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60 회)
제 3 장
열매는 어떻게 무르익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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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닭공장마을을 떠나 이곳으로 이사해와서 처음으로 맞이하는 올해 정월대보름날을 여느때보다 더 뜻깊고 즐겁게 맞이하리라 며칠전부터 별러왔었다.
특히 달맞이를 잘해야겠다는것이 그의 남모르는 생각이였다.
예로부터 사람들은 정월대보름날 떠오르는 둥근달을 바라보면서 마음속 소원을 말하면 그 소원이 이루어진다고 했었다.
그리고 그해에 보름달을 먼저 본 총각에게는 그 달처럼 얼굴곱고 마음씨 고운 처녀를 만나 백년가약을 맺는 기쁜 일이 생기고 처녀에게는 용감하고 억센 총각이 나선다고 하였다.
지금 문춘실의 마음속에 간직되여있는 남모르는 소원이란 딸이 떡돌같은 아들을 낳는것이였다.
사실 그는 송영숙이 첫 아이를 낳았을 때 사위앞에 미안하기 그지없었다. 아들이 아니라 딸을 낳았기때문이였다. 맏딸은 금딸이라고 곁에서들 말했지만 문춘실의 생각은 달랐다. 말은 하지 않아도 사위가 마음속으로나마 딸만 둘씩 낳은 가시어머니를 닮아 안해도 딸을 낳았다고 섭섭하게 생각할것같아서였다. 그러니 이번에라도 아들을 낳으면 얼마나 좋으랴. …
문춘실은 래일 저녁엔 만사를 젖혀놓고 선참으로 떠오르는 보름달을 쳐다보면서 자기의 소원을 말하리라 마음다지였다. 그는 부지런히 음식감준비를 서둘렀다.
문득 그의 눈앞에는 어릴적에 어머니와 함께 달구경을 하던 일이 떠올랐다.
그때 예닐곱살이던 문춘실은 어머니의 손을 잡고 마을앞 시내가에 나가 돌다리며 웃켠 나무다리를 건너가고 건너오면서 휘영청 밝은 보름달을 바라보았다.
돌배나무집 장난꾸러기 갑돌이와 물방아집 개똥쇠는 온종일 연띄우기를 하면서 동네아이들과 함께 뛰여다녔다.
그러나 얌전한 계집애에게는 닦은 콩을 깨물며 돌다리를 건느는것이 더 재미났다. 그는 엄마보다 앞서서 깡충깡충 토끼처럼 돌다리를 건넜다.
자기를 보고 금쟁반같은 달속에서 두귀를 쫑긋 세운 별나라 옥토끼는 더욱더 신바람이 나서 절구질을 하였다. 그러나 몇번 다리를 건넜더니 힘이 들고 처음처럼 재미나지도 않았다.
《엄마! 힘들어. 이젠 집에 들어갈래.》
계집애는 돌우에 탈싹 주저앉았다.
낮에는 밭김매고 밤에는 전선원호로 드바삐 뛰여다니던 어머니는 웃는 얼굴로 딸애의 머리를 다정히 쓰다듬어주었다.
《얘야! 대보름날 열두다리밟기를 해야 1년 열두달 복이 온단다. 그래야 전선에 나간 너의 아버지도 미국놈을 몽땅 쳐부시고 승리하고 돌아오신단다. …》
아버지가 돌아온다는 말에 계집애는 다시금 일어났다. 그리고 힘을 내여 깡충깡충 돌다리를 건넜다.
《아홉… 열… 열하나…》
정말 그해 여름날 앞가슴에 훈장을 가득 단 아버지가 그 돌다리를 건너 집으로 돌아왔다.
문춘실이 열두다리밟기에 대한 고향의 풍습을 잘 알게 된것은 퍽 후였다.
예로부터 함경남도지방에서는 정월대보름날 달구경을 하면서 열두다리를 건느는 풍습이 있었다. 여기에는 1년 열두달 행복을 바라는 고향사람들의 념원이 담겨져있었다. 그래서 고향마을사람들은 돌다리나 나무다리를 열두번 건너가고 건너오면서 마음속 소원을 빌었다.
열두다리밟기에서도 함흥의 성천강 만세다리밟기가 더 유명했다고 한다.
이날 사람들은 성천강물결우에 비낀 보름달을 보면서 다리를 열두번 건너가고 건너오면서 즐겁게 달맞이를 하였는데 어른들 짬으로 뛰여다니는 아이들로 하여 다리는 더욱더 흥성거렸다고 한다. 어른들의 발을 밟거나 옷자락을 당기기도 하면서 넘어뜨릴번 하였지만 이날만은 아이들에게 욕을 하지 않았다고 한다.
문춘실의 귀전에는 어릴적에 동네 좌상할아버지가 즐겨읊던 다리의 옛 시구절이 떠올랐다.
만세다리는 함양의 무지개다리요
성천강을 건느는 한갈래 길이라
아이들은 바람 일구며 씽씽 달려가고
어른들은 구름 몰키듯 유유히 건너가네
…
누군가 동흥산 구천각에 올라 정월대보름날 성천강의 이채로운 풍경을 노래하며 지었다는 옛 시구절이다.
세월이 흘러간 지금도 함흥에서는 정월대보름날이면 성천강을 건느는 어른들과 아이들로 다리가 미여진다고 한다. 간혹 비가 내리는 날도 있지만 다리를 건느는 사람들로 하여 이채로운 우산물결이 흐르군 한다.
고향마을의 잊을수 없는 풍경을 그려보는 문춘실의 얼굴에는 빙긋이 웃음이 피여났다.
그는 물에 씻은 참깨를 조리로 건져내면서 깨강정을 맛있게 만들어서 외손녀의 손에 들려주고 래일 저녁 그애와 함께 봉대천다리에서 달맞이를 하리라 마음다졌다.
이윽고 부엌에서는 참깨를 닦는 고소한 냄새가 풍기기 시작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