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69 회)
제 3 장
봄의 의미
5
(1)
인민군협주단 소편대가 석도에 들어온다는 소식은 온 공사장을 발칵 뒤흔들어놓았다. 여느때는 그처럼 침착하고 차근차근하던 《쁠류스안경》도 오늘은 별스레 헤덤비며 어찌할바를 몰랐다.
《아무래도 협주단처녀들에게 우리 석도의 성게맛이야 보여야지요. 한 둬명 떼서 성게따러 보냅시다.》
최진성은 이 엉큼한 정치지도원이 설아때문에 들떠있는 자기 속을 들여다보고 우정 엉너리를 치는듯싶어 그의 가슴을 툭 치며 얼굴을 붉히였다.
《이거 왜 자꾸 그런 소리요? 성게따러야 아침에 내보내지 않았소?》
《그랬던가요? 그럼 무대설치는?》
《그것도 조직했소. 특식준비, 무대준비, 꽃다발, 재청, 박수, 축하연설… 잔소리 할게 더 없소?》
정치지도원은 최진성을 따라 손가락을 꼽아보다가 수첩을 뒤적이더니 아직도 무엇이 모자라는지 안경을 접어넣고 저쪽으로 달려간다.
병사들은 바빴다. 협주단배우들을 맞이할 준비로 눈코뜰새없이 볶이우는 짬에 목달개도 갈아달고 군복에 묻은 흙먼지와 돌가루도 비벼털고 날쌘 축들은 식당화구에서 불다리미를 달구어가지고 바지주름까지 칼날같이 세웠다.
인민군협주단이라고 하면 기껏해야 라지오를 통해 노래소리나 들은 군인들이 김옥선이니, 최창림이니 하고 산골마을의 할머니들까지 이름을 외우는 뜨르르한 명배우들의 얼굴을 직접 보게 된다는것은 하늘에서 내려온 신선을 만나는것만큼이나 희한한 일이였다. 그래서 무대설치를 맡은 군인들은 관람석과 무대사이에 일정한 공간을 두어야 한다는 정치지도원의 훈계를 뚝 잘라먹고 바다기슭의 돌서덜을 반반하게 밀어서 만든 림시무대의 가장자리에까지 걸상대용으로 쓸 동발목들을 바투 내다놓았다.
이러니저러니해도 이 섬에서 제일 가슴이 설레이는것은 최진성이였다. 석철룡도 그 눈치를 알고 나무트렁크속에 건사했던 새 군복에 령장까지 바꾸어달아가지고 진성에게 안겨주었다.
그사이 석철룡은 아주 딴사람이 되여버렸다.
정치지도원만 보면 시뚝해서 돌아가던 철룡이였으나 지금은 숙제를 못한 학생이 선생을 대하듯 몹시 거북해하였다.
그것은 아마 자기가 늘 《리기주의물통》이라고 시까스르던 포르말린용액통에 단단히 한방망이 얻어맞은때문인지도 모른다.
이제는 벌써 보름전의 일이다.
그날은 지금 병사들이 《석도군민선》이라고 부르는 새 철배가 들어오던 날이였다. ㅎ제강소 로동자들이 만들어 보내준 배였다.
리오송정치위원이 정치지도원과 함께 ㄷ형강을 가지고 사죄하러 갔던 날 전마선사건에 대한 내막을 알게 된 ㅎ제강소 로동자들은 군대들에게 ㄷ형강을 주었다가 도로 받았으니 눈에 다래끼가 나게 되였다고 하면서 자기들이 마사진 배를 수리하겠다고 나섰다. 며칠후 리오송을 위시한 군인들이 회관건설에 떨쳐나서자 이번에는 《배수리》계획이 《배건조》계획으로 바뀌였다. 정치지도원은 수리만 해주어도 고맙겠다고 했으나 ㄷ형강을 도로 받은것만도 미안한데 군대가 회관건설까지 맡아나섰으니 배 한척이 아니라 열척을 새로 만들어도 엎음갚음이 못된다고 하면서 끝내 5t들이 철선을 만들어놓았다. 그 배는 곧장 바다가마을 배사공아바이에게 넘어갔는데 아바이는 자기가 군대들일에 제때에 나서지 못한것때문에 마을에서 비난을 받는다며 새 철선을 절대로 받을수 없다고 뻗치였다. 철선의 소유권은 이리 밀리고 저리 밀리다가 진지공사가 진행되는동안 배사공아바이가 전적으로 석도의 수송을 맡아 수행한다는 조건부로 겨우 바다가마을에 넘어갔다.
이렇게 되여 인민이 노를 잡고 군대가 사용하는 사연깊은 《석도군민선》이 섬에 들어오게 되였다. 그런데 바로 그 배에 석박골적위대 대장이 들어왔다. 아직 붕대를 채 풀지 못하고 천막에 누워있던 석철룡은 《처남이 될번》한 사람앞에서 눈만 뚜부럭거렸다.
《원, 사람두 색시될 녀자가 시퍼렇게 살아있는데 이 꼴이 돼가지구두 편지 한장 안한단 말인가?》
녀동생이 자기에게 어떤 리별을 선고하고 돌아섰는지 뻔히 알 사람이 별 싱거운 소리를 다 한다고 생각한 석철룡은 아예 등을 돌려대고 돌아누웠다.
《이보라구 〈매부〉, 뭘 그다지 그러나? 우리 옥실이가 이렇게 제발로 찾아오지 않았나?》
석철룡은 와뜰 놀라서 자리를 차고 일어나앉았다.
채 아물지 않은 대퇴가 쿡 쑤셔나는것도 잊고 적위대장의 등뒤에 나부시 서있는 애인을 넋없이 쳐다보았다. 적위대장은 녀동생에게 의미있는 눈짓을 해보이고는 슬그머니 천막밖으로 사라져버렸다. 석철룡의 가까이에 살며시 앉은 처녀의 입에서는 뜻밖의 소리가 흘러나왔다.
《그동안 보내준 생물표본들을 다 받았어요. 산골에서 바다물고기를 얼마 보지 못하고 자란 애들이 얼마나 좋아하는지…》
처녀는 석도진지공사에 동원된 중대에서 학교에 귀한 생물표본들을 계속 보내오고있다는 소식을 들은 마을사람들이 너도나도 집으로 찾아왔다는것, 군대가 이렇게 속이 깊은데 아직도 중대장을 용서하지 않는것은 석박골사람들의 망신이라며 저저마다 자기에게 한마디씩 하고 갔다는것, 군인들의 성의에 우리도 무엇인가 보답을 해야 하겠다고 하면서 농장에서 100kg짜리 돼지 세마리와 한달구지나 되는 원호물자를 꾸려보냈다는것을 다 털어놓았다. 석철룡은 완강하게 머리를 흔들었다.
《아니, 사람들은 잘못 알고있소. 그건… 난 그런 일을 한적 없소. 그건 아마 정치지도원이… 그 사람이…》
처녀는 눈물이 그렁해서 석철룡의 상한 다리를 내려다보았다.
《알아요, 동무가 그랬을리 없단걸… 하지만 많은 사람들이 그걸 바라고 또 그러리라고 믿고있어요. 동무생각엔 이런 때 자기가 그 생물표본과 아무런 관계가 없다는걸 증명하는게 어디에 필요할것 같아요?》
석철룡은 꿀먹은 벙어리가 되여 덤덤히 앉아있었다. 그때 벙어리가 된것이 여적 그 모양이다. 그날 적위대장이 처녀선생과 함께 뭍으로 나가면서 석도공사가 완공되면 곧 잔치를 할수 있게 준비하겠다는 말까지 남기고 갔지만 이런 날이 오기를 그토록 고대하던 당사자는 기뻐하지도 못했다.
이런 생각에 잠겨있느라니 최진성은 저도 모르게 마음이 흐뭇해졌다.
어쨌든 그 안경쟁이가 괜찮아.
도무지 방도가 없을듯싶던 둘사이를 그렇게 소리없이 붙여놓다니!
며칠전에 다녀간 그 처녀교원의 달덩이같은 얼굴이 설아의 얼굴로 바뀌면서 귀뿌리가 슬그머니 달아오른다.
최진성은 이제 협주단배우들이 오고 설아를 만나면 그동안 자기가 편지를 쓰지 못했던 사연에 대하여, 잠시나마 못난 생각으로 그를 잊으려고 애썼던 고통과 모지름에 대하여, 그러나 실지로는 한순간도 잊어본적이 없었다는데 대하여 몇밤을 새워서라도 이야기하고싶었다. 최진성은 서툰 손바느질로 정성껏 기운 설아의 손수건을 새 군복안주머니에 슬그머니 찔러넣고 협주단소편대를 태운 배가 들어올 가설잔교로 나갔다.
잠시후에 《온다!》하는 환성이 터지더니 뭍을 가리우고 선 저편 바위섬뒤를 에돌아 기관선 한척이 나타났다. 알락달락한 종이꽃을 마스트우에까지 가득 덮고 국수오리같은 색테프를 실실 드리운 기관선의 정면에는 《석도진지공사에서 혁신을 일으키고있는 전투원동지들을 열렬히 축하합니다! 인민군협주단》이라고 쓴 표어가 나붙었다. 갑판우에는 번쩍번쩍한 나팔을 쳐든 악사들이 무슨 행진곡인지 꽝꽝 불어대고 손마다 붉은 수기를 든 녀성배우들이 그 곡조에 맞추어 규칙적으로 팥을 흔들고있었다.
배가 다가오는것이 아니라 꽃바구니가, 노래소리가, 환희가 파도쳐 달려오고있었다. 덧붙여서 최진성에게는 꿈에도 그리던 애인이, 사랑이, 열정이 다가오고있었다.
최진성은 금시 터져나가려는 심장을 억제하지 못해 군인들과 더불어 목이 터져라 하고 와와 소리를 질렀다. 그렇게라도 기를 쓰지 않으면 다리가 후들거려 서있을것같지 못했다. 가설잔교에 배를 댄 협주단배우들이 바다물에 정갱이까지 잠기며 뛰여든 군인들의 손을 잡고 기우뚱거리는 판자다리를 짚으며 하나둘 기슭으로 내려서기 시작했다.
최진성은 울렁거리는 마음으로 배우들의 얼굴을 더듬었다. 왜 그런지 자꾸 눈이 흐려져서 몇번이나 손끝으로 맑은것을 닦아냈다. 보고 또 보았다. 내리는 배우들마다 모두 설아처럼 보였으나 끝내 그 처녀의 얼굴은 찾지 못했다. 협주단전체가 온것도 아니고 소편대로 왔다니 설아가 빠졌을수도 있다는 생각이 없는것도 아니지만 그래도 자기가 눈에 고인 눈물을 씻는 사이에 얼굴을 놓친것같아 군인들과 함께 악기가방과 음향기재상자들을 들고 가설무대쪽으로 가는 배우들의 뒤를 계속 뒤좇아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