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38 회)
제 2 장
인생의 봄시절은 흘러갔어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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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박사가 지금 살고있는 집도 지배인의 사업보장을 위해서 공장에서 지어준것을 아버지가 완강히 주장하여 자기에게 넘겨주었다고 언제인가 유상훈
(아버지와의 친분관계를 박사는 지금도 잊지 않고있다. 그러니…)
그는 온 입안에 금빛이 가득차도록 또다시 크게 웃었다. 그의 마음은 점점 부풀어올랐다. 그는 당장 안해의 등을 떠밀었다.
생산직장에서 오래동안 현장기사로 일해온 가시아버지가 언제인가 무슨 론문인지 경험글인지 하는것을 썼다는 생각이 나서 당장 그것을 가져오라고 처가집으로 보냈다.
저녁무렵 안해는 누렇게 퇴색된 종이뭉테기를 안고 집으로 들어섰다.
《자요!》
서정관은 안해의 품에서 종이뭉테기를 나꿔채듯 받아들었다.
온방이 좁다하게 종이뭉테기를 펼쳐놓고 보니 그것은 새끼오리의 경골성장특징과 나이에 따르는 먹이처방에 대한 연구자료였다.
서정관은 벌쭉 웃으며 안해를 쳐다보았다. 그날따라 안해의 얼굴은 여느때없이 귀엽고 사랑스럽기까지 하였다. 안해야말로 자기의 마음속생각까지 앞질러가며 헤아려주고 방도를 튀워주며 힘껏 떠밀어주는 둘도 없는 길동무였으며 철저한 대변자였다.
그날 저녁부터 서정관은 웃방에 들어박혀 며칠밤을 새워가면서 그 자료들을 제 손으로 옮겨베꼈다. 직위욕과 명예심에 불타올라 끼니도 건느면서 한글자라도 놓칠세라 신경을 곤두세웠다.
가끔 최금천과 임광일의 얼굴이 눈앞에 다가들었다. 그 얼굴들은 묘한 효과를 발생시켰다. 졸음도 배고픔도 다 잊게 하는 기막힌 추동력이였다.
(정보산업시대의 일군이라면 응당 학위를 받아야 한다. 그러니 내 기어이…)
그는 자기의 생각이 기특하여 벌씬 웃으며 계속 써나갔다.
《장인이 못다한 연구를 사위가 완성하는건 응당한 일이지?》
서정관은 자기
《그렇잖음요, 응당하다뿐이갔소?》
방송화는 크지 않은 눈을 할기죽거리며 남편을 응수했다.
그는 연구자료가 다 정리되자 《금강산》담배까지 꿍져주며 남편을 박사의 집으로 떠밀었다. 하지만 그 걸음이 코 떼여 주머니에 넣는 일이 될줄이야. …
처음 유상훈박사는 연구자료를 보아달라는 서정관을 무척 대견하고 기쁜 마음으로 반겨맞아주었다. 애써 공부하고 탐구하려는 사람이라면 그가 누구든 친자식처럼 대해주고 또 힘자라는껏 도와주는 박사였다.
《퇴근길에 들리오. 그동안 내 봐줄테니…》
연구자료를 받아쥔 박사를 본 서정관은 기쁜 마음으로 그의 방을 나섰다. 그는 곧 안해에게 전화를 걸었다.
《저녁식사를 잘해놓소. 소장아바이와 함께 들어갈테니까.》
그러기를 바라고있던 안해는 쾌히 접수하였다.
서정관의 마음은 구름우에라도 오른듯 붕 떴다. 모든것이 얼음판에 박 굴리듯 슬슬 잘되여갔다.
오십년동안의 인생길을 더듬어봐도 아버지의 이름과 배경의 덕으로 모든 일이 계획되고 생각했던대로 척척 잘되여왔었다. 그러니 이번일도 그렇게 멋지게 될것이다.
그는 나이많은데다가 병약한 기사장을 눈앞에 그려보며 그의 자리에 자기를 앉혀보았다. 꽃구름우에 두둥실 떠실려 앞날을 그려보던 그는 퇴근시간이 되기 바쁘게 기술준비실로 갔다. 그런데…
《자네 세상에서 제일 큰 도적이 뭐라고 생각하나?》
흠흠 코바람을 내불며 유상훈박사는 단도직입으로 물었다.
《?!》
《글도적이네. 알겠나?》
《…》
서정관의 얼굴은 대바람 지지벌개지였다.
박사는 또다시 그루박으며 말했다.
《이건 자네 장인이 오래전에 나한테 보여주었던거네. 그러니 다신 남의 글을 도적질하지 말구 제 머리로 애써서 공부하게. 그러지 않다간 지금 그 자리도 지켜내지 못하네.》
박사는 긴말을 하지 않고 자료묶음우에 담배까지 덧놓아서 밀어놓았다. 그리고는 아예 상대하지 않을 심산인지 신문을 펼쳐들었다.
얼굴이 수수떡처럼 되여버린 서정관은 떨리는 손으로 담배며 자료묶음을 걷어쥐고 문밖을 나섰다. 너무도 메사해서 숨소리마저 고르롭지 못했다.
그다음부터 서정관은 기술준비소근처에 얼씬도 못하였다. 먼발치에서 박사의 그림자만 봐도 가던 길을 돌아섰다.
그런데 오늘은 첨가제생산실건설을 맡았으니 유상훈박사의 그 쓰거운 웃음과 불쾌한 코소리를 피할수 없게 된것이다.
(하필 내가 이 건설을 맡을건 뭐람? 이게 다 기사장때문이라니까. …)
자기의 처지가 따분해질수록 기사장에 대한 원망은 더욱 커졌다.
그는 기사장이 차수정과 자매처럼 가깝게 지내는것이 또한 아니꼬왔다.
서정관은 원래 외형부터 덕이 없게 여윈데다가 직사포처럼 톡톡 내쏘군 하는 차수정을 몹시 싫어했다. 처남이 수정이와의 결혼문제를 내놓았을 때부터 앞장에서 반대한 그였다.
(보잘것없는 농장원가정에서 자란 처녀라지? 가시집배경이 든든한 처녀와 결혼해야 앞으로 발전할수 있겠는데…)
그는 차수정을 깔보면서 처남을 꼬드겼다. 그러나…
《교원이 발전하면 어디로 발전하겠습니까? 발전한다구 해도 수정동무가 뭐 지장되겠나요?》
처남은 매부의 충고를 조금도 받아들이지 않았다.
처남이 사망한 후 수정을 대하는 그의 태도는 더욱더 랭담하였다.
공장의 일군들이 홀몸이 된 수정을 위해 새 집도 지어주고 남편생각을 잊고 생활하도록 직업도 변경시켜주는것을 보면서도 강건너 불보듯 했다.
명절날이나 생일날 가족들의 모임에 차수정이 참가하는것마저도 달가와하지 않고 안해를 부추겨 그를 끝내 따돌림하였다.
눈치빠르고 예민한 차수정은 이것을 모르지 않았다. 그는 앞뒤가 다르고 기술실무가 낮은 서정관에 대하여 항상 코방귀를 뀌군 하였다.
(기사장한테 나에 대해 별소릴 다 했을테지. … 녀자들이란…)
꿰진 이불에 발가락 걸리듯 그는 요즈음에 와서 송영숙의 존재로 하여 이런저런 걸채임을 느꼈다.
발전은 고사하고 현상유지하기도 조련치 않다는 생각마저 들었다. 그리고 꺼질듯한 한숨이 내불리는것을 어쩔수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