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56 회)

제 2 장

파도소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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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모스크바의 밤은 고요하게 깊어간다.

《모스크바교외의 밤》이라는 이 나라의 유명한 노래가사에도 있는것처럼 풀잎마저 잠들어 버린듯싶은 밤이다.

귀국을 하루 앞두고 설레이는 마음을 진정할수가 없어 끝내 잠을 이루지 못한 두 장령은 간편하게 사복을 갈아입고 호텔을 나섰다.

모스크바에서 열린 국제군사과학연구토론회에 참가했던 김일성군사대학 부총장 김순일과 뽈스까의 발뜨해연안에서 진행된 와르샤와조약기구국가 군대들의 해상합동군사연습을 참관하고 오늘 오후에 최현과 함께 비행기로 이곳에 도착한 리철봉이였다. 딱히 목적지를 정하고 나온 걸음이 아니여서 두사람은 어둠속에서 제일 환하게 눈에 띄우는 쓰빠쓰끼탑의 대형시계쪽으로 방향을 잡고 모스크바강기슭을 따라 걷기 시작하였다.

리철봉이 조국을 떠나온지도 벌써 보름이 가까와온다. 그리 오랜 나날도 아니였는데 못견디게 조국이 그리워진다.

인간에게 있어서 조국이란 결코 태여나서 처음으로 눈에 익힌 고장이거나 오래동안 살면서 정을 붙인 땅이여서만 귀중한것이 아닌듯싶다.

이역땅에서 태여나 어린시절을 보낸 철봉이였지만 해방직후 처음 조국으로 나왔을 때는 두고 온 고장이 지금처럼 그립지 않았다.

낯설은 조국이 낯익은 이국보다 더 빨리, 더 깊이 정이 들었던것은 무엇때문이였던가. …

자기뿐이 아니다. 최현민족보위상도 하루빨리 귀국하고싶어서 몸살을 앓았다. 오늘도 모스크바에 도착하자마자 곧장 비행기를 갈아타고 떠나자고 하였는데 쏘련국방상의 초청으로 어쩔수없이 하루밤을 묵게 되였다. 민족보위상이라는 직책은 제쳐놓고라도 유명한 조선빨찌산을 선자리에서 돌려보낼수 없다고 하면서 국방상이 직접 수많은 장령들을 대동하고 비행장에 나오는 바람에 어쩔수없이 발목을 잡히였던것이다.

이번 군사연습때도 수많은 나라의 국방상들과 군사령관들이 최현에게 깊은 관심과 류다른 존경을 표시하였다.

사회주의진영에서 유일하게 두차례의 혁명전쟁을 승리적으로 결속하고 한 세대에 두 제국주의를 때려부신 강철의 령장 김일성원수님에 대한 존경과 흠모는 그이께서 령도하신 항일빨찌산출신의 로장이며 이름있는 군사지휘관인 최현에게 특별한 환대와 정중한 례의를 표하는것으로 나타났다.

연습이 진행되는 장소에 우리 대표단이 도착하자 와르샤와조약기구의 고위지휘관이 직접 마중나와 이 조약기구의 참가국들에서 온 국방상들만 앉게 되여있는 특별초대석으로 안내하였고 최현에게는 연습과정을 해설할 두명의 군관과 조선어통역원까지 따로 배석하였다. 늘 중심에서 판을 치던 쏘련군장령들도 모두 뒤자리에 물러나 정중한 거수경례로써 이 백전로장을 맞이하였다. 환대는 극진하였지만 어쩐지 최현자신은 몹시 언짢은 기색이였다. 리철봉은 그것이 연습의 방대한 규모와 현대적인 무장장비들에 대한 어떤 질투비슷한 감정으로부터 산생된 불쾌감이 아니겠는가 하고 제나름으로 생각했었다. 리철봉자신의 심정이 그러했다.

거대한 대규모함선집단을 주축으로 하여 각종 미싸일들을 즐비하게 탑재한 전투함들, 발전된 전파탐지수단들과 대구경함포들을 장비한 각양각색의 함선들이 수십척이나 동원된 연습은 우리 해군에 비할바가 아니였다.

제정된 침로를 따라 서서히 기동하는 함대를 가리켜보이며 매 함선들의 공격제원과 전투능력, 그 전술적특성과 화력배치체계에 대하여 해설하는 와르샤와조약기구 군관들의 얼굴에도 거만에 가까운 자부와 월등감이 번들거렸다. 호박물부리를 쥔 손으로 약간 모로 기울인 얼굴을 고이고앉아 찌푸둥한 시선을 푸른 바다우에 던지고있던 최현이 한참만에야 뒤전에 서있던 통역을 불렀다.

《이 군사연습의 정확한 명칭이 무엇인가고 좀 물어봐주게.》

통역원이 곁에 선 군관들과 무엇인가 수군거리더니 약간 서투른 조선어로 또박또박 대답하였다.

《이 군사연습의 명칭은 와르샤와조약기구국가 군대들의 해상합동군사연습이라고 합니다.》

《합동군사연습이라…》

최현이 이번에는 통역원을 바라보지 않고 혼자소리로 중얼거렸다.

《그러니까 전시회나 열병식은 아닌데…》

두 군관이 통역원에게 앞에 앉은 조선인민군 민족보위상이 무엇이라고 했는가고 조심스럽게 물었다. 통역원은 최현의 입속말을 제대로 가려듣지 못했는지 매우 어줍은 기색으로 실례를 구하였다.

《미안하지만 군사연습의 명칭에 어떤 의견이라도…》

미끈한 선체들을 뽐내며 바다우를 미끄러져가는 전투함선들에서 부러운 눈길을 떼지 못하고있던 리철봉은 바싹 긴장한 마음으로 최현과 통역원, 뒤에 선 두 군관을 번갈아보았다.

최현은 빈 호박물주리를 들어 앞을 가리켰다.

《어째 덩지 큰 함선들이 열병식을 하는것처럼 줄줄 지나가기만 하오? 명칭이 군사연습이라는데 포 한방 쏘는것이 없으니 이거야 맨숭맨숭하지 않소? 무슨 미싸일의 위력이 어떠니, 사거리가 어떠니 하고 자랑은 좋은데 백번 듣는것보다 한번 보는게 낫지 않겠소?》

통역이 재빨리 최현의 말을 전달하였다. 그제서야 뒤에 섰던 해설자들이 알만한듯이 고개를 끄덕이며 긴장했던 얼굴에 웃음을 피워올리였다.

이윽고 그들의 대답이 통역되였다.

《우리 와르샤와조약기구는 이 발뜨해에서 나토군과 대치하고있습니다. 어떠한 우발적인 군사적행동도 상대방의 오해와 충돌을 일으킬수 있으므로 실탄사격은 예견하지 않았습니다. 쏘련공산당이 내놓은 세가지 평화전략에 따라 우리 와르샤와조약기구의 모든 전쟁수행능력은 철저히 전쟁억제력으로서만 유지되고있습니다. 혹 미흡한 점이 있더라도 이런 사정을 고려해주셨으면 합니다.》

최현은 의자등받이에 몸을 깊숙이 묻으며 심드렁히 대꾸하였다.

《고려야 무슨… 손님이야 주인이 차린것만큼 먹는거지.》

최현의 말을 곧이곧대로 옮겨놓던 통역원도 그 말만은 자기 사람들에게 그대로 번역하기가 무참했던지 약간 주춤거리는 기색이였다.

종합대학시절에 로어를 어지간히 습득한 리철봉은 잠시후에 통역원이 두 군관에게 하는 말을 똑똑히 알아들었다.

《손님으로서 주인들의 심정을 충분히 리해한다고 합니다.》

그 말을 귀결에 흘려들으며 다시 먼바다에로 시선을 옮긴 리철봉은 어쩐지 지금까지 거대하고 무시무시하게 느껴지던 전투함선들과 현대적무장장비들이 졸지에 무맥하게 느껴졌다. 이 순간 리철봉의 머리속에는 하나의 화폭과도 같은 형상이 떠올랐는데 그것은 송곳이를 번뜩이며 허리를 웅크린 재빛승냥이와 그앞으로 한가롭게 풀을 뜯으며 지나가는 살진 들소였다. 묵직한 체구를 든든히 뻗친 실한 네다리와 기름진 살거죽밑에서 울뚝거리는 근육, 바위돌이라도 모래알처럼 바수어버릴것같은 커다란 발통과 머리우에 솟구친 멋스러운 뿔…

그러나 이제 풀숲에 도사린 재빛승냥이가 발톱으로 땅을 할퀴며 뛰여나오고 저 유들유들한 들소의 목에 사나운 맹수의 송곳이가 박힐 때 든든한 다리와 우직한 근육, 무쇠덩이같은 발통과 멋스러운 뿔은 어디에 소용될것인가. 최현민족보위상이 그들의 정통을 찔렀다. 자기들이 마주한 적들을 《상대방》이라고 표현하는 그들의 어조만 보더라도 계급적자각은 고사하고 초보적인 군대의 본태조차 느낄수 없지 않은가. 정치가들의 책갈피속에 아무리 《세가지 평화전략》이 들어있다고 해도 총을 쥔 군대가 그렇게까지 해이될수 있단 말인가.

와르샤와에서 있었던 일을 상기하느라니 어쩐지 류다른 정서를 불러일으키는 모스크바강기슭의 고즈넉한 야경도 야릇한 불쾌감을 일으키는것같았다. 제국주의와의 대결장에 서있는 군대의 전투정신까지도 고요한 달빛아래 풀잎처럼 잠들고있는것은 아닌지.

《무슨 생각을 그렇게 깊이 하오? 나는 좀 뚝바우라는 말을 듣는 편인데 철봉동무도 어지간하구만.》

곁에서 걷던 김순일이 침묵을 더 참아내지 못하고 말을 걸어왔다.

리철봉이 군사대학 재강습시절에 김순일에게 두어번 강의를 받은적이 있어 그들은 서로 사제간이라고도 할수 있었으나 얼굴을 맞대고 앉아 이야기를 나눈것은 보름전 비행기를 타고 모스크바까지 온 하루나절뿐이였다. 그때 김순일은 《조국해방전쟁에서 이룩된 승리의 요인과 산악전에서 나서는 몇가지 문제》라는 제목으로 국제군사과학연구토론회에서 토론을 하게 된다고 하였다.

《연구토론회는 잘되였습니까?》

리철봉은 말머리를 김순일에게로 돌려놓았다. 말을 해보았대야 대국이라고 하는 나라에서 받은 불유쾌한 인상뿐인데 남의 나라땅을 밟고 걸으면서 그에 대한 비난을 한다는것이 어쩐지 마음에 내키지 않아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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