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29 회)
제 2 장
인생의 봄시절은 흘러갔어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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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공장에서 나오는 오리털을 한줌이라도 허실할세라 아글타글 수집하여 수입첨가제를 사온다는것을 잘 알면서도 적지 않은 량을 갈라내여 털단백질먹이연구에 돌리다니…
말끝마다 《수입에 의존하지 말고 공장이 자체로 살아가자면 무엇보다 원료, 자재의 국산화를…》하면서 자기의 주장을 고집하는 기사장이였다.
그럴 때마다 지배인은 이렇게 생각하였다.
(우리 공장사람치고 국산화를 바라지 않는 사람이 누구며 사대주의 병이라고 하는 수입병을 좋아하는 사람이 누구랴. …
그리고 공장 기술준비소에서 하는 첨가제연구가 성공하기를 바라지 않는 사람이 또 누구랴. …
하지만 과학연구란 결코 욕망만으로 되는 일이 아니다. 더우기 축산부문에서 첨단이라고 하는 첨가제연구는 수십년을 헤아리는 먼 앞날의 일이 아닌가. …)
지배인의 눈에 비낀 기사장은 발뒤축을 살짝 쳐들면 우리 식의 첨가제라는 호함진 꽃송이를 담쑥 손에 잡을듯이 생각하는 천진한 소녀와 같았다. 그러한 천진한 생각으로 낮이나 밤이나 첨가제연구와 털단백질먹이연구에만 몰두하고있는 기사장이였다.
(일을 많이 하자는건 좋은 일이지. …)
장병식지배인은 매번 이렇게 너그럽게 생각하였다.
또한 녀성일군의 진취적인 일본새와 남다른 정열과 성실성을 귀중히 여기면서 언짢은 감정을 묵새기군 하였다.
《연구도 중요하지만 우리한테야 생산이 기본인데… 계획수행이 법이라는 생각을 하지 못하는건 아닐텐데 정말 안타깝습니다.》
지배인의 말없는 행동에서 그의 속생각을 재빨리 넘겨짚은 서정관은 자기도 몹시 답답한듯 무겁게 한숨을 내쉬였다.
의자등받이에 웃몸을 기대이던 장병식은 앞시창에 달린 거울을 통하여 서정관의 얼굴을 지켜보았다.
그의 얼굴에는 직속상급인 녀성기사장의 결함을 제켠에서 파헤쳐야 하는 괴로움과 안타까움이 력력히 씌여져있었다.
장병식지배인은 옆차창으로 슬며시 눈길을 돌리며 그를 외면했다. 어쩐지 그에게선 전혀 진정이 느껴지지 않았다.
과묵하고 웅심깊은 그는 깊이가 없고 속내가 빤드름한것을 제일 질시하였다. 좋은 감정이든 나쁜 감정이든 자기의 마음을 쉽게 드러내보이지 않는 지배인이였다.
어느덧 승용차는 사무청사마당에 들어섰다.
《계획대로 래일 떠나겠으니 오리털포장을 잘하도록 해주오.》
차에서 내리며 장병식지배인은 뒤쪽에 대고 한마디 하였다. 그리고는 성큼성큼 사무실로 올라갔다.
지배인의 뒤를 따라 차에서 내린 서정관은 한동안 서있었다.
(무슨 기분나쁜 일이라도 있는가? 수초배에 올라서는 기분이 영 좋았는데… 혹시 내 말이 불만스러웠는가? …)
서정관은 지배인의 얼굴색과 말투를 곰곰히 상기해보았다. 자기가 혹시 말과 행동에서 실수한것이 없는가도 되새겨보았다. 그러나 지배인의 무뚝뚝한 어조가 여느날과 조금도 다름없음을 깨닫고야 푹 안심되였다.
그는 곧장 자재과로 찾아갔다.
자재과에는 몇년전에 경리과에서 넘어온 나이지숙한 부원과 생산과의 젊은이가 있었다. 그들은 문기척소리 없이 들어온 생산부기사장을 의아한 눈길로 돌아보았다.
《오리털포장이 어떻게 됐소? 지배인동진 계획대로 래일 떠나겠다던데. 가공직장에 세척해 말리웠던것도 다 포장했소?》
서정관은 두사람을 번갈아보며 큰소리로 물었다.
그의 물음에 나이지숙한 부원은 씨물 웃으며 느릿한 어조로 말했다.
《예, 다 포장했습니다. 헌데… 이번 첨가제수송은 별스레 관심하는 사람이 많군요. 어제는 기사장이 치마바람 일구며 찾아오더니 오늘은 부기사장동무까지 신발바닥에서 고무탄내 나도록 찾아오니 말이요.》
언제봐야 비웃음을 담고 삐뚤어진 소리를 곧잘하는 부원에게서 《기사장의 치마바람》소리가 나오자 뻣뻣하고 틀스러워보이던 서정관의 얼굴에도 슬며시 웃음이 피여났다.
하면서도 《동문 그 말버릇때문에 한번 되게 경치겠구만, 응? 함부로 녀성일군을 모욕하면서…》하고 점잖게 꾸짖었다.
그러나 바른말을 들을수록 움츠러들기는커녕 더욱더 신바람이 나서 말재간을 부리는 그 부원에게 사기를 북돋아주고 그가 기사장에 대한 험담을 더 했으면 하는 마음이였다.
아닐세라 그 부원은 즐거운 태도로 반응하였다.
《왜 그 말이 어째서요? 오리고기생산에서 혁신의 불바람을 낳게 하는 맵구 짜구 향기롭구 또 따스한 바람인데요?》
청중의 즐거운 반응은 독연자를 격려하는 법이다.
《어디 그뿐인가요? 국산화를 찌글써하게 대하는 수입병환자들을 되게 혼내우고 다불리우는 맵고 새크러운 바람이기두 하지요. 그러니 참 좋은 바람이 아니갔소? 에?》
부원은 신파쟁이처럼 손세까지 써가며 말했다.
그 순간 서정관의 눈살은 대바람 꼿꼿해졌다.
《뭐요? 수입병? 누가 수입병이요, 엉?》
그는 어지간히 신경질적으로 따지듯 물었다. 기사장에게서 자주 듣군하던 수입병이라는 자극적인 말이 기분잡치게 상기된것이다.
하지만 그쯤한 태도에 기가 꺾일 자재부원이 아니였다.
《아따! 수입병이야 지금 우리 공장사람 누구나 다 앓구있지 않소? 나두요! 허지만 고칠 방도가 없으니 야단이지요. 그래서 기사장두 열두자락 치마폭을 날리며 뛰여다니구요. 내 말이 틀리시우?》
자재부원은 주걱턱을 건듯 쳐들었다.
그제서야 서정관의 얼굴빛은 다시 부드러워졌다.
《헌데 아무리 날구뛰는 녀자라도 남자에겐 안된다구요. 내 옛말 하나 하라오?》
나이지숙한 부원은 히물히물 웃으며 또다시 이야기판을 폈다.
《옛날 어느 나라에 녀자들만 많이 사는 섬이 있었다누만. 대신 남자는 이 손가락으로 꼽을만큼 몇명밖에 없었다오. 끔찍한 일이지요.
우리 종금호동 수컷들은 섭섭치두 않구 또 힘에 부치지두 않을만큼 암컷 다섯을 거느리구있지만 그 섬나라는 남녀비률이 1대 100쯤은 되던 모양이요. 야단이라도 큰 야단이지요. 글쎄 자식낳이는 자식낳이구 밭은 누가 갈구 나무는 또 누가 한단 말이요?
그래서 생각하구 또 생각하다가 녀자를 가지구 남자를 만들기로 했다누만.》
서정관은 엉터리이야기이지만 다리쉼이나 하듯이 의자를 당겨놓고앉아 머리를 끄덕끄덕하였다.
독연자의 말재간에 끌리워 젊은 부원도 일손을 멈추고 눈길을 쳐들었다.
《하, 그런데 말이요, 기계조립을 하듯이 녀자 열명을 가지구 붙이구 떼구, 떼구 붙이면서 겨우 남자 하나를 만들었는데 아, 글쎄 뭔가 또 한가지가 모자랐다누만.》
《그 모자라는게 뭘가요?》
젊은 부원이 저도 모르게 한마디 께끼였다.
《글쎄 뭐가 모자랐는지 그건 나두 모르겠소. 결론은 뭔가 하니 녀자가 제아무리 날구뛴다 해두 녀자는 녀자라는거요.》
독연자는 새로운 진리라도 찾아낸듯 으쓱해서 주걱턱을 다시 쳐들었다.
서정관도 더 들을 말이 없다는듯 의자에서 끙 몸을 솟구었다.
《동문 언제봐야 엉터리요, 엉터리!》
그는 손가락으로 부원을 가리키며 비웃음을 지었다.
그러나 자재과를 나서는 그의 마음은 자못 즐거웠다. 기사장을 비난하던 부원의 말이 클클하던 기분을 어느 정도 해소시켰던것이다.
요즈음 서정관의 마음속에서는 매일같이 기사장에 대한 불만이 내굴처럼 꾸역꾸역 차오르고있었다.
송영숙이 기사장으로 사업하면서부터 서정관의 생활은 뒤죽박죽되였던것이다. 전 기사장밑에서는 거드름스러운 자세로 현장을 한바퀴 돌아보는것으로 하루일과를 마치는 때가 드문하였다. 하지만 지금은 그런 일본새로는 도무지 살아갈수 없었다.
기사장이 새라새롭게 설계하는 일감때문에 오금이 쑤실 정도로 뛰여다녀도 끝이 없었다. 하면서도 기사장에게서 언제한번 만족한 표정을 찾아볼수 없었다.
(분수없이 오지랖이 넓단 말이야. … 말끝마다 수입병타령만 하면서…)
그렇다고 앞에서 불만을 표시하지는 않았다. 오히려 그 반대였다.
그는 이따금 기사장에 대한 의견을 품고있는 사람들앞에서 기사장을 화제에 올리고 그들이 터놓는 불만을 꾸짖는척 하면서 자기도 모르게 그 불만을 더 야기시키군 하였다. 어쩌다 기사장에 대한 뒤소리를 들으면 마음이 절로 평온해지기까지 할 정도였다.
지금도 그는 자재부원의 말을 되새겨보며 기꺼이 박수를 보냈다.
(아무렴 녀자가 무슨 큰일을 한다구… 그저 치마바람만 일군다니까. …)
서정관은 또다시 코웃음을 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