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27 회)
제 1 장
눈내리는 겨울
9
(2)
…
《지금 들어오세요?》
열려진 문사이로 연한 분냄새같은것이 풍기더니 능금알같이 동실한 안해의 얼굴이 나타났다. 김량남은 킁킁 코김을 불며 집안으로 들어섰다.
인민학교(당시) 2학년에 다니는 딸애는 방바닥에 엎드려 숙제를 하다가 그대로 곯아떨어졌는지 네모칸학습장우에 코를 박았고 아래목에는 하얀 상보를 씌운 밥상이 놓였다. 원앙새 두마리를 수놓은 알뜰한 상보를 훌 젖히니 뚜껑을 덮어놓은 밥그릇 두개가 마주놓였다. 안해도 지금껏 식사를 하지 않고 기다린 모양이다. 착실한 주부인 김량남의 안해는 그가 라진에서 고등학교를 다닐 때 알게 되였다.
량남이 다닌 고등학교에는 해방바람에 동북과 원동쪽에서 나온 고아들이 많았다. 고등학교 주변마을사람들은 올데갈데 없는 고아들이 불쌍해서 일요일이 되면 이 학교기숙사에 찾아와 아이들을 한두명씩 자기네 집에 데려다 별식도 해먹이고 옷도 빨아주군 하였다.
김량남을 도맡아 집에 데려가군 한것은 울타리안에 앵두나무를 빙 돌려심은 앵두나무집녀인이였다. 딸을 셋씩이나 둔 어머니여서인지 량남이가 공밥얻어먹는 송구스러움을 덜양으로 어쩌다 장작이라도 몇가치 패놓으면 큰일났다고 손사래를 치면서도 대견해서 어쩔줄 몰랐다.
차츰 량남은 이 집의 아들처럼 되여가고 량남이보다 한살 아래인 순애와 그밑으로 줄줄이 내리달린 주인집처녀애들도 량남이만 나타나면 강아지들처럼 매달렸다. 량남은 한주일에 한번씩 이 집에 갈 때면 사람이 사는것이란 바로 이런것이로구나 하고 생각하군 하였다.
떡호박일망정 흐벅지게 삶아놓고 등을 쳐줄라, 랭수를 떠줄라 한개라도 더 먹이지 못해 속상해하는 어머니며, 자기의 교복을 빨아 다려서는 목달개까지 깨끗이 달아놓고 집을 나설 때마다 오구구 달라붙어 옷매무시를 살펴주는 계집애들이며가 다 나서부터 함께 살아온 혈붙이처럼 정이 쑥쑥 들었다. 중학교를 졸업하고 음악대학에 왔을 때도 량남은 자기가 떠나온 그 앵두나무집을 잊을수가 없었다. 량남은 졸업을 한해 앞둔 겨울방학에 앵두나무집으로 찾아갔다. 대학에서 받은 장학금으로 어머니의 고무신과 동생들의 리봉같은것을 사는것도 잊지 않았다. 그러나 복슬강아지같던 처녀애들은 이미 꽃리봉을 달고다닐 자투리들이 아니였다.
봄물이 오른 앵두알처럼 처녀꼴이 완연한 순애는 량남이가 나타나자 눈도 들지 못한채 턱인사를 하고는 웃방으로 달아났고 그아래 동생들도 저들끼리 어깨를 치며 키득거리기만 하였다.
조금도 달라지지 않은것은 어머니뿐이였다. 그 어머니손에서 떡호박을 또 실컷 얻어먹고 대학으로 돌아왔을 때 량남은 이상하게도 자기를 보자 웃방으로 달아나던 순애의 모습이 책우의 글줄을 계속 가리우는것을 어쩔수 없었다. 량남은 또 다음방학을 기다렸다. 그렇게 기다린 방학을 타서 앵두나무집에 찾아갔던 날 량남은 난생처음 용기를 내여 순애의 반려가 되고싶노라고 어머니에게 터놓았다. 그러자 그렇게 밝고 따뜻하던 앵두나무집 녀인의 눈은 싸늘하게 식어버렸다.
《량남이 이 사람, 섭섭하게 들릴지 모르겠지만 난 지금 자네가 도리에 어긋나는 말을 하는것같네. 부모없는 자네가 불쌍해서 있는 정, 없는 정 다 바쳤는데 이제 와선 내 귀한 딸을 달라니 삼천리에 혈친 한점 없는 몸으로 순애를 데려다간 어쩔셈인가? 우리 애는 인차 도소재지에 있는 외삼촌한테 보내야 하니 그런 생각은 말아주게. 그리고 그런 말을 또 하겠거든 앞으론 우리 집에 다니는 걸음두 삼가하는게 좋겠네.》
정을 들이는데는 세월이 필요하지만 정을 끊어던지는데는 시간이 필요없는 법이다. 모든것은 순간에 단 한마디로 결정되였다. 량남은 설음과 외로움, 부끄러움과 후회가 뒤섞인 쓰거운 오열을 깨물며 앵두나무집을 하직하였다. 그렇게 돌아오면서 량남은 사람이 사는것이란 바로 이런것이로구나 하고 또 한번 생각하였다.
그러나 몇달후 김량남이 졸업배치장을 안고 달려나온 대학정문앞에는 꽃다발을 안은 순애가 기다리고있었다.
《오빠는 정말 녀자들만두 못해요. 어머니가 한번 그런 말을 했다고 돌아서면 다예요? 딸가진 어머니가 그런 말도 못하겠어요? 어머닌 오빠대신 내가 설복했어요. 그러니 오빤 나한테 크게 빚졌어요?》
김량남은 순애가 들고온 나무트렁크 한개와 대학동창들이 결혼기념으로 사다준 둥글밥상 한개를 놓고 새살림을 폈다. 바로 그 둥글밥상이 지금 자기앞에 놓여있다. 생각에서 깨여나 숟가락을 들려는데 앞치마를 두른 순애가 법랑다반을 받쳐들고 들어왔다.
《늦어서 미안해요. 국을 좀 덥히느라구…》
그런데 다반을 상에 내려놓는것을 보니 국그릇옆에 목이 길죽한 술병도 보인다.
《이건 또 뭐요? 내가 술 못마시는줄 몰라서?》
김량남은 원체 술을 입에 대지 않았다. 어려서부터 머슴살이를 하다보니 술을 배울새도 없었거니와 량남이 보건대 술이란 자기 인생에 가당치 않은 호사였다. 어떤 사람들은 속이 상하면 술을 마시고 주정을 한다고들 하지만 사실 주정이라는것도 들어줄 사람이 있어야 하는것이다. 이렇게 굳어진 술에 대한 관념은 평생 혈혈단신으로 자란 량남의 인생관으로 굳어졌다. 안해도 그것을 모르지 않는터에 술병을 들여온것은 무슨 영문인가. 그런데 안해의 대답이 뜻밖이였다.
《이건 마시라구 내놓은게 아니라 보라구 들여온거예요.》
《보라구 들여오다니?》
김량남의 두눈이 술잔만큼 커졌다.
《나흘전인가, 당신이 기분이 푹 처져서 늦게 들어온 그날 말이예요. 당신이 퇴근하기 전인데… 어떤 젊은분이 집에 왔더군요.》
김량남은 국사발을 휘젓던 숟가락을 덜그렁 놓쳐버렸다.
《그래서?》
《그분이 하는 말이 당신이 집에 들어와 밤잠을 못잘수 있겠는데 정 못자겠다고 하면 이 술을 한잔 올리라구… 누구예요? 한부서사람이예요?》
김량남은 눈을 부릅뜨며 밥상을 탕 내리쳤다.
《그 말을 왜 이제야 하오? 왜?》
안해는 화딱 놀라 봉긋한 앞가슴에 두손을 모두어쥐였다.
《나야 당신이 잠을 못들면 드리라기에 그런줄만 알았지요 뭐. 그런데 당신이야 그새 언제 잠을 못든적 있어요?》
김량남은 두눈을 딱 감고 고개를 제치였다. 얼굴이 화끈 달아올랐다. 불덩이같은것이 목구멍을 치뚫고 화끈 솟구쳤다.
이 김량남이 나흘동안 어느 하루도
잠 못든적이 없음을 아신다면
오히려 그것을 주신분께서 더 걱정하실만큼 무거운 처벌을 나는 얼마나 가볍게 받아안았던가? 하루나 이틀이면 다시 찾으실것이라고?
나는 도대체
아,
김량남은 술병을 그러안고 뒤로 벌렁 넘어졌다.
어디에 그렇게 많은 눈물이 고여있었던지 관자노리를 축축히 적시며 주룩주룩 흘러내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