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23 회)
제 1 장
푸른 호수
11
(1)
종금2직장 수의사 리병우는 30여년간 한직장, 한직종에서 묵묵히 일해온 기술자였다.
종자오리의 암수비례에 대한 연구로 학위를 받은 그는 요즈음엔 오리털을 분해하여 털단백질을 얻기 위한 연구를 하고있었다.
그는 언제봐야 말이 없었고 사람들과의 교제도 별로 없었으며 또한 그것을 달가와하지 않았다.
성격이 까다롭거나 괴벽스러운데가 전혀 없을뿐아니라 표정변화가 거의 없는 얼굴처럼 내적인 표현이 극히 적은 그를 보고 사람들은 입이 무거운 사람 또는 점잖은 사람이라고 했다.
하지만 차수정은 그를 맹물같은 사람이라고 했다. 달지도 쓰지도 않고 짜지도 맵지도 시지도 않은 맹물… 맹물이라도 펄펄 끓거나 반대로 얼음같이 차다면 좋으련만 그저 미적지근한 물이였다.
그러나 가공직장장 방인화의 눈으로 본 그는 《답답한 사람》이였다.
지금도 방인화는 후보종자오리호동앞에 자기와 마주앉은 리병우의 얼굴을 민망스런 눈길로 쳐다보았다. 했으나 이 《답답한 사람》은 표정변화없는 누룽퉁한 얼굴을 짓수굿하고 그저 눈만 꺼벅꺼벅하였다. 체통이 큰 방인화는 후끈 달아올랐다.
《이젠 나이도 적지 않은데 자존심은 무슨 자존심이요? 그래 봄순이를 시집보내구서 계속 혼자 살갔소? 예?》
리병우와 동갑나이인 그는 벌써 같은 말을 몇번이나 반복했다. 그는 대답을 재촉하듯 쭈그리고앉은 몸을 자꾸만 궁싯거렸다.
방인화의 몸은 점점 더 달아올랐다. 성격이 불같은 그는 할수만 있다면 리병우를 콱 쥐여박고싶었다.
(사람이 어쩌문 저다지두 답답할가. … 코구멍이 두개이니 다행스러운 일이지. …)
그는 미간을 찌프리고 코바람을 내불며 리병우를 건너다보았다.
공장에 유독 한명뿐인 녀성직장장으로서 어지간히 코대가 높고 거대스러운 그는 방가집 녀인답게 성격이 드세고 입심 또한 보통이 아니였다. 그러나 정의감이 강하고 인정이 남달랐다.
리병우네 옆집에서 오래동안 함께 살았고 병으로 사망한 그의 처와 가공직장에서 함께 일하면서 친형제처럼 가까왔던 방인화는 지금도 그때의 정을 잊지 않고있었다. 그래서 리병우네 집살림을 각근히 돌봐주면서도 친동생의 안해였던 차수정을 그에게 소개하였던것이다.
그런데 두 살림을 합친지 1년만에 차수정이 집에서 나가버리는통에 방인화는 그만 아연해지고말았다.
하지만 그는 지금도 두사람을 포기하지 않고 다시 살림을 합치도록 애쓰면서 뛰여다니였다.
《그래 어찌겠소? … 야, 한번 속시원히 말 좀 하라구요, 예?》
그는 어지간히 목소리를 높이며 다그어댔다.
《글쎄…》
리병우는 무표정한 얼굴로 이 말만 반복하였다.
방인화는 제켠에서 답답하여 몸을 궁싯거리며 거친 숨을 내쉬였다.
문득 그의 본처가 직장녀인들에게 들려주었던 이야기가 떠올랐다.
…
그때는 딸애가 태여난지도 몇년이 되던 해였다.
어느날 아침밥을 먹던 그 녀자는 깜짝 놀랐다. 무슨 정신에 그렇게 했는지 자기가 끓인 두부국이 소금이 전혀 들어가지 않은 맹물이였던것이다. 다음순간 늦게 자다가 일어나 아침밥을 짓느라 몹시 덤벼쳤다는것을 깨달았다. 더우기 밥상에 응당 올랐어야 할 양념장그릇마저 없는것을 보고는 자기의 실수에 얼굴을 붉히였다.
그 녀자는 몰래 남편의 얼굴을 훔쳐보았다.
그런데 남편은 그 싱겁고 맛없는 국을 아무런 타발도 없이 후룩후룩 들더라는것이다. 그 녀자는 얼른 부엌에 내려가 양념장을 가지고 올라와 남편앞에 놓아주며 싱겁지 않은가고 물어보았다.
《글쎄… 싱겁지만 뭐…》
그때 그 녀자의 마음은 섭섭했다.
원래 말하기 싫어하는 성격이지만 필요한 말이야 왜 못할가. …
불쑥 장난기가 살아오른 그 녀자는 어디 정말 말하지 않는 사람인가 시험해보리라 생각하였다.
다음날 아침 그 녀자는 부러 소금을 많이 넣은 국을 해놓고 가만히 남편을 지켜보았다.
그런데 《이크! 국이 짜졌군.》하고 얼결에라도 한마디 할줄 알았던 남편은 이번에도 국을 한술 떠보고는 말없이 국그릇을 밀어놓고 랭수에 밥을 말아먹는것이였다. 그리고는 군소리없이 아침출근을 했다. …
그 녀자의 말을 들으며 녀인들은 가공장이 들썩하게 폭소를 터뜨렸다.
《결국 말할줄 아는 벙어리구만?》
《그러면 잠자리에서두 팔다리로 말을 대신하겠지?》
《그때에야 뭬라구 하겠지. 안그래?》
가공장은 또다시 웃음소리로 들썩해졌다.
…
《자꾸 글쎄, 글쎄 하지만 말구 래일이라두 보급원을 찾아가라구요. 정 혼자 가기 뭣하면 나하구 같이 가던지… 그렇게 하지요, 예?》
리병우의 대답을 받아내느라 안달이 난 방인화는 자기들에게로 기사장이 종금2직장장과 함께 오는것을 모르고있었다.
《안녕하십니까?》
기사장의 상냥스러운 인사말을 듣고서야 그들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송영숙은 친근한 어조로 물었다.
《무슨 얘기를 그렇게 재미나게 합니까?》
그의 물음에 두사람의 얼굴은 다같이 붉어졌다.
《이웃이 사촌이라구 곁에서 부럽게 자주 만나군 합니다.》
뭐라고 대답해야 할지 몰라 끙끙 갑자르는것을 보고 종금2직장장이 그들을 대신해서 말했다. 하더니 제켠에서 하하 소리내여 웃었다.
방인화도 어처구니없는지 씁쓸히 웃었다.
송영숙도 분위기에 어울리게 웃으며 방인화와 리병우를 쳐다보았다.
리병우를 처음 보는 순간 그의 귀전에는 수정이 하던 말이 떠올랐다.
《두번째에도 기딱 막히게 멋있는 사람을 만났더랬으니까. …》
생활에 위축되였는지 활기가 없는데다가 등이 약간 구부정하여 작업복뒤자락이 들리운 리병우는 나이보다 무척 겉늙어보였다.
수정이 리병우를 두고 《기딱 막히게 멋있는 사람》이라고 부를만 하다는 생각이 들기도 하였다.
(그래도 처음엔 마음이 동해서 살림을 합쳤을텐데…)
입귀를 실그러뜨리던 수정의 여위고 주근깨가 많은 얼굴을 상기해보던 송영숙은 그만 가보겠다는 방인화의 말을 듣고 자기 생각에서 깨여났다.
《저때문에 할 얘기를 다하지 못했겠군요.》
송영숙은 미안한 표정으로 말했다.
방인화는 실한 팔을 내저었다.
《술 석잔은 고사하구 귀뺨이나 석대 맞을 걸음이니 끝이 없습니다.》
그는 게면쩍은 얼굴로 엉거주춤 서있는 리병우를 힐끔 치떠보고는 사내처럼 씨엉씨엉 걸어갔다.
송영숙은 생각깊은 눈길을 방인화에게서 옮기지 못하였다. 바로 그가 차수정을 리병우에게 소개했다는것을 알게 되였기때문이다. 방인화가 무척 돋보이였다.
방인화는 차수정과 리병우의 인간적인 우수성을 누구보다 잘 알고 그들이 한가정을 이루면 충분히 행복하리라는것을 믿었을것이다. 아울러 그들 두사람의 전망이 그다지 암담한것으로 생각되지는 않았다.
송영숙에게는 그것이 얼마나 다행스러운지 몰랐다.
이윽고 그는 얼굴에 부드러운 미소를 지으며 리병우를 쳐다보았다.
《난 수의사동지가 털단백질먹이를 연구한다기에 어떤건지 알구싶어서 찾아왔습니다.》
새 기사장을 처음 대하는 리병우는 그 무표정한 얼굴에 송구한 빛을 담았다. 기사장의 눈길이 자기에게서 떨어지지 않는다고 느낀 그는 눈건사도 제대로 못하였다.
《글쎄… 뭐 별루…》
우물쭈물하는 그를 보고 직장장이 툭한 소리로 충고했다.
《그저 지금 하구있는 일에 대해 설명해드리오.》
그의 충고를 받고서도 리병우는 선듯 말꼭지를 떼지 못하고 끙끙 갑자르기만 하였다.
이럴 때에는 상대방이 자기의 의도대로 물음을 제기하는것이 상책이라고 생각한 송영숙은 알고싶었던것에 대하여 묻기 시작하였다.
《수의사동진 어떻게 오리털로 털단백질먹이를 만들려는 생각을 했습니까? 정말 기발한 착상이던데요.》
그는 자못 흥미를 느끼는 얼굴로 수의사의 누르끼레한 얼굴을 쳐다보았다.
《그건 언젠가 문헌자료에서…》
새로 온 기사장의 상냥스러운 태도와 호기심이 담겨진 목소리에서 가까스로 용기를 얻은 리병우는 드디여 말꼭지를 떼였다.
그는 언젠가 문헌자료에서 가금의 털에서 높은 실수률로 완전단백질을 얻어내여 식료품과 의약품, 화장품생산에 리용할수 있다는것을 알게 되였다고 말하였다.
송영숙은 그에게 용기를 북돋아주듯 크게 머리를 끄덕이였다.
사실은 그도 이미전에 가금의 털에 단백질과 완전단백질이 들어있다는것을 알고있었다. 문제는 단백질먹이를 만드는 방법이였다.
처음 말꼭지를 떼기가 힘들었어도 일단 떼고보니 리병우는 뜨직뜨직하게나마 끊지 않고 설명을 이어나갔다. 그는 종전의 화학적방법이 아니라 미생물발효법으로 털단백질을 얻어내려 한다고 말하였다.
《이미전에 우리 수의사동무는 가성소다용액을 넣구 류산으로 중화시키는 화학적인 방법으로는 성공했습니다. 그러나 새로운 미생물발효법으로 다시 연구를 하고있는겁니다.》
곁에 서있던 직장장이 기회를 놓치지 않고 수의사를 칭찬하였다.
송영숙은 머리를 끄덕이였다.
《듣자니 수의사동진 종금의 암수비례에 대한 연구로 학위를 받았다지요?》
그는 존경심이 담겨진 눈길로 다시금 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