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37 회)

제 2 장

파도소리

3

(2)

 

현지지휘관들과 함께 전방지휘소에 올라가 포대경에 두눈을 대고 적들의 진지를 빙 둘러보고난 최현은 병사들이 차지한 참호쪽으로 나가보자고 하였다. 전방지휘소에서 좁은 교통호를 따라 200m쯤 내려가서 마른풀투성이의 위장그물을 씌운 기관총진지가 나타났다.

4신고사기관총을 수평으로 꺾어서 적진을 바로 겨누어놓았는데 그 주위에 빙 둘러앉았던 군인들이 최현을 알아보고 놀라서 후닥닥 일어섰다. 급히 옷매무시를 바로잡으며 규정대로 보고를 하려는 상사를 만류하고난 최현은 기관총이 총구를 향한 곳으로 손가락을 내질렀다.

《여기서 적진지까지 거리가 얼마나 되나?》

《직선거리로 804. 2m입니다. 대장동지!》

갱핏해보이는 상사가 눈앞으로 자꾸만 흘러내리는 훌렁훌렁한 철갑모를 올리밀면서 소수점아래수자까지 딱 짚어서 여돌차게 대답하였다.

《저앞엔 어떤 놈들이 있소?》

《조선인민의 철천지원쑤인 미제침략군놈들이 도사리고있습니다!》

《력량대비는 알고있나?》

《우리는 모두 일당백입니다. 대장동지!》

철갑모가 더 흘러내리지 못하게 하느라고 고개를 약간 뒤로 제낀 상사가 꼿꼿한 자세로 당돌하게 대답하였다. 최현은 너누룩하게 웃으면서 총판우에 걸터앉더니 병사들모두를 손짓으로 눌러앉히였다.

《담배 가진것 있나?》

최현이 병사들쪽에 손을 내밀자 사단장이 얼른 군복웃주머니에 손을 가져갔다. 그러나 최현은 도리머리를 흔들며 상사에게 손을 내밀었다.

《차렷담배말고… 병사들끼리 피우는 마라초가 있지?》

상사는 주위에 둘러앉은 분대원들을 얼핏 둘러보더니 손등으로 턱밑을 쑥 훔치며 좀 주저하는 눈치였다.

《저… 있기는 하지만 드릴수는 없습니다.》

《어째서?》

《담배연기가 적들의 사격목표로 될수 있습니다.》

《뭘? 하하하…》

최현은 걸싸게 웃으며 교통호쪽에 몰켜선 군관들을 둘러보더니 꼿꼿하게 서있는 상사에게 손을 한번 더 쑥 내밀었다.

《깍쟁이부리지 말구 내놔. 최현이가 미국놈들 무서워서 담배 한대두 못피우구 갔다는 소문이 나면 상사가 책임지겠나? 저기선 사복입은 기자나부랭이들두 거들거리며 돌아다니는데… 자, 한대씩 말자.》

이윽고 잔디풀이 다보록이 돋은 흉장우에 구수한 마라초연기가 피여올랐다. 두눈을 가느스름하게 쪼프리고 흩어져가는 담배연기를 바라보고있던 최현은 군인들을 향해 누구에게라없이 물었다.

《동무들은 여기서 무엇을 지키고있나?》

병사들은 제마끔으로 대답하기 시작했다.

《사랑하는 고향과 부모형제들입니다.》

《귀중한 조국입니다.》

대답소리를 따라 한바퀴 빙 돌아가던 최현의 눈이 어딘가 깊은 생각에 잠긴듯한 상사의 눈에서 멎었다. 상사는 그 눈길을 느꼈는지 소리없이 자리에서 일어섰다.

《대장동지, 우리는 위대한 수령님께서 계시는 평양을 지켜 싸우고있습니다. 적들이 움쩍만 하면 우리는 혁명의 수도 평양을 사수하여 한목숨바쳐 싸울것입니다!》

기다란 재덩이를 늘어뜨린 마라초를 발치에 던진 최현은 연기가 실실 피여오르는 꽁초를 군화뒤축으로 힘껏 비벼끄고나서 벌떡 일어섰다.

《옳아! 동무들은 여기서 평양을 지키고있소. 방금 이 상사도 말했지만 우리에게 있어서 조국은 곧 수령님이시구 수령님은 곧 조국이요. 이걸 아는 병사가 바로 일당백이야!》

최현은 기분이 흠뻑해져서 병사들과 헤여졌다.

교통호를 따라 전방지휘소에 올라오니 멀리 백양나무숲속에서 파르스름한 연기가 뭉게뭉게 피여오르고 땅을 물어뜯는듯한 무한궤도소리, 앙앙 힘을 쓰는 중량차들의 기관소리가 어우러져 들려왔다.

예비대들의 허위기동이 때맞추어 시작된것이였다.

최현은 군단장에게 급히 37사쪽으로 나가 방어부대들의 동원준비상태를 재확인할것과 노루봉에서는 계속 기세를 올리면서 적들의 시야를 붙들어두도록 할것을 지시하고나서 맨나중에야 리오송을 불러세웠다.

《오송이, 내 실은 동무를 좀 단단히 비판하려댔는데… 모를 일이야. 엉터리같은 친구가 정치사업 하나만은 잘했거던.》

방금 만나본 병사들을 두고 하는 말이였다.

부러 엄한 표정을 지어보이면서도 느물거리는 웃음을 감추지 못하는 최현의 얼굴을 슬쩍 곁눈질해본 리오송은 시치미를 뚝 따고 말했다.

《허, 이것 참, 한개 군단의 정치위원을 엉터리친구라고 부르는 법이 어디 있습니까? 아무래도 최현동지를 신소 좀 해야겠습니다.》

《이것 봐라, 날 신소하겠어? 그럼 나두 널 좀 신소해야겠다. 정치위원이라는게 제일은 걷어치우고 훈련대대를 끌고다녔겠다?》

최현이 리오송의 속을 중떠보느라고 배지기를 들었는데도 본인은 여전히 뻣뻣한 기색이다.

《최현동지, 정치위원의 사업이란 뭐겠습니까? 군사지휘관들이 옳은 결심을 내리도록 바로잡아주고 일단 결심한 다음에는 그것이 정확히 관철되도록 떠밀어주고 빈구석이 생기면 뒤따라가며 메꿔주는게 아니겠습니까? 제가 맡은 훈련대대는 이 세가지를 다 갖추었다고 생각합니다.》

말솜씨가 서툰 리오송의 언변치고는 책을 들고 읽는것같은 달변이다. 말문이 막혀버린 최현은 리오송이 한두달사이에 이렇게 달라졌을수야 있는가 하고 딴사람처럼 뚫어지게 바라보았다.

리오송이 그 눈길을 끝내 이겨내지 못하고 어깨를 허물었다.

《이젠 그만 보십시오. 제야 무슨 그런 재목이 됩니까? 사실은 정치위원으로 임명받던 날 김정일동지를 만나뵈왔댔습니다.》

최현은 그제서야 고개를 끄덕이였다.

《그러면 그럴테지. 그래 뭐라고 하시던가?》

그이께서는 군사지휘관경력밖에 없는 제가 난생처음 해보는 일을 제대로 해내겠는지 자신이 없다는 보고를 들으시고 정치위원사업이라고 하여 특별하게 생각할것은 없다, 수령님의 군사사상과 우리 당의 군사정책을 관철하기 위한 사업에서 군단장은 군사적책임을 지고 정치위원은 당적책임을 진다, 맡은 분공이 다를뿐이지 목적은 하나라고 하시였습니다. 그러시면서 지금 일부 전연군단장들은 방어에 치중하면서 공병지뢰같은것들을 증강해줄것만 바라고있는데 이것은 수령님의 뜻이 아니다, 우리는 항상 조국통일을 위한 싸움에 준비되여있어야 한다, 수령님께서는 지금 우리 식의 기묘한 전법으로 적들의 요진통을 일격에 타격소멸할수 있는 군단급부대를 창설하실 구상까지 하고계신다고 귀띔해주셨습니다.》

최현은 어쩐지 자기의 몸이 졸지에 한줌만큼 줄어드는것같았다.

미거한 몸이나마 통채로 내대고 최전연에 닥친 위급한 사태를 막아나서려고 허위단심 달려왔지만 결국은 그이의 탁월한 선견지명이 적들의 전술을 무용지물로 만들어버린것이 아닌가.

최현은 리오송의 어깨죽지를 주먹으로 툭 질러주었다.

《그만하면 정치사업을 괜찮게 한셈이야. 군단장도 아마 이제는 부대들을 어떻게 준비시켜야 하는지 알았을테니까. 동무말마따나 그 예비대가 큰 구멍을 메꿔냈거던! 하지만 충고는 좀 해야겠소.》

최현은 퍽 부드러워진 음성으로 말을 이었다.

《이번엔 시간이 급박해서 어쩔수 없었다치더라도 앞으로는 정치위원이 군사행정을 가로맡아나서는것같은 인상을 주지 말아야 돼. 어버이수령님께서 가르쳐주시지 않았나? 군단의 주인은 군단당위원회라고. 품이 많이 들더라도 군사일군들을 끝까지 설득시켜 그들자신이 부대를 이끌게 도와주어야 돼. 더 말 안해도 알겠지?》

리오송은 빙그레 웃으며 이마를 문질렀다.

《그러지 않아도 군단당위원회앞에서 자기비판을 하려댔습니다.》

《옳아. 정치위원일수록 그래야지.》

이제는 마음놓고 군단을 떠나도 되겠다고 생각한 최현은 승용차에 한발을 올려놓으려다가 멈추고 리오송을 향해 물었다.

《진성이가 이 부대에 있지? 최광이 아들말이야.》

《예, 지금 석도에서 갱도공사를 하고있습니다.》

《좀 만나보군 하나? 일을 잘해?》

《전선정황이 긴장해서 최근엔 나가보지 못했습니다.》

《잘 도와주라구. 아들까지 망태기를 치면 최광인 뭐가 되나?》

《지금 그 중대에 보낼 똑똑한 정치지도원감을 고르는중인데… 여하튼 너무 걱정하지 마십시오. 여기에야 제가 있질 않습니까?》

차에 오르는 최현의 입가에는 흐뭇한 웃음이 피여올랐다.

 

되돌이
감 상 글 쓰 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