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73 회)

제 3 장

봄의 의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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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세찬 바람에 창문이 벌컥 열리면서 창가림천이 방안쪽으로 펄럭 쳐들리며 설아의 얼굴을 휘감았다. 설아는 눈앞을 가리운 창가림천을 서서히 제치였다. 일순 가리웠다가 다시 보이는 삼촌의 얼굴은 전혀 다른 사람의 얼굴이였다. 이때까지 하나밖에 없는 혈육이라고, 아버지처럼 믿었던 사람이 아니였다. 처음보는 사람이였다!

《이젠 알만해요. 그러니 삼촌은… 나때문에 피해를 입게 될가봐… 그게 무서워서 그러지요? 내가 진성동무와 갈라지기를 바란것도 그때문이였지요? 날 위해서였다구요? 이게 바로 날 위해주는거예요? 난… 잘 알았어요. 더는 걱정하지 않게 해드리겠어요!》

설아는 어떻게 삼촌의 집을 뛰쳐나왔는지 몰랐다.

밖에서는 대줄기같은 비가 주룩주룩 쏟아지고있었다.

이따금 번개불이 비칠 때마다 두억시니같은 가로수들이 언뜻언뜻 나타났다가 사라졌다. 설아는 그 가로수들에 머리를 짓쪼을듯이 휘청휘청 걸었다. 너무나 순진했고 많은것을 모르고 산 지난날이 역스러웠다.

내가 방금 누구를 욕했는가? 삼촌을? 무엇때문에?

정설아! 네가 삼촌보다 더 나은것이 뭐가 있니?

전쟁시기에 돌아간 떳떳한 아버지의 딸이 되기 위하여 애젊은 나이에 치욕을 강요당한 어머니의 불행한 한생을 망각속에 묻어버리는데 너도 찬성하지 않았니?

운명의 진실속에서 자기에게 리로운것만 남겨두고 불리한것은 저버려서 화려한 인생을 꾸미려 하는 그런 위선이 너에겐 없었단 말이냐?

너도 같고같은 인간이야! 이런 벌은 너에게 너무나 응당해!

넌 이 세상에 떳떳이 머리들고 살 자격이 없어!

가라! 남들이 보지 않는 먼곳에… 영영 사라져버려!

설아는 다음날로 제대신청을 하였다. 제대리유가 불명확한것으로 하여 그의 제의는 기각되다싶이 하였다. 본인의 완강한 청으로 미루어 토의해보겠다는 대답이 전부였다.

그러나 설아는 그날 밤에 얼마되지 않는 자기의 간편한 살림살이를 트렁크에 쑤셔넣고 도망치듯이 합숙을 빠져나왔다.

설아는 자기의 행동이 사람들에게 더 큰 의혹과 관심을 자아내고 자기가 피하려고 하는 운명이 더 바투 다가올수 있다는데 대하여서는 생각하지 못했다. 그저 김량남이라는 그 지도원의 눈을 피해서, 삼촌의 눈길을 피해서 어디론가 멀리 가고만싶었다. 그렇게 작정을 하고 역전으로 나왔지만 딱히 어디로 가야 할지 알수 없어 역기다림칸에서 밤을 새우게 되였다.

렬차가 몇개나 지나가도록 의자에서 일어나지도 않고 차시간도 묻지 않는 설아를 주시하던 한 안내원이 그의 곁에 다가와앉았다.

《동문 어느 렬차를 기다려요?》

설아는 맥없이 대답했다.

《내가 탈 렬차가 있을가요? 난 아마 여기가 종착역인가봐요.》

모든것을 체념한듯한 처녀의 눈빛에서 심상치 않은것을 느낀 안내원이 어디론가 사라졌다가 《사회안전원》완장을 두른 대위와 함께 나타났다.

《동무, 증명서를 좀 봅시다.》

설아는 가방속에 들어있던 증명서를 무심히 꺼내들었다. 이런 일이 생길줄 미리 타산한것은 아니였지만 군복은 합숙옷장에 벗어놓고 나오면서도 다행히 신분증만은 가지고 나왔다.

《아니, 이거 협주단 배우동무였구만요. 그런걸 우린 괜히… 허허허…》

증명서를 들여다보던 대위가 어이가 없는듯 곁에 선 안내원을 바라보며 너털웃음을 웃었다. 안내원은 믿어지지 않는지 대위의 손에서 설아의 증명서를 받아쥐더니 몇번이나 설아의 얼굴과 증명서의 사진을 번갈아보았다. 안전원 대위가 친근한 어조로 물었다.

《그런데 왜 이런데서 밤을 새웁니까? 협주단에 들어가있다가 차시간에 맞춰 나오면 되겠는데…》

대위의 목소리는 부드러웠으나 설아는 그의 팔에 두른 완장에 위압이 되여버린듯 나부시 눈을 내리깔았다.

《전 협주단에서 나왔습니다. 다른 곳에 가서 일할가 하는데… 딱히 어디로 가야 할지…》

설아의 증명서를 이리 뒤집고 저리 뒤집던 안내원이 반색을 하며 설아의 팔을 붙들었다.

《그러니 직업을 바꾸려구요? 원, 참… 그렇다면 다른데 갈게 있어요? 우리 철도에 들어오라요!》

《여긴… 싫어요. 난 좀 멀리에…》

설아의 말을 제나름으로 해석해버린 안내원이 대위에게 눈을 끔뻑여보이고는 알만하다는듯이 고개를 끄덕이였다.

《그럴수도 있지. 하지만 그때문에라도 철도에 들어오는게 좋을걸! 승무원이 되면 어디로나 다 가니까… 멀리 가는게 소원이라면 말이예요.》

그의 말에도 일리가 있는것같았다.

렬차를 타고 정처없이 다녀보는것도 좋겠지. …

그렇게 오고가느라면 혹시 진성동지의 얼굴도 한번 보게 되지 않을가. 아니, 내가 이런 때 무슨 얼빠진 생각이람. …

《그렇게 하지요?》

안내원은 무척 끈덕지게 달라붙었다.

《그런데 전… 문건도 없어요. 아직 제대결정도 되질 않아서…》

《그런건 걱정 안해도 돼요. 우리 정치부장동지가 예술에 관심이 높아서 인재라면 어디서라두 붙들어오니까. 얼마전엔 시예술단에 있던 손풍금수까지 홀쳐왔는데 뭘.》

알고보니 그는 평양철도국의 예술소조책임자였다.

설아는 그 열정적인 안내원의 손에 붙들려 철도합숙에서 새날을 맞았다. 그다음은 어떻게 된 일인지 얼음판에 박을 밀듯이 수속이 되고 얼마후에는 철도제복을 입었다. 단기강습을 받은 후에 려객렬차승무원을 하라는 권고가 있었지만 끝까지 우겨서 제일 어렵다는 화물렬차의 차장으로 앉았다. 어쩐지 려객렬차에 오르면 아는 사람들을 만날것같은 생각에 겁이 났다. 늘 혼자있고싶었다. 그래서 차장이 되려고 결심한것이였다.

차장차에는 언제나 자기 혼자뿐이였다. 그러다가 오늘 느닷없이 어떤 젊은분이 이 차장차에 올랐다. 설아는 무엇인가 깊은 사색을 하시는듯한 그분에게 방해가 될가보아 될수록 밖에 나와있었지만 얼마 오가지 않은 짧은 대화속에서도 신비한 따뜻함과 포근함을 느끼였다.

마치도 오랜 구면, 친혈육을 만난듯한 느낌이 아직도 머리속에 자리잡고 떠나지 않는다. 어째서일가?

처음으로 차장차에 올라 자기와 동행한 려객이여서일가?

아니면 무척 부드럽게 여겨지던 그 음성이나 자기 마음속을 환히 들여다보는듯하던 그 영채로운 안광때문일가?

헤여지는것이 무척 아쉬우신듯 오래오래 손을 저어 바래주시던 그 인정때문일가? 그분은 대체 어떤분이실가?

끝없이 깊어지는 설아의 생각처럼 렬차는 달리고 또 달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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