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34 회)

제 2 장

인생의 봄시절은 흘러갔어도

3

(3)

 

어느덧 정의성이 닭공장에 내려와 연구사업을 시작한지 2년이 가까와오던 어느날이였다.

그는 연구조책임자로부터 다음날 가금전문가들과 대학교원들의 참가하에 공장에서 학위론문공개심의가 있으니 참가하라는 소식을 받았다.

다음날 아침 《전자시계》는 늦지도 빠르지도 않게 공장합숙을 나서서 론문심의장소인 회의실에 들어섰다. 회의실에는 이미 공장의 기술일군들과 3대혁명소조원들 그리고 안면있는 연구사들이 와있었다.

정의성은 뒤켠쪽의자에 앉아 심의를 기다렸다.

심사성원들이 들어와 자리를 잡고앉자 곧 론문심의가 시작되였다.

까만 주름치마에 눈같이 하얀 저고리를 산뜻이 입고 연탁에 나선 론문제출자를 본 정의성은 놀라움을 금치 못하였다.

다소 긴장되여 갸름한 얼굴이 발가우리 상기된 그 처녀는 다름아닌 송영숙이였다. 저 처녀가 언제 벌써 학위론문을 준비하였을가?

놀라움은 자못 컸다.

느닷없이 합숙방 전실에 뿌려졌던 도서들과 잡지들이 떠올랐다.

이윽고 장내에는 송영숙의 청아한 목소리가 울리기 시작했다.

처녀는 크고 맑은 눈동자를 영채롭게 반짝이며 가금의 성장과 촉진에 대한 자기의 론문을 발표하였다.

《이렇게 동물의 간과 혈청을 주원료로 하는 동물성성장촉진제로 가금의 먹이소화률을 높이고 마리당 증체률을 120프로이상 높였습니다. …》 송영숙은 실험자료에 근거하여 론리적으로 설명하였다.

정의성은 가금의 생리적특성과 성장촉진의 필수적조건인 먹이가치에 대한 깊이있는 연구와 과학적인 실험자료에 근거한 처녀의 해설에 귀를 기울였다. 그리고 처녀의 높은 실력과 탐구심에 감탄을 금치 못하였다.

그러나 그는 송영숙의 그 론문에서 치명적인 약점을 발견하였다.

어느덧 처녀의 토론이 끝나고 심사원들과 참가자들속에서 질문이 오고갔다. 송영숙은 여유있는 자세로 걸그림에 그려진 실험자료와 대조표를 짚어가며 침착하게 설명하였다.

질문이 거의 잦아들무렵 정의성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를 본 송영숙의 얼굴엔 일순 당황한 기색이 스쳐지나갔다. 기이하고 아름답지 못한 그와의 첫 대면이 상기되였으리라.

그러나 정의성은 처녀가 아니라 걸그림쪽을 보며 정확한 발음으로 의견을 말하기 시작하였다.

《저는 지금까지의 토론을 들으면서 가금생산을 위해 사색과 탐구를 이어온 론문제출자의 높은 학구정신앞에 진심으로 머리를 숙였습니다. 그러나 저는 이 론문에서 간과할수 없는 문제점이 있다는것을 발견했습니다. 그것은 다름이 아니라 론문제출자가 오늘이 21세기라는것을 잊고 이 연구를 진행했다는겁니다.》

그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장내에서는 약간 술렁거림이 일었다.

송영숙의 얼굴에도 긴장과 불안이 씌여져있었다.

잠시후 정의성은 다시 말을 이었다.

《동지들도 알고있는것처럼 오늘의 21세기는 농업뿐아니라 축산과 첨가제까지도 록색화방향으로 나가고있습니다.

그런데 이 론문은 21세기를 무시한 동물성성장촉진제에 대한것입니다. 더우기 동물의 간과 혈청은 그자체가 식료품이고 의약품의 귀중한 원료로서 원천도 제한되여있습니다.

이렇게 놓고볼 때 이 론문은 어제와 오늘은 있어도 래일이 없는 론문이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

정의성은 일어설 때처럼 조용히 자리에 앉았다.

정의성의 발언과 기타 여러 의견이 종합된 결과 송영숙의 론문에는 부결이라는 답이 떨어졌다.

그때 누구보다 놀란 사람은 정의성이였다.

(부결이라니? 나때문에? … 아니! 나는 그저 의견을 말했을뿐이다. 그런데…)

그는 결코 부결되는것을 바라지는 않았다.

정의성은 송영숙에 대한 죄의식으로 하여 며칠동안 마음의 안정마저 잃고 밤잠도 제대로 자지 못하였다.

(그 동문 지금 나를 무섭게 저주할것이다. 자기의 신성한 첫 창조물에 구세기의 딱지를 붙여놓은 나를…)

그렇다고 송영숙을 찾아가 사죄하고싶은 마음은 없었다.

그때로부터 일주일이 지난 어느날, 현장으로 나가던 그는 정문앞에 서있는 송영숙을 띄여보았다.

처녀는 눈같이 하얀 작업복의 앞자락을 헤쳐놓고 주머니에 두손을 꼭 찌른채 자기쪽을 바라보고있었다.

(드디여 나에게 항의하려고 찾아왔구나!…)

정의성은 키가 크고 몸매 날씬한 처녀를 바라보며 걸음발을 약간 늦추었다.

송영숙이 먼저 경쾌한 걸음으로 그에게 다가왔다. 그는 고개를 약간 숙이더니 그윽한 눈매로 쳐다보았다.

《전 지금껏 동무를 만나려고 기다리고있었답니다.》

《그렇습니까?》

정의성은 따분하고 면구스러워 앞머리카락을 몇번 쓸어올렸다.

그는 처녀의 그 어떤 항변도 다 받아들이고 진심으로 사죄해야겠다고 마음다졌다. 그런데 송영숙은…

《전번 론문심의때 좋은 의견을 주어서 정말 고맙습니다. 그리고 난 동무에게서 많이 배웠습니다.》

《?!》

정의성은 자기의 귀를 의심하였다. 그리고 진실성여부를 가늠해보려고 눈길을 들었다.

(이것이 웃음속의 칼이라는건가? 웃음속에 감추어진 복수?…)

그러나 처녀의 크고 정기도는 두눈과 청아한 목소리에 담겨져있는것은 너무도 순수한 진정이였다.

《저는 정말 동무의 말을 듣고 많은걸 생각했답니다. 명예나 발전에 현혹돼서 대학시절부터 연구해오던걸 서둘러 발표했으니까요.》

처녀는 진정으로 자기를 책망하며 얼굴을 붉히였다.

처녀의 그 진정에 정의성은 크게 감동되였다.

《하지만 동문 나를 몹시 원망했겠지요?》

처녀는 머리를 끄덕이였다.

《처음엔 동무를 증오도 했구 또 원망도 했어요. 그러나 인츰 동무의 의견이 참으로 옳다는걸 인정했지요 뭐. 그래서 이렇게 찾아온거예요.》

몇마디 말을 나누어보니 그는 무한히 허심하고도 솔직한 처녀였다.

《앞으로도 많이 배워주십시오.》

처녀는 진정으로 부탁하였다.

정의성은 머리를 저으며 말했다.

《그러지 마십시오. 사실은 내가 동무에게서 많이 배워야겠더군요. 참, 좋은 책이랑 참고서를 많이 보던데 나에게도 좀 빌려줄수 없습니까?》

송영숙은 선듯 머리를 끄덕이였다.

며칠후 정의성은 처녀에게서 가금참고자료와 잡지들을 받았다.

정의성도 그에게 번역판 신간잡지 몇권을 주었다.

어느덧 정의성의 마음속에서 열정적이고 아름다운 처녀는 지울수 없는 존재로 자리잡히기 시작하였다. …

(지금 송영숙은 어제날의 그가 아니다. 세월과 함께 그는 오늘 완전히 달라진 모습으로 나타났다. 나 역시 달라진 모습으로 그와 마주서있다. …)

오리울음소리에 생각에서 깨여난 정의성은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나 놀이장으로 들어갔다. 후회비슷한 감정이 그의 가슴에 도랑물처럼 흘러들었다. 이윽고 그는 홱 머리를 저었다.

(아니! 나는 결코 후회하지 않는다! 그때 나의 결심은 백번 옳았다! 그러니 절대로 후회하지 않는다!…)

 

되돌이
감 상 글 쓰 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