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17 회)
제 1 장
푸른 호수
8
(1)
송영숙은 거의 두달만에 집식구들과 한자리에 앉았다.
딸 경아는 엄마의 무릎에서 순간도 떨어지지 않았다.
송영숙은 새별처럼 반짝이는 딸애의 눈동자를 웃는 얼굴로 들여다보기도 하고 방울달린 머리를 쓰다듬어주기도 하였다.
오래간만에 가정적인 단란한 분위기에 몸을 잠근 그의 마음은 류달리 따뜻해지고 즐거워졌다. 느닷없이 이 소중한 세계를 떠나 합숙에서 몇달동안 어떻게 살았을가 하는 새삼스러운 생각이 들었다.
그럴수록 김춘근당비서가 더없이 고마왔다.
그는 방금전에야 남편에게서 군사복무시절의 정치위원이였던 김춘근당비서에 대해서와 갑자기 이사해오게 된 사연에 대해 구체적으로 알게 되였다.
이사해오던 이야기를 하면서 문춘실은 떠나는 자기들을 멀리까지 따라나와 바래주던 닭공장마을사람들과 그들의 후더운 인정을 잊을수 없노라고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백상익도 그곳에서의 생활을 잊을수 없다면서 정깊은 눈길로 창밖을 바라보았다.
송영숙의 마음도 뭉클 젖어들었다. 인생의 귀중한 한시절, 기쁘고 즐거웠던 날도 많았고 괴로움에 잠 못들던 날들도 많았던 닭공장에서의 생활이 고속영화화면처럼 눈앞에서 흘러갔다.
점심식사를 마친 후 백상익은 가구들의 위치를 조금 변경시키였다.
가구들을 정돈하면서 송영숙은 남편과 얼마간 옥신각신하였다.
송영숙은 공장사람들이 들여놓고 정돈해준 지금의 위치가 좋다고 고집했고 남편은 가구를 리용하는 사람의 심정과 취미 그리고 생활에 편리하게 변경시켜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안해가 고집을 부리려들자 백상익은 더 말하지 않고 제손으로 가구들을 척척 옮겨놓았다. 축구선수답게 시원시원하고 너그러운 성격인 그였지만 생활에서는 누구보다 섬세하고 다감하였다. 그는 길고 실한 팔다리의 근육을 살리면서 가구들을 혼자서 힝힝 들어옮겼다.
송영숙은 하는수없이 남편을 도와 전실에 놓였던 긴의자를 아래방에 들여오고 랭동기는 부엌에 옮겨놓았다. 세탁기도 세면장물탕크옆에 옮겨놓고 꽃병과 화분들의 위치도 조금씩 변경시켰다.
모든것이 백상익의 주장대로 어머니가 리용하기 편리하게 배치되였다. 송영숙이 남편과 맞잡고 방안정돈에 여념이 없을 때 문춘실은 부엌과 집주변을 돌아보았다.
그에게는 불이 잘 드는 부엌도 마음에 들었지만 앞마당이 넓고 뒤뜰에 터밭이 있는것이 무엇보다 기뻤다.
(뒤터밭엔 경아 아범이 좋아하는 마늘과 풋고추를 심고… 저쪽 앞마당엔 돼지우리와 닭장을 짓구…)
그는 마당을 돌면서 이런저런 설계를 해보았다.
닭공장마을에서 살 때에도 그는 앞마당이 넘쳐나게 집짐승들을 많이 길러 집살림에 크게 보태였었다. 부지런한데다가 손이 걸어서인지 그의 집에 온 짐승들은 어느놈이나 다 투실투실했고 새끼낳이, 알낳이를 잘했다.
동네사람들은 그를 보고 축산반장이라고 불렀다.
그러나 백상익은 몸매작고 체소한 가시어머니를 《륙해항공
문춘실도 그 부름을 싫어하지 않았으며 《
사실 그는 일흔살이 가까운 나이에 집안살림을 도맡아안고있었지만 살림살이를 그야말로 기름지게 잘하였다.
함경남도의 어느 바다가마을에서 태여난 그는 북관녀인답게 승벽심과 생활력이 강하면서도 통이 크고 알뜰하였으며 료리솜씨 또한 기가 막힐 정도였다.
그는 자기의 딸이 공장의 큰 일군이라는 자부심으로 은근히 어깨를 높이기도 하였지만 인정많고 경우가 밝아서 싫다는 소리를 듣지 않았다.
집정돈을 다 끝낸 다음에야 집안에 들어온 그는 아래웃방을 둘러보며 집이 마음에 든다고 말하였다.
세면장에서 세면을 하고 나온 백상익이 가시어머니의 말을 제꺽 받았다.
《정말 마음에 들지요? 어머니?》
백상익은 길쑴한 얼굴에 웃음을 담고 청굵은 목소리로 물었다.
사위를 돌아보며 문춘실은 머리를 끄덕였다.
《어째 마음들지 않겠소. 영 좋슴메.》
그는 억양이 센 북관사투리로 대답하였다.
사위의 물음이 자기가 해놓은 일에 대하여 칭찬을 바라는 아이적 마음이 담겨져있음을 어렵지 않게 깨달은 그였다.
딸과 사위의 문제에서는 언제나 사위의 편에 서군 하였고 사위가 하는 일이라면 무작정 두손들어 찬성하는 문춘실이다.
송영숙은 어머니의 칭찬에 으쓱해진 남편을 부러 심술궂게 흘겨보았다. 남편은 깨고소한 웃음을 지어보이더니 장난스럽게 한쪽눈을 찡긋했다.
송영숙은 그만 웃음이 터져나와 호호 웃고말았다.
남편은 얼마후 휴식도 할겸 공장마을을 돌아보겠다면서 딸애를 데리고 밖으로 나갔다.
송영숙이 전실과 복도를 청소하고 방안에 들어오니 문춘실은 옷장문을 활짝 열어젖히고 옷가지들을 정돈하고있었다. 갑자기 이사하면서 서둘러 꿍져넣었던 옷가지들이였다.
송영숙도 어머니앞에 마주앉아 딸애의 옷보자기를 펼쳐놓았다.
딸애의 체온이 슴배인 꽃수건 같은 옷가지들을 차곡차곡 개여놓던 그는 어머니가 그린듯이 앉아있는것을 느끼고 눈길을 들었다.
다음순간 가슴이 쿵- 울렸다. 어머니가 마디진 두손으로 정히 쓰다듬고있는것은 전사한 아버지의 군복이였다.
송영숙은 마음속으로 《아버지!》하고 불렀다.
오래간만에 전사한 아버지의 대위령장이 달린 군복을 보는 그의 마음은 류달리 높뛰였다. 그는 앉은 몸을 밀며 군복앞으로 다가갔다.
그리고는 아버지의 체취가 느껴지는 군복의 앞자락이며 팔소매를 정히 쓸어만졌다. 손바닥을 거쳐 따스한 체온이 느껴지는듯 했다.
송영숙은 지금도 아버지의 체취를 기억하고있었다.
그것은 소독약냄새가 섞인 땀냄새였다.
송영숙은 어머니가 그 군복을 보자기에 정히 싸서 옷장안에 넣은 다음에도 오래동안 아버지에 대한 생각에 잠겨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