아니라 아동단지도원을 하던 김옥순이 영창에 갇힌 최광을 동정하여 수수밥덩이 두개를 뙤창으로 넣어준것을 《련루죄》에 걸어 끌어가려 했을 때에도 무장한 유격대성원들을 데리고나와 완력으로 막아냈다. 대가 바르고 배짱이 센 유격대정치위원을 눈에 든 가시처럼 여기던 동만당의 좌경분자들은 몇달후 지하공작을 나갔던 리영찬이 근거지로 돌아온 뒤 적들의 《토벌》이 시작되자 이 우연한 일치를 《까마귀 날자 배 떨어진것》으로 몰아 다짜고짜로 처형하였다.
그는 숱한 대원들을 목숨걸고 살려냈으나 그가 학살될 때에는 누구도 《숙반》의 칼날앞에 나서지 못했다.
《…그런건 다 셈에 넣지 말구라두 37년도에 신파공작 나갔다가 부대에 돌아온
김철호의 갈린 목소리가 아프게 옥순의 가슴을 파고들었다.
한손으로 구들을 짚고앉아 머리를 푹 수그린 옥순의 얼굴에서 물방울 같은것이 후두두 떨어졌다. 김철호의 목소리도 축축히 젖었다.
《난 그때 정숙동무가 하던 말이 꿈에서도 들린다. 〈이번 길에 영찬동지의 집에 들렸댔는데 아버지사랑도 모르고 홀어머니손에서 자라는 애한테 갑자기 줄게 있어야지요. 공책을 사쓰라구 50전밖에 못줬어요. 그 애 아버지가 알았으면 날보구 뭐라고 했을가요?〉
…정숙동문 그 짧은 한생에
김철호는 얼굴이 온통 눈물범벅이 되여 《빌어라!-》하고 실성한듯 부르짖고는 바닥에 어푸러져 어흥어흥 울었다. 옥순은 더 앉아있지 못하고 휘청거리며 밖으로 뛰여나왔다. 가슴속에 매운 연기가 꽉 찬듯 목이 쓰려나고 두볼로는 눈물이 좔좔 흘렀다. 그렇게 울면서 어떻게 뻐스에 오르고 내렸는지, 어떻게 집에까지 들어왔는지 의식하지 못했다. 더운 눈물을 다 쏟아버리고 찬바람까지 맞은 몸이 후끈한 방안에 들어서자 맥이 쑥 풀리며 와르르 무너져내렸다. 방바닥이 온통 빙글빙글 도는것같다.
창문쪽에 놓인 삼면경대가 욱 다가들기도 하고 금강산팔선녀를 유리에 그려넣은 이불장이 모재비로 넘어지기도 한다. 벌떼같은것이 귀전에서 웅웅거리는데 어디서 사람의 목소리가 울린다. 흐릿해지는 정신을 가다듬으니 그것은 분명 언제인가 자기와 남편이 전화로 나누었던 대화였다.
《여보, 우리 녀맹정문에 철봉이 색시가 찾아왔대요. 남편문제때문에 나에게 뭘 이야기할게 있다는데 철봉이한테 무슨 일이 생겼어요?》
《철봉이 처가? 여보, 받자 하지 말구 돌려보내오.》
《그렇게야 어떻게… 우리야 철봉이를 모른다고 할수 없지 않아요?》
《그만두오. 내 며칠전에 그녀석 별을 떼서 배수리공장에 내려보내라고 했소. 그녀석이 어쨌는지 아오? 눈곱만한 기술을 등대구 경량화요, 뭐요 하면서 전투함선을 마사놓구는 〈우리 아버진 총참모장의 옛 상관이다. 누구도 날 건드리지 못한다!〉 이러구 돌아다녔다오.》
《설마… 뜬소리가 아니예요?》
《보위상의 부관이 직접 들었다오. 자기가 나가서 그만큼 말렸는데두 말을 듣지 않더라누만. 이런 녀석을 그래, 아버지얼굴만 보구 용서해야 옳단 말이요? 리영찬정치위원이 살아있었대두 용서 안했을거요!》
《그럼 철봉이 색시가 날 찾아온건?…》
《듣구두 모르겠소? 원칙은 양보 못해!》
그때… 철봉이의 안해를 만났더라면…
왜 만나지 않았던가?
어제날의 생명의 은인을 등대고 원칙을 무마해보려는 그들의 소행이 괘씸했기때문인가? 녀맹일군으로서 사적인 용건이나 들고다니는 아래사람을 만나기에는 할 일이 너무도 많아서였던가?
아까부터 웅웅거리는 벌떼는 어디서 날아들어와서 이렇게 성가시게 구는가?
《…령감이 퇴원해서
아! 옥순은 두손으로 귀를 꽉 막았다.
김옥순은 입술을 깨물며 간신히 눈을 떴다. 물속에서 눈을 뜬것처럼 앞이 흐리마리하더니 쏘파옆탁에 놓인 하얀 전화기가 눈에 띄운다.
아침저녁으로 찌르릉거리던 전화기…
자기를 부르고 남편을 부르며 잠시도 멎지 않던 전화종소리…
그러고보니 며칠째 전화종소리를 들어본 기억이 나지 않는다.
둘 다 해임되였으니 직무상관계는 끊어진것이 당연하다. 그렇다면 인간적인 관계는 없었단 말인가?
옥순은 그 전화종소리와 함께 인간세상과 련결된 모든것이 끊어져나간것만 같았다.
갔구나, 모두 가버렸어.
최현동지도 철호언니도 철봉이도… 우리를 버리고 가버렸구나. …
맥없이 일어나앉아 흐트러진 머리를 쓸어올리려는데 무슨 글자같은것이 빼곡 적힌 종이 한장이 눈에 띄운다. 누군가 편지를 써서 바닥에 놓아둔것을 보지 못했던 모양이다. 옥순은 연덩어리라도 들어올리듯 편지종이를 집어들었다. 편지는 뜻밖에도 진성이가 써놓고간것이였다.
《어머니, 집에 왔다가 아버지를 만나보고 부대로 떠나요. 식사를 하고는 인차 대학으로 나가야 한다기에 긴말은 나누지 못했지만 들을 이야기는
다 들었습니다. 아버지는 저더러 마음대로 하라고 하는데 이런 일을 당했다고 박가성을 도로 찾아가지겠다고 한다면 그게 무슨 사람의 도리겠습니까.
부모님들의 죄를 저도 함께 씻어야 한다면 기꺼이 그 길을 택하겠어요. 그리고 어머니, 맥을 놓지 말고 힘을 내서 아버지를 잘 도와주세요. 이건
내 부탁이 아니라
아들 최진성 올림.》
김옥순은 몇번이나 편지를 다시 뜯어보다가 그우에 와락 얼굴을 파묻고 또다시 흐느껴울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