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49 회)

제 2 장

인생의 봄시절은 흘러갔어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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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두뇌가 총명하고 열정적인 그와 지혜와 힘을 합친다면 학계의 주목을 끌수 있는 크고 멋진 열매를 거두게 되리라는 믿음이 앞섰던것이다.

하지만 곧 타산하였다.

(두 머리에 하나의 월계관을 씌울수 없다! 물론 《우리의것》도 귀중하다. 하지만 나에게는 《우리의것》보다 《나의것》이 더 귀중하다. …)

정의성은 송영숙의 얼굴을 그려보며 《우리… 우리…》하고 조용히 입속말로 중얼거렸다. 그리고 송영숙이 그토록 정을 담아, 사랑담아 표현하군 하던 그 《우리》와 《나》를 저울에 달아보았다.

며칠동안을 두고 반복하였지만 놀랍게도 저울추는 《우리》가 아니라 《나》쪽으로 더 기울어졌다.

그럴 때마다 정의성은 랭정해지는 마음과 함께 야릇한 아픔을 동시에 느끼군 하였다.

처녀에 대한 그리운 정이 리성을 상대로 모질게 싸우고있었던것이다.

정의성은 사무치는 정에 겨워 몸부림치듯 머리를 저었다.

《아니다! 난 그와 헤여져 살수 없어! 헤여져선 못살겠어!》

그는 항변하듯 혼자서 중얼거렸다. 그 누구인가에 대해서 억울하게 생각되기도 하였고 저주를 퍼붓고싶기도 한 심정이였다.

그러나 《우리의것》이 아니라 《나의것》에 대한 미련을 완전히 털어버릴수는 없었다.

리성은 끝내 그의 마음속의 연연한 감정을 타승하고 《나의것》을 선택하게 했다.

정의성은 드디여 책상앞에 마주앉았다. 송영숙에게 편지를 쓰려는것이였다. 그는 무겁게 펜을 움직였다. 그러나 글줄이 잘 엮어지지 않아서 다시 쓰기를 그 몇번… 차마 보내기가 서슴어져 체신소앞에서 돌아서기를 그 몇번…

하지만 편지는 끝내 우편함속에 넣어졌다.

(아! 날아가버린 아름다운 새! 영영 잃어버린 진주보석! …)

그때로부터 며칠이 지난 어느날 연구소에서 들어오니 어머니는 무역회사 경리원처녀네 집에서 방금 또 전화가 왔는데 어떻게 하면 좋은가고 푸념조로 물었다.

정의성은 신경질적으로 말을 내뱉았다.

《그 처년 싫어요. 그리구 난… 지금이 좋아요.》

《지금이 좋다구? 그래, 지금이 좋으면 도대체 어쩐다는거냐, 응?》

어머니는 도무지 갈피를 잡을수 없는지 미간을 모았다.

《나도 모르겠어요.》

정의성은 어머니의 눈길을 외면하며 웃방으로 씽 올라갔다.

송영숙의 문제와 함께 무역회사 경리원처녀의 문제도 이미 마음속으로 결산해버린 그였다.

손끝이 뾰족하고 실피줄까지 들여다보일만큼 해말쑥한 경리원처녀도 역시 정의성이 바라는 헌신적인 녀성으로는 적합치 않았다. 움속의 감자싹처럼 희다못해 창백해보이는 그 처녀는 한가정의 짐만이 아니라 자기자신도 감당할수 없으리만치 연약해보였던것이다.

그렇다고 맏형처럼 자기가 대신 그 짐을 짊어질수는 더욱 없었다.

정의성이 지배인이 된 송영숙의 소식을 들은것은 그때로부터 몇년후였다.

그날 아침 연구소에 출근하기 위해 뻐스정류소에 나왔던 그는 우연히 차수정을 만났다.

그는 오래간만에 만난 수정을 반갑게 마주보며 그동안의 안부를 물었다. 수정이 오리공장 기능공학교에서 교원생활을 하는것으로 알고있던 그는 도출판물관리국에 출장왔다는 말을 듣고 은근히 놀라기까지 했다.

의혹이 담겨진 그의 눈길앞에서 수정은 잠시 머뭇거렸다.

이윽고 그는 방긋이 웃는 얼굴로 물었다.

《저… 영숙동무 소식을 들었어요?》

그만에야 정의성은 얼굴이 화끈 달아오름을 느꼈다. 다른 누구도 아닌 수정에게서 송영숙의 말을 듣는것이 무안하기 그지없었다. 그를 마주볼 용기가 나지 않아 눈길마저 떨구었다.

《영숙인 얼마전에 닭공장 지배인이 됐어요. 지난해엔 새로운 고려식물성성장촉진제를 연구하고 생산에 도입해서 학위를 받았구요.》

《?!》

예상 못했던 소식앞에서 정의성은 눈을 흡떴다.

그럴수록 수정의 입가엔 방실방실 고운 꽃이 그려졌다.

《어디 그뿐인줄 알아요? 올봄엔 결혼까지 했어요. 제대군인에 대학을 졸업한 총각하구 말이예요. 아유! 얼마나 잘생긴 사람인지 몰라요. 안팎으루 멋쟁이미남자더군요. 나두 결혼식에 갔더랬는데, 야! … 정말 굉장했어요. 참! 그의 남편은 올해중에 중앙기관으로 소환된댔어요. 영숙인 참말 세상에 부러운것 없이 행복할거예요. 말그대로 성공한 인생이지요 뭐.》

차수정은 정의성의 눈앞에 다정한 녀동무의 눈부신 성공과 행복상을 방불하게 그려보였다.

정의성의 입안은 바짝 말라들었다.

《…》

《그래 정동문 결혼했나요?》

차수정은 련속타격을 결심한듯 이렇게 물었다.

정의성은 눈길을 떨구며 머리를 저었다. 그저 이 자리를 빨리 벗어나고싶었다. 그러나 수정은…

《아직두요? 아이참! 무슨 큰일하기에 아직두 결혼하지 않았나요? 예? 자꾸만 좋은 처녀를 고르는게지요?》

수정은 놀라움을 감추지 않았다. 그리고 얄미울 정도로 머리를 갸웃거렸다.

정의성은 쑥스러운 얼굴에 시무룩한 웃음을 담았다.

《그런건 아니지만… 어떻든 하는 일없이 지각생이 됐구만.》

그의 말에 수정은 동정하듯 머리를 까딱거렸다.

그날 수정과 헤여진 정의성은 뻐스를 단념하고 걸어서 연구소까지 갔다.

그리고 온종일 뼈저린 후회로 몸부림쳤다.

(모든걸 다시 시작할수는 없을가? … 지나간 생활을 다시 이어갈수는 없을가? …)

그때로부터 몇달이 지난 어느날이였다.

현지실험을 위해 도목장관리국에 갔던 정의성은 정문앞에서 뜻밖에도 송영숙을 보았다. 정의성은 꿈을 꾸는것같았다.

그는 반가운 마음으로 그에게 다가갔다.

《영숙동무! 오래간만이구만. 난 동무를 만나고싶었소.》

그 어떤 강렬한 충동으로 그의 목소리는 떨리기까지 하였다. 송영숙에게 하고싶은 말이 많았다. 지배인이 되고 학위를 받은것도, 결혼을 한것도 모두 축하해주고싶었고 죄스러운 마음도 다 털어놓고싶었다.

그러나 송영숙의 눈빛은 싸늘했다. 그는 낯선 사람을 만난듯 크고 검은 눈동자로 정의성을 곧추 쳐다보았다.

《나를요? 난 동무를 만날 일이 없어요.》

그는 크지 않은 목소리로 한마디 내던졌다.

이때 까만색승용차가 미끄러지듯 그의 옆으로 다가왔다.

송영숙은 승용차에 올랐다. 정의성의 귀뺨을 후려치듯 《탕!》 소리를 내며 닫기던 문! 멸시와 조소가 담겨진 그의 검은 눈동자인듯 차체를 반짝이며 미끄러져가던 까만색승용차… 그때 일을 돌이켜보던 정의성의 입에서는 저도 모르게 신음소리가 새여나왔다. 뼈아픈 그 시절을 덮어버리듯 펼쳐놓았던 실험일지를 소리나게 덮어버렸지만 그에 도전하듯 송영숙의 검은 눈동자는 아프게 그의 가슴을 찌르며 육박해왔다.

정의성은 아픔을 잊으려는듯 두눈을 꼭 감았다.

(그렇다! 나는 어제도 오늘도 그의 용서를 바랄수 없다! 몇백마디 말로써도 죄를 씻을수 없다.

오로지, 그렇다! 오로지 첨가제연구에서 성공하는것으로써 그앞에 사죄해야 한다. 성공만이 나를 변호해줄것이다. …)

이윽고 그는 실험자료를 다시 펼쳐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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