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75 회)
제 3 장
봄의 의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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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이때 문밖에서 부산스러운 소리가 울리더니 장지문이 주르륵 열리고 임철정치위원의 뒤를 따라 예순살이 훨씬 지나보이는 녀인 하나가 자그마한 보따리 하나를 들고 들어섰다. 임철은 옆집에 사는 부참모장의 가시어머니라고 녀인을 소개하고나서 우선우선한 웃음을 지었다.
《글쎄 알고보니 이 아주머니가 함경도적으로 소문난 고려과 의사였답니다. 곁에서 환자의 시중이나 좀 들어달라고 부탁하러 갔댔는데 더덕을 캐러 갔다가 삼을 캤습니다, 허허허…》
《페를 끼치게 되였습니다. 이 집 세대주가 돌아올 때까지만 좀 환자를 돌보아주십시오. 그다음엔 인차 중앙병원에 후송하겠습니다.》
늙은 녀인은 방구석에 오그리고앉아 어쩔줄 몰라하는 안주인을 얼핏 내려다보더니 얼른 맞고개를 꺾었다.
《페랄게 있습니까. 이렇게 늙은것이 별로 하는 일도 없이 이웃에 살면서 인간도리를 미처 지키지 못해 큰일하는분들이 마음쓰게 만들었습니다. 변명같기는 합니다만 저두 언제부터 이 집을 한번 찾아본다 하구 벼르긴 했는데 녀자가 하도 내우를 하구 동네사람들에게 곁을 주지 않아서 제 걸음이 좀 떠졌습니다.》
녀인은 오랜 의사의 타성으로 해서인지 인사말을 마치자마자 곧 환자의 맥부터 짚고 앉았다. 두눈을 질끈 감고 연신 고개를 끄덕거리며 박금월의 퉁퉁 부은 팔목을 이리 짚어보고 저리 짚어보더니 약간 탄식조로 중얼거렸다.
《허, 기가 허하구 혈이 막혔구나. 아침에는 손발이 저리겠지?》
박금월이 머리를 무겁게 끄덕이였다.
《맥이 없구 피곤하면서두 잠은 오지 않구 일어서면 머리가 어지럽지?》
이번에도 금월은 맥없이 고개를 끄덕이였다.
녀인은 환자의 팔목에서 손을 떼더니 눈을 번쩍 떴다.
《산후탈일세. 피가 부족한데다 잡신경에 기가 눌려서 혈전증상이 왔네. 이제 내가 지어주는 고려약을 좀 쓰면서 며칠 치료를 해보자구. 사향같은게 있으면 직효이겠지만 이 약들두 그만하면 괜찮아.》
녀인이 들고온 보따리를 끄르자 옹기종기한 천주머니들과 종이봉투들, 줌줌이 묶은 나무뿌리같은것들이 한무드기 펼쳐졌다.
달작지근하면서 쌉쌀한 약초냄새가 눅눅한 방안에 그득히 찼다.
그게 사향노루였다고 한것같은데…
임철은
《철봉동무가 다른 사람들에게 페를 끼치지 않으려는 마음은 리해되지만 안해가 저 지경이 되도록 누구에게도 말을 하지 않았다니 이런 법이 어디 있습니까? 자기도 관심을 못하면서…》
《철봉동무가… 아마 김창봉이때문에 고생을 하면서 위축이 된것이 아직 풀리지 않은것같습니다.》
《그럴수도 있을것입니다. 그러니 정치위원동지가 곁에서 잘 도와주십시오. 큰일을 맡은 사람이 아닙니까.》
《알았습니다.》
집뜨락을 나서자 길옆에 대기하고있던 정치위원의 승용차가 발동을 걸었다. 임철정치위원이 자기의 승용차를 가리켜드리며 평양으로 가는 려객렬차는 래일 아침에 있기때문에 자기 차를 불렀다고 말씀드리였다.
《예, 지금 제 차에 있습니다.
박금월은 난데없는 산짐승앞에서 일순 굳어져버렸다. 중사령장을 단 운전사는 어제 여기에 오셨던
《이게 보통노루가 아니고 사향노루인데 빨리 환자에게 사향을 대접하랍니다. 그럼 전 가겠습니다.》
운전사는 곧 차를 몰고 지휘부쪽으로 올라갔다.
박금월은 아직도 숨이 살아 까만 눈알을 반뜩거리는 노루앞에 무릎을 꿇고앉아 두손으로 얼굴을 싸쥐였다.
그 시각에
밤사이 산발을 톺느라 피곤이 몰리신
어제는 리철봉의 안해가 병을 더 굳히기 전에 빨리 사향을 구해야 하겠다는 생각으로 급히 차를 타고 떠나시였는데 은률군으로 오면서 생각해보니 그때 료양소에 갔다온 최현의 입에서 최광에 대한 말을 전혀 듣지 못했다는것이 상기되시였다.
빨찌산시절의 오랜 전우를 코앞에 두고 그냥 돌아설 최현이 아니였다.
모르는 사람들은 최현이 무뚝뚝하고 성미가 메말랐다고 생각하지만 그처럼 다감하고 인정에 무른 사람도 드물었다. 더구나 철호어머니와 함께 은률에 왔다가 인사삼아서라도 옛전우에게 들려보지 않았을리 없을것이다. 하지만 그런 이야기를 들은 기억이 전혀 나지 않으시였다.
최현에게 새 집을 안겨주게 된것이 너무 기쁜김에 그만 그것을 놓쳐버린것이 무척 후회되시였다. 그리하여 4시에 사향노루를 산채로 붙잡아
임철정치위원의 차에 실어 떠나보내신
뜨락안에서 빨래줄에 젖은 옷가지들을 널고있던 김옥순이 인기척을 느끼고 뒤를 돌아보았다. 아직 어뜩새벽인데 빨래를 널고 어디로 나가려던참인지 허름한 작업복에 장화를 받쳐신고 하얀 타올수건까지 목에 둘렀다.
김옥순은 성근 안개속을 헤치고 몇걸음 다가오다가 주춤 멈추어섰다. 이마전에 흘러내린 자분치를 젖은 손끝으로 비다듬어넘기면서 두눈을 쪼프리고 고개를 기웃하였다.
《아니, 어머니. 얼굴을 못본지 얼마나 됐다고 절 그렇게 찬찬히 보십니까? 제
설마 하고 자기 눈을 의심하던 김옥순은 귀에 익은
《어머니, 건강하셨습니까? 온다온다 벼르다가 이제야 옵니다.》
김옥순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