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40 회)

제 2 장

인생의 봄시절은 흘러갔어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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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정의성의 엄한 눈빛을 보고서야 마지못해 몸을 일으켰다. 차수정이 정의성을 찾아와 봄순이가 집에 들어오도록 도와달라고 부탁했다는것을 그는 모르고있었다.

그때부터 아버지는 예전그대로 딸에게 자기의 사랑과 정을 깡그리 쏟아부었다. 새 어머니를 보는 눈길은 무표정이였고 가정의 사소한 일도 봄순이의 의도를 중시하면서 복종할것을 요구하였다.

점차 아버지와 새 어머니사이에 말다툼이 잦아지더니 몇달후엔 차수정이 집에서 아예 나가버렸다.

《난 이제부터 너하구만 살겠다.》

새 어머니가 짐을 꾸려가지고 나가버린 그날 저녁 아버지는 이렇게 말했다. 봄순에게는 그 말이 싫지 않았다.

앞으로 시집을 가더라도 아버지를 꼭 모시고 살겠다고 마음다졌다.

그러나 생활은 결코 바라는대로 흘러가지 않았다.

봄순은 요즈음 생각이 많아졌다.

군사복무를 마치고 가금전문학교를 졸업한 다음 종금직장에서 수리공으로 일하는 진철이라는 청년이 그의 가슴속에 자리잡히기 시작했던것이다.

영예군인부부의 외아들인 진철은 홀아버지에 대한 효성이 지극한 봄순이를 자기의 둘도 없는 배후자로 점찍고있었다.

봄순이도 레스링선수처럼 다부진 체격에 눈빛이 번쩍번쩍하는 이 총각이 싫지 않았다. 그래서 생각이 더 깊어져갔다.

(내가 만약 진철동무를 따라 그의 집으로 간다면 우리 아버지는…)

《너도 이젠 시집갈 나이가 됐으니 어느때든 날아가겠지? 그럼 너의 아버진 일생 고독하게 혼자 살아야 할텐데… 너도 그걸 바라지는 않겠지?》

그의 속마음을 꿰뚫어본듯 방인화가 머리를 다소곳하고 걸음을 옮기는 봄순의 옆얼굴을 쳐다보았다.

봄순은 뭐라고 대답할 말이 떠오르지 않아 상큼상큼 걸음을 옮기면서 신발끝만 내려다보았다.

《참! 너두 아는지 모르겠는데 우리 기사장동지와 보급원엄만 대학동창생이라더라.》

방인화는 무슨 큰 비밀이라도 알아낸듯 목소리까지 죽여가며 말했다.

그러나 봄순은 여전히 대답을 하지 않았다. 기사장과 보급원엄마의 관계에 대해서는 이미 서정옥에게서 다 들었던것이다.

그러나 방인화는 하던 말을 계속하였다.

《기사장동지가 그러는데 보급원엄만 대학때부터 보통 똑똑하지 않구 못하는 재간이 없었다더라. 그리구 마음씨두 고왔대. 그래서 지금 보급원네 집안일에 여간 마음쓰지 않더구나.》

《…》

《사실 보급원엄만 일두 잘하구 달린 자식도 없어서 너의 아버지한텐 적임자야. 그러니 너두 아버지에게 잘 말해라. 네가 말하면 너의 아버지도 싫다구는 안하실게다.》

방인화의 당부에 봄순은 마지못해 머리를 끄덕거렸다. …

지금도 그의 귀전에는 큰어머니의 그 말이 울려왔다.

문득 시험호동에 자주 찾아오는 기사장이 언제인가는 큰어머니처럼 아버지와 보급원엄마에 대한 말을 꺼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땐 뭐라구 대답할가? 내가 잘못했다구 할가?…)

봄순에게는 어쩐지 아버지와 보급원엄마를 갈라놓은 장본인이 자기라는 생각이 들군 하였다.

이제껏 아버지의 운명에 대해서는 생각지 않고 오직 자기의 감정만을 위주로 살았다는 자책감도 들었다. 그래서 아버지에게 새 엄마를 데려오라고 한번도 말하지 않았고 지금처럼 살기를 항상 바랐던것이다.

또한 자기만 있으면 아버지는 더없이 행복해한다고 생각했다.

(오늘은 아버지에게 말해볼가? 보급원엄마를 데려오자구. 그럼 아버지는 뭐라구 하실가? …)

생각에 잠겨 걸음을 옮기던 그는 땅속에서 솟았는지 불쑥 앞에 나타난 진철을 보고 우뚝 멈춰섰다.

《아버지한테 오는 길이요?》

《예.》

(흥! 뻔한걸 물으면서… 헌데 누가 보면 어쩌나? …)

처녀의 눈길은 허둥거렸다. 했으나 진철은 셈평좋게 웃으며 다가섰다.

《아버진 지금 안계시오.》

《어디에… 가셨게요?》

《수의약품 타려구 방역대에 가셨소. 동무가 아버지를 찾아다닐것같아서 내 지금 기다리고있었지.》

진철은 무슨 큰일이나 도와나선것처럼 동가슴을 내밀며 우쭐해서 말했다.

봄순은 귀뿌리가 달아오르는것을 느끼며 몸을 옹송그렸다.

그는 빨리 이 자리를 벗어나고싶었다.

눈빛이 번쩍거리고 목청이 높은 그앞에 서면 괜히 가슴만 활랑거리였다.

《저… 이걸 아버지에게 전해주세요. 난 빨리… 돌아가야 해요.》

봄순은 머밋머밋하며 꾸레미를 내밀었다.

《조금 있으면 오실텐데…》

진철은 서운한 기색으로 꾸레미를 받아들며 정문쪽을 쳐다보았다.

처녀가 선자리에서 돌아설줄 알았으면 방역대니 뭐니 하는 말을 꺼내지 않았을걸 하는 생각이 들었다. 이제라도 수의사가 나타나주었으면 하고 다시금 정문쪽을 쳐다보았다.

그럴수록 처녀는 더욱더 조바심을 쳤다.

《우리 호동에서 날 기다릴거예요. 그럼 난…》

봄순은 홱 돌아섰다. 얌전스레 어깨우에 드리워졌던 머리태가 춤추듯 흔들렸다. 어느새 봄순은 놀란 토끼처럼 깡충거리며 호동사이로 사라져버렸다.

진철은 허구픈듯 씨물 웃고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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