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59 회)

제 3 장

열매는 어떻게 무르익는가

3

(2)

 

《자! 우리도 이젠 들어가기요.》

지배인의 말에 송영숙은 생각에서 깨여났다.

그는 뒤쪽으로 돌아섰다.

누런색깃털을 댄 두툼한 솜옷에 털모자를 눌러쓴 지배인이 묵직한 걸음으로 승용차쪽으로 걸어갔다.

송영숙은 감탕이 묻었던 솜옷 앞자락을 털며 지배인의 뒤를 따랐다.

그들은 승용차를 타고 공장마을로 돌아와 각기 자기 집으로 헤여져갔다.

아침부터 호수가에 나가 감탕파기현장을 돌아보면서 사람들의 일손을 도와준 송영숙은 여느때없이 시장기를 느끼며 집마당에 들어섰다.

집에 들어선 그는 어머니를 찾았다. 그런데 빈집이였다.

집짐승우리에 나갔는가 하여 마당가를 둘러보는데 그제야 대문을 열고 어머니가 들어왔다. 뒤따라 남편도 집에 들어섰다.

《어디 갔댔어요?》

송영숙은 부엌에 들어서는 어머니에게 물었다. 문춘실은 여느때없이 활기띤 얼굴이였다.

《점심시간전에 한바퀴 돌았다.》

그는 들고있던 그릇들을 내려놓으며 지배인과 당비서네 집에도 갔다오고 수정이한테도 들려온다고 하였다.

《?!》

남편의 솜옷을 받아서 옷걸개에 걸던 송영숙은 의아한 눈빛으로 돌아보았다.

딸과 사위의 얼굴을 보며 문춘실은 자랑스럽게 말했다.

《오늘이 작은보름날 아니요? 그래서 농마국수를 노나주구 오네.》

어머니의 대답을 듣고서야 송영숙은 남편과 눈길을 맞추고 웃음지었다.

그러구보니 래일은 정월대보름날이였다.

한해중에서 제일 크고 밝은 달이 떠오른다는 민속명절날이다.

사실 문춘실은 정월대보름날 뿐아니라 설명절과 한가위와 동지날을 비롯한 민속명절을 언제한번 스쳐보낸적이 없었다.

그는 두 딸에게 어릴 때부터 우리 민족이 창조하여온 민속명절과 민속놀이 그리고 지방의 풍습에 대해서 옛말처럼 들려주군 했었다. 그리고 풍습대로 여러가지 민족음식을 해놓고 동네사람들과 함께 나누는것을 하나의 큰 기쁨으로 여기고있었다.

《지배인네구 당비서네구 안사람들이 직장일루 바쁘게 뛰여다니느라 언제 농마국수 생각 했겠니? 수정이두 그렇지. 내 그래서…》

문춘실은 자기가 하는 일이 지극히 당연한듯 말했다.

송영숙은 닭공장마을에서도 언제나 이웃들과 따뜻한 정을 나누며 화목하게 사는 어머니를 존경의 마음으로 대하였다.

《에구, 시장들 할텐데…》

문춘실은 서둘러 부엌으로 내려갔다.

잠시후 그는 밥상을 펴고 마주앉은 딸과 사위에게 감자농마국수를 올려보냈다. 닭고기와 도라지무침, 버섯볶음을 얹고 실고추며 닭알로 고명하여 놋쟁반에 담은 국수는 첫눈에도 부쩍 구미를 돋구었다.

《하! 이거 눈맛이 입맛이라구 보기만 해두 군침이 도는군요.》

백상익은 싱글벙글 웃으며 놋쟁반을 받아들었다.

매운것을 좋아하는 그는 빨간 고추가루양념과 겨자장을 듬뿍 덧놓았다. 그런 다음 양념이 고루 섞이게 두손에 저가락을 갈라쥐고 국수사리를 뒤척이였다. 그리고는 발이 긴 국수를 떠올려 후룩후룩 맛있게 먹기 시작하였다. 국수라면 농마국수든 강냉이국수든 하루 세끼라도 싫어하지 않는 그였다.

남편의 모습을 건너다보는 송영숙의 입안에서도 스르르 군침이 흘렀다.

그는 부엌에서 올라온 어머니와 함께 국수를 먹기 시작했다.

발이 가늘고 질기면서도 매끌매끌한 농마국수는 참으로 별맛이였다.

국수라면 아예 두손을 내젓군 하던 송영숙이지만 어머니가 말아주는 이 농마국수만은 사양하지 않았다.

딸, 사위 모두가 맛있게 국수를 먹는것을 지켜보는 문춘실의 주름많은 얼굴엔 흐뭇한 웃음이 넘실거렸다. 그는 사위가 그릇을 내자 얼른 덧국수를 가져다가 그앞에 밀어놓아주었다.

《더 하라구. 이 농마국수를 많이 먹어야 국수발처럼 오래오래 산다누만.》

가시어머니의 권고를 백상익은 사양않고 받았다. 덧국수까지 맛있게 먹고난 그는 밥상에서 물러앉으며 물었다.

《래일은 또 오곡밥을 하겠지요?》

문춘실은 머리를 끄덕였다. 그는 약간 뻐기는듯한 어조로 말했다.

《여부있나? 오곡밥두 하구 약밥두 하구 복쌈도 해먹어야지.》

백상익의 얼굴은 더욱더 밝아졌다.

구기자를 넣어서 가시어머니가 손수 담근 약술을 생각하니 벌써부터 구미가 당겼다. 그는 즐거운김에 《우리 집엔 그저 어머니가 보배라니까요.》하며 가시어머니를 춰올렸다.

사위의 칭찬은 문춘실의 불같은 성미에 부채질을 하였다.

국수그릇을 다 거둔 다음 그는 조금도 쉬지 않고 바삐 돌아갔다. 대보름날음식감을 미리 준비하려는것이였다.

부엌창고에 들어간 그는 찹쌀자루며 말린 밤과 대추 그리고 잣을 담아놓은 바구니를 아름벌게 안고나왔다.

찰밥에 꿀과 참기름, 밤과 대추, 잣을 골고루 섞어서 시루에 쪄낸 약밥은 딸과 사위가 특별히 좋아하는 음식이다.

음식감들을 하나하나 살펴보던 그는 다시 창고에 들어갔다.

이윽고 고사리며 버섯, 가지와 고추잎을 비롯한 말린 나물들을 꾸레미채로 안고 나왔다.

정월대보름날에는 오곡밥이나 약밥과 함께 아홉가지 마른 나물로 반찬을 해먹는 풍습이 있다.

벽찬장우에 차곡차곡 가려놓았던 크고작은 그릇들을 내리워 거기에 말린 나물들을 따로따로 담아놓은 문춘실은 몇번이고 가지수를 꼽아보았다. 틀림없이 아홉가지였다.

말린 나물을 끓는 물에 데쳐내야겠다고 생각하며 가마앞에 다가앉던 그는 철썩 무릎을 쳤다. 부름깨기라고 달맞이구경을 하면서 먹는다는 엿이나 강정 생각을 감감 잊고있었다는 생각이 들었던것이다. 다시 창고에 들어가던 문춘실은 문턱에서 주춤했다.

(작년엔 콩강정을 했더랬는데 금년엔…)

잠시 이것저것 궁리하던 그는 닦은 참깨로 강정을 만들면 외손녀가 좋아할거라고 생각하였다. 창고에 들어가 여기저기 뒤적거리던 그는 콩마대옆에 놓인 크지 않은 참깨자루를 끄집어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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