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48 회)

제 2 장

인생의 봄시절은 흘러갔어도

9

(2)

 

그러나 어머니는 역시 어머니였다.

《네가 정말 그 처녀와 헤여질수 없다면 처녀더러 여기에 오라구 하려무나. 그럼 될게 아니냐?》

어머니가 내놓은 타협안에 정의성은 그 어떤 대꾸도 못하였다.

(영숙동문 결코 닭공장을 떠나지 않을것이다. 그렇다면…)

정의성의 입에서는 또다시 한숨이 새여나왔다. 낮이나 밤이나 자기를 애타게 기다리고있을 송영숙의 모습은 순간도 눈앞에서 사라지지 않았다.

며칠후 그는 합성제약공장 기사로 일하는 맏형의 집으로 갔다.

어릴 때에는 아버지보다 더 어려워했었지만 지금은 어느 형제보다 더 살뜰하고 다정한 맏형이였다.

《오! 우리 셋째가 왔구나. 그래 연구사업은 잘되겠지?》

맏형은 크고 어질어보이는 눈으로 동생을 반겨맞아주었다.

《참! 좋은 처녀들이 많이 나선다던데 장가는 언제 가겠니?》

《글쎄 아직은… 요즘엔 생각이 많아서…》

맏형의 물음에 정의성은 어릴적처럼 약간 응석기어린 투로 떠듬거렸다.

《잘 왔다. 복잡할 땐 환경을 바꾸면서 생각을 정립해야지. 오늘 밤은 우리 집에서 자면서 나와 얘기나 하자.》

그는 옷을 활활 벗어걸더니 속옷차림에 꽃무늬앞치마를 둘렀다.

맏형의 차림새를 보고 정의성은 싱긋 웃었다.

《저녁을 짓자구요? 그만두라요. 형수가 들어와 할텐데…》

그의 말에 맏형은 머리를 저었다.

《우리 집은 주부가 바뀐셈이다. 때식은 거의 내가 하니까.》

《때식을 형님이 다 한다구요?》

정의성은 큰소리로 물었다. 그리고 생각하였다. 구역인민병원 기술부원장을 하는 형수는 무슨 큰일을 한다고 남편에게 때식까지 떠맡긴단 말인가. 그는 사내처럼 허우대가 크고 이목구비가 큼직큼직한 형수를 눈앞에 세워놓고 마음속으로 불만을 표시했다.

그의 속마음을 읽은듯 맏형은 껄껄 소리내여 웃었다.

《어쩌겠니? 집사람 하는 일을 내가 잘 도와야지.》

이때 전화종소리가 울렸다. 부엌으로 내려가던 맏형이 다시 올라와 송수화기를 들었다.

《나요. … 방금 들어오는 길이요.》

통화하는걸 들으니 형수가 걸어온 전화였다.

《참, 여기 셋째가 왔소. 요즘 이렇게 저렇게 생각이 많으니 날 찾아왔구만. 오늘은 좀… 오늘 또? … 알겠소, 알겠다니까. …》

맏형은 시큰둥한 얼굴로 송수화기를 내려놓았다.

《그저 늘쌍 이렇다. 오늘두 급한 환자가 생겨서 못들어온다질 않겠니? 그저 병원에서 살다싶이한다.》

그는 어깨를 구부정하고 부엌으로 내려갔다. 맏형은 녀인들 못지 않게 부엌일을 잘했다. 랭동기에서 꺼낸 물고기도 척척 잘 손질했고 기름냄새를 풍기며 양념장도 제법 잘 만들었다.

정의성은 부엌에서 오락가락하는 맏형을 오래동안 지켜보았다. 입에서 절로 한숨이 새여나왔다. 남자가 한생 어떻게 저렇게 살랴 하는 막연한 생각이 솟구쳐올랐다.

날이 어두워지자 학교에 다니는 조카들이 들어왔다. 두 애가 다 학교 축구소조에 다니는 벌찬 사내들이다. 한창 자라는 그 애들은 집에 들어서기 바쁘게 배고프다면서 저녁밥부터 찾았다.

맏형은 한발 먼저 들어온 작은것의 입에 삶은 닭알 한알을 물려주었다.

《나두!》

뒤따라 들어온 큰애도 부엌문가에 서서 입을 쩍 벌렸다.

동생처럼 닭알 한알을 닁큼 삼키고서야 그 애도 집안에 들어왔다.

아이들은 오래간만에 찾아온 삼촌에게 반갑다고 매여달렸다.

얼마후 맏형은 두 애를 부엌으로 불러내였다. 그리고는 밥꾸레미를 들려주면서 병원에 가져다주라고 일렀다.

《어머니한테 빨리 저녁을 가져다주어라. 돌아와서 우리두 밥먹자.》

조카애들도 이제는 그 생활이 례사로운지 군말없이 집을 나섰다. 조카애들이 돌아온것은 저녁시간이 퍼그나 지나서였다. 자식들이 빈 밥곽을 들고 돌아온 다음에야 맏형은 저녁상을 들여왔다.

맏형의 성의가 담겨진 저녁상이였지만 정의성에게는 도무지 수저가 가볍지 않았다. 밥상에서 물러앉기 바쁘게 조카애들은 졸음에 몰려 방바닥에서 딩굴며 꿈나라로 갔다.

저녁상을 거두고 올라온 맏형과 나란히 누운 정의성은 온밤 잠들수 없었다. 그에겐 어쩐지 맏형이 측은하기 그지없었다.

안해의 보살핌이나 공대는 고사하고 안해의 뒤받침을 하느라 두손이 마를새 없는 맏형이였다.

(…다른 가정들에서는 안해가 남편과 자식들을 돌봐주고있는데 맏형네는 그와 반대로구나. 결국 세명의 남자가 안해이며 어머니인 녀자 한명을 떠받들고있는셈이 아닌가. …)

맏형네의 류다른 생활을 헤쳐볼수록 생각은 깊어졌다.

그에게는 합성제약공장 기사인 맏형이 지금껏 그 어떤 사업성과가 없이 평범하게 생활하는것 모두가 가정적부담때문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송영숙에 대한 생각으로 머리가 복잡한 정의성에게 있어서 맏형네의 생활은 류다른 생각을 불러일으켰다.

그리고 지금껏 느끼지 못했던 많은것을 새롭게 깨닫도록 해주었다.

(사업과 생활에서 성공한 사람들은 모두가 헌신적인 안해나 남편의 뒤받침이 있었기때문이다. …

나에게도 삶의 목표가 있다. 가금학계의 거목이 되려는 나의 결심은 오늘도 변함이 없다. 하다면 영숙동무한테서 그런 헌신성을 기대할수 있을가? …)

그날 밤 정의성은 처음으로 송영숙을 제3자의 눈으로 랭정하게 투시해보았다.

송영숙은 물론 뭇사람들의 눈길을 모을만 한 훌륭한 처녀였다.

그리고 남다르게 열정적이였고 뛰여나게 총명하였다.

정의성은 송영숙이 언젠가는 우리 나라 가금학계에 단단히 한몫을 하는 과학자가 되리라는것을 믿어의심치 않았다.

(그러자면 영숙동무에게도 반드시 헌신적인 방조자가 필요하다. … 하다면 내가 과연 그런 헌신적인 남편이 될수 있단 말인가. …)

그는 자기를 맏형의 위치에 세워보다가 우뚤 놀랐다. 그는 설레설레 머리를 저었다.

(아니, 아니, 난 하루도 그렇게는 못살아! 그렇게는 절대로…)

문득 눈앞에 《우리 함께 공동연구를 하는게 어때요?》하고 묻던 송영숙의 빛나는 눈빛과 청맑은 목소리가 떠올랐다.

《우리 두사람의 지혜를 합친다면 하나의 크고 훌륭한 열매를 딸게 아니나요? …》하고 즐겁게 말하던 처녀…

그날 송영숙의 얼굴에는 얼마나 큰 기대와 믿음 그리고 희망과 열정이 가득차있었던가.

사실 송영숙의 물음은 정의성의 마음을 흔들어놓았었다.

 

되돌이
감 상 글 쓰 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