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18 회)

제 1 장

눈내리는 겨울

6

(1)

 

그무렵 김정일동지께서는 당중앙위원회집무실에서 인민경제대학 당비서가 걸어온 전화를 받고계시였다.

《최광아바이가 첫 강의에 참가했단 말이지요? 좋습니다. 내 며칠전에 학장선생에게두 부탁을 했지만 아바이의 학습과 생활을 잘 도와주십시오. 지금나이에 공부를 한다는게 어디 헐한 일입니까? 더구나 최광동지는 이전에 군사학교 교장을 한 전적도 있고 오래동안 군사지휘관을 했기때문에 학생노릇을 하기가 뻐근할것입니다. 그렇지만 수령님께서 최광동지를 인차 사회기업소에 내려보내기로 결심하신것만큼 경제실무는 꼭 배워야 합니다. 혹 아바이가 처벌을 받고 내려왔다고 해서 교원들이 하대를 하거나 학생들속에서 인격을 무시하는것과 같은 비도덕적인 일이 생겨서는 안되겠습니다. 그는 우리 혁명의 원로이고 우리 수령님을 받들어 오래동안 잘 싸워온 항일투사가 아닙니까.》

《이미 말씀하신대로 조직사업을 다했습니다. 우리가 잘 돌봐드리겠으니 이제는 더 마음쓰지 마십시오.》

《아니, 그렇다고 해서 그저 누이좋고 매부좋은 식으로 무탈하게 지내라는게 아닙니다. 아바이가 군벌관료주의자들의 영향으로 당조직생활도 제대로 못하고 학습도 잘하지 않다가 과오를 범한것만큼 대학당위원회에서는 학습과 생활에서 나타나는 결함들을 따끔히 비판도 하고 일깨워주기도 해야 합니다. 당생활에서는 혁명년한이나 직급의 상하가 작용하지 말아야 합니다. 그리고 이미 부탁한대로 아바이의 건강과 관련한 문제는 매일 사업보고의 맨 첫 순서에 놓아주십시오. 부탁하겠습니다.》

전화를 내려놓으신 김정일동지께서는 새로 조직되는 만수대예술단의 배우선발과 관련하여 올라온 문건을 펼치시려다가 문득 탁상등곁에 놓인 유리병모양의 소형록음기에 시선이 닿으시였다.

몇달전에 민항에서 근무하는 책임비행사가 가져온것이였다.

수령님께서 리용하시는 전용비행기의 안전상태를 알아보시려고 평양비행장에 나가신 기회에 지나가는 소리로 한마디 한것을 듣고 그 불같은 사람이 서유럽에까지 가서 구해왔다고 한다.

사실 김정일동지께서는 문화예술부문에서 매일같이 올려오는 예술영화, 기록영화, 가극음악, 대중가요 같은 록음록화물만 일일이 보고 듣고 의견을 주시자고 해도 하루시간이 모자라시였다. 그런 속에서 산같이 쌓이는 문건들을 검토하고 전화를 받고 하자니 자연 록음테프같은것은 문건을 보면서 들을수밖에 없으시였다. 그런데 현지에 나갈 때가 문제였다.

문건은 차를 타고가면서 볼수 있었지만 부피 큰 록음기만은 가지고다니기가 어려우시였다. 그런 사정을 눈치챈 책임비행사가 국제항로에 오른 기회에 자그마한 병처럼 생긴 희귀한 록음기를 구해왔던것이다.

병뚜껑처럼 생긴 음량조절기까지 갖춘 록음기는 주머니에 넣고다닐만큼 작기도 하였거니와 전지약을 끼우게 되여있어 휴대용으로는 여간 편리하지 않았다. 그런데 요즘 김량남이가 이 록음기를 몹시 탐내는 눈치다. 해가 질무렵이 되니 얼마 안있어 비둘기 콩밭에 찾아오듯 문을 두드리고 들어설 김량남의 모습이 떠오르시였다.

지금으로부터 몇해전 항일아동단원 김금순의 동생을 꼭 찾으라는 수령님의 교시를 받고 중국동북의 여러 지방과 전국각지에 사람들을 띄우기를 그 몇번

꼭 6개월만에 김금순소녀의 동생과 비슷한 대상을 찾았다는 소식과 함께 그이앞에 나타난것은 자신께서도 퍽 낯이 익은 기록영화촬영소의 록음편집원이였다. 어버이수령님의 현지지도록화편집물을 최상의 수준에서 완성하기 위해 촬영소에 자주 다니시였지만 언제 봐야 허름한 작업복에 눈길도 제대로 들지 못하던, 이따금 드러나군 하는 덧이를 감추느라 두툼한 입술을 어색하게 옥다물군 하던 그가 김금순렬사의 동생일줄이야. …

그때 김정일동지께서는 하늘땅끝에서라도 찾아내리라고 생각했던 사람이 그토록 가까이에 있었다는 사실보다 한때 동북땅의 항일전구는 물론 국제공산당까지 경탄으로 뒤흔들었던 당돌하고 명랑한 아동단소녀의 혈육이 그렇게 어질어보이는것이 더 놀라우시였다.

그가 정말 수령님께서 그처럼 잊지 못해하시는 유격구의 꾀꼴새 김금순의 친동생이 옳을가 하는 의문마저 갈마드시였다.

그러나 그의 모든 리력문건들과 투사들의 보증은 그가 왕우구유격구의 당조직책임자였던 김택규의 친아들이며 김금순의 동생이 틀림없음을 확증해주었다. 수령님께서도 김량남을 만나보고 그의 눈매가 신통히 누나를 닮았다고 기뻐하시였다.

《…이야기를 들어보니 량남이가 어려서부터 고생을 많이 했구만. 왜놈들 치하에서는 공산당계렬의 유자녀라고 누구도 선뜻 맡아주지 않아 철이 다 들도록 산골에 박혀 머슴살이를 했지, 조국에 나와서도 친아버지의 신원을 잘 몰라 마음고생을 하고… 다행히 어릴 때 목동노릇하면서 배워둔 피리재간을 밑천으로 음악공부를 했다니 이제는 당에서 맡아 잘 키워주기요. 보아하니 한뉘 고생고생하면서 좀 주눅이 든것같소.》

김량남을 만나신 그날밤 수령님께서 하시던 말씀이 아직도 귀전에 쟁쟁하시였다. 그후 김량남을 당중앙위원회에 소환하여 자신의 가까이에 두시였으나 수령님께서 그처럼 걱정하시던 주눅은 쉽사리 펴이지 않았다.

가뜩이나 체소한 몸에 어깨를 잔뜩 구부리고 머리까지 푹 숙이고 걸어다니는 모양도 달라지지 않았거니와 사람들앞에서 눈길을 제대로 들지 못하는 습관도 예전그대로였다. 편집원시절의 옷차림때문에 그러는것같아 끼끗한 새옷도 마련해주고 나중에는 입술사이로 비죽이 돋은 덧이에 마음이 씌워지시여 새로 이발을 해넣으라고 보철재료도 보내주시였는데 역시 마찬가지였다. 그는 식당에도 제일 늦게야 그것도 혼자서만 나타난다고 했다. 한번은 익살군으로 소문난 주방책임지가 늘 외토리처럼 혼자 다니는 그를 보기가 딱하여 시간을 제대로 지키지 않으면 식사를 내지 않겠다고 《엄포》를 놓았는데 그뒤로는 아예 밥을 싸가지고 다닌다고도 하고 걸핏하면 점심을 건늰다고도 하였다.

김정일동지께서는 그와 몇번 이야기를 나누어보시고서야 김량남이 어려서부터 눈치밥을 먹으며 남의 집에서 머슴살이를 해온 타성이 성격으로 굳어졌다는것을 알게 되시였다. 그런데 이상한 일이였다.

언제인가 그와 함께 차를 타고가다가 이 소형록음기를 켜놓은적이 있었는데 거기서 음악이 울리기 시작하자 어줍기만 하던 그의 눈에 단박 생기가 도는것이였다.

《희한합니다! 이 작은 병안에서 이런 울림이 나온단 말입니까!》

그리고는 록음기를 손에 쥐고 이리저리 돌려보기도 하고 흔들어보기도 하며 모짜르트의 《뛰르끼예행진곡》에 대하여, 슈만의 《꿈》에 대하여 선률이 나오는대로 탄사를 하는것이였다.

김정일동지께서는 김량남의 주그러든 마음속 어디서 저런 격파와 같은 불줄기가 쏟아져나오는것인지 사뭇 놀라우시였다.

그때부터 김량남이 자신의 집무실에 찾아오는 회수가 퍽 잦아졌다.

특별한 화제도 없이 문득 뛰여들어서는 자신의 책상서랍쪽을 넌지시 건너다보며 괜히 벙글거리군 하였는데 그때마다 김정일동지께서는 《이거 비둘기가 또 콩밭에 왔군.》 하시며 록음기를 꺼내놓으시였다.

그러면 량남은 벌거우리해지는 얼굴에 순박한 미소를 지으며 다가와 제손으로 록음기의 스위치를 눌렀다. 록음기에서 음악이 울리기 시작하면 김정일동지께서도 모든 일을 다 제쳐놓고 그 세계에 심취되시였다.

음악을 감상하는것보다 김량남이 어깨를 펴고 주먹을 흔들며 자기의 가슴속을 활활 터쳐내는것을 바라보는것이 더 즐거우시였다. 일과처럼 굳어진 음악감상과 함께 김량남의 성격에서는 확실히 변화가 일어났다.

며칠전에 피바다가극단에 나갔다가 어느한 신인배우의 귀속말을 들어보니 요즘은 김량남이만 대극장에 나오면 한다하는 작곡가들과 지휘자들이 슬슬 그의 눈치를 본다고 하였다.

《그렇게 용한 사람이 뭐 무서워서?》하고 물어보니 《용한 사람일게 뭡니까? 요전날 우리 지휘자동지가 량남지도원동지앞에서 가극노래를 다 절가화해야 하는가, 아리아적인 요소를 다 없애고나면 가극의 본태가 없어지지 않겠는가고 한마디 했다가 한시간이나 두들겨맞았습니다. 비판할 땐 목소리도 얼마나 큰지 모릅니다.》하고 조용히 속살거렸다.

김정일동지께서는 녀배우의 그 귀속말이 다시 떠올라 빙그레 미소를 지으며 앞벽에 걸린 《개성》표벽시계를 바라보시였다.

오늘 2. 8영화촬영소와 조선예술영화촬영소의 축구팀이 경기를 한다기에 김량남을 내보냈는데 이제는 올 시간이 되였다. 마침 출입문쪽에서 똑똑똑 하고 문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다. 반색을 하며 일어서시려는데 문을 열고 들어선것은 뜻밖에도 장령외투를 입은 최현이였다.

《아니, 최현동지가 어떻게 된 일입니까?》

최현은 머리에 썼던 양털모자를 벗어 두손으로 모두어잡고 문가에서 서성거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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