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91 회)

제 4 장

붉은 단풍계절

3

 

밤이 퍽 깊었으나 역전공원은 아직도 많은 사람들로 붐비였다.

렬차를 타고 떠나갈 사람, 금방 도착한 사람, 바래우는 사람, 기다리는 사람, 지나가는 길에 다리쉼을 하려고 들린 사람…

목적도 각이하고 앉거나 선 모양새도 저마끔이였으나 누구든 여기서 오래 머무를 생각을 하는 사람은 없었다. 역전공원이란 원래 그런것이다.

그러나 설아는 공원 한구석의 돌의자우에서 밤을 샐 잡도리를 한것처럼 무릎우에 두손을 얹은채 오도카니 굳어져있었다.

구내고성기로 무슨 소리가 울려나왔는지 공원이 와슬와슬 설렁거리더니 숱한 사람들이 나들문쪽으로 몰려간다. 설아의 옆에 앉았던 낯모를 손님도 배낭을 끙 둘러메고 급한 걸음으로 멀어져갔다.

인총이 빼곡하던 공원이 눈에 띄게 성글어지고 설아의 마음속도 그렇게 어설퍼졌다. 사람들이 붐빌 때에는 그속에 파묻혀 어떤 안정감같은것이 깃들어있었는데 휑뎅한 공원에 혼자 남고보니 뭇사람들의 시선이 쏠린 무대우에 홀로 나섰을 때처럼 가슴이 화들거렸다. 구석을 찾아와 앉느라고 했지만 어딘가 좀더 구석진데로 옮겨앉고싶은 심정이다.

하다못해 야외등빛이라도 좀 덜 미치는데를 찾아볼가 하고 주위를 둘러보던 설아의 눈길이 몇걸음앞에 떨어져있는 돌리개식신문틀에 멎어섰다. 며칠전에 자기를 찾아온 삼촌과 마주섰던 자리였다.

《설아야, 날 용서해라. 난 너에게도 죄를 지었고 너의 아버지에게도 죄를 지었다. 그리고 나자신에게도… 난 아래에 내려가 자신을 단련하게 해달라고 당조직에 제기했다. 철이 엄마도 함께 가겠다는구나.》

삼촌은 그사이 10년은 더 늙어버린것같았다.

설아는 이제껏 다시는 삼촌과 상대하지 않으리라고 도슬러먹었던 마음이 졸지에 무너져내리고 련민의 마음이 줄금줄금 돋쳐올랐다.

끝없이 타매하고 저주했어도 삼촌이야말로 이 세상에 단 하나밖에 남지 않은 친혈육이 아닌가!

내가 아니였다면, 내가 나타나지 않았다면 순편한 인생행로를 걸어갔을수도 있는 삼촌이였다. 어찌보면 삼촌은 나의 장래를 진심으로 걱정하여왔을지도 모른다. 설사 그렇지 않다 하더라도 그는 바로 나때문에 피해를 입은것이다. 설아는 삼촌이 떠나간 후에야 비로소 그에 대한 죄의식을 느끼였다. 아버지도 떠나고 어머니도 떠나고 애인도 가고 삼촌도 가고…

나에게는 이제 무엇이 남았는가.

손님들이 다 떠나가버린 텅 빈 역전공원, 이것이야말로 내 인생의 무대란 말인가!

아니, 다 떠나간것은 아니다. 나를 찾아오는 사람도 있다.

그러나 그는 내가 절대로 만나서는 안될, 만나고싶지 않은 사람이다.

당중앙위원회 김량남지도원…

바로 그가 나를 찾는다고 한다. 아까 초급당비서가 찾아와 오늘 저녁 다른데 가지 말고 방에서 기다렸다가 량남지도원이 오면 만나라고 이야기했을 때 설아는 마음속으로 완강히 도리머리를 저었다. 그리고는 역전공원 한구석에 숨어버렸다. 지금쯤 그가 나를 찾고있을지 모른다. 온 승무대가 역주변을 훑고있을지도…

그런데 나는 왜 좀더 멀리로 달아나지 못하는가!

갈 곳이 여기밖에 더는 없어서인가?

아니면 달아나려 하면서도 달아날수 없는 어떤 미련같은것이 발목을 붙들기때문인가? 미련이라면 도대체 무슨 미련이? 아무것도 없다.

이제 그를 만난다면 모든것이 드러나게 될뿐이다.

지금껏 내가 어떤 남자에게 실련을 당하여 협주단에서 달아나버린것으로 지레짐작하고있는 승무대처녀들도, 쉽지 않은 복덩이가 철도에 굴러들어왔다고 만날 때마다 흡족한 미소를 지어보이는 정치부장도 나의 경력과 지나온 과거에 대하여 속속들이 알게 되겠지.

김량남이란 사람은 바로 그것을 발가놓자고 오는것이다.

삼촌이 피해를 입었으니 이제는 내 차례다. 모든것은 응당하다.

어린시절에 지주집에서 고생살이를 해온 어제날의 머슴이 《원쑤의 자식》을 알아보았으니 무엇을 주저하겠는가.

나는 물론 그의 피줄이 아니다. 그러나 삼촌도 말한것처럼 그것은 누구도 증명할수 없다. 설사 어떤 기적이 일어나 그것이 증명된다고 해도 자기의 운명을 위해 리력을 기만했던 부끄러운 행적은 절대로 지워지지 않을것이다. 나는 이제 또 어디로 가야 하는가.

설아는 그동안 겨우 자리를 잡고 발을 붙인 철도국에도 더는 있을수 없게 될것이라는 예감에 온몸이 오도독 떨렸다.

누군가의 발자국소리가 가까와온다. 등뒤에까지 다가와 뚝 멈춰선다.

어떤 손님이 또 빈자리를 찾아온것이겠지. 공원이 텅 비다싶이했는데 하필이면 왜 내가 앉아있는 의자를 택한단 말인가.

설아는 자기가 자리를 피해야 하겠다고 생각하며 몸을 일으켰다.

《정설아동무지?》

등뒤에서는 뜻밖에도 자기의 이름을 부르는 목소리가 들렸다. 불길한 예감에 심장이 콕 멎는것같았다. 뒤를 돌아다보기도 두려웠다.

제발 그 사람이 아니였으면…

그러나 목소리는 틀림없이 그 사람의것이였다.

김량남… 그 사람이 끝내 나를 찾아냈구나. 설아는 모든것을 체념해버렸다. 달아나기에도 지쳤다. 달아난다고 피할수 있을것같지도 않았다.

이제는 운명에 맡기자.

모든것을 다 잃어버린 내가 이제 무엇을 더 잃겠는가.

김량남은 설아가 앉았던 돌의자를 빙 돌아 앞으로 마주오더니 구면친구를 만난듯 처녀의 한쪽팔을 툭 건드렸다.

《설아동문 노루고길 좋아하는 모양이야? 어찌나 잘 뛰는지 따라잡기가 헐지 않구만.》

설아는 가벼운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약간 쳐들었다.

《이젠 더 뛰지 않겠습니다. 지도원동진 마음놓으셔두 됩니다.》

김량남은 말없이 돌의자에 앉아 삼면쟈크가방을 주르륵 열어제꼈다.

가방안에서는 하얀 종이 몇장이 나왔다.

《설아동문 여직 아버지에 대해서 잘 모르지? 이번에 아버지와 함께 싸운 전우들을 만나 전사한 경위와 시신을 안장한 곳까지 구체적으로 알아보았소, 아버지는 락동강에서 잘 싸우셨더구만.》

설아는 가늘게 쪼프린 눈으로 김량남의 손에 들린 종이장을 내려다보다가 고개를 외로 틀며 떨리는 목소리로 말하였다.

《무슨 말씀을 하십니까? 지도원동지도 아시겠지만 저의 아버지야 양자툰의 라한방…》

설아는 어떻게 되여 자기의 입에서 그런 말이 나가게 되였는지 스스로도 의식하지 못했다. 구슬픈 운명에 도전하려는 어떤 반발심이 무의식적으로 돌출한것은 아닌지. …

네가 라한방의 딸이 아니냐고 따져물었다면 오히려 아니라고, 나는 락동강에서 전사한 렬사의 딸이노라고 반박했을지도 모를 설아였다.

그러나 김량남의 입에서 친아버지에 대한 이야기가 나오고보니 이번에는 왜서인지 그것을 부정해버린것이였다.

《정설아동무!》

방금전까지 미소를 짓고있던 김량남이 위혁적인 목소리로 부르짖었다.

체소해보이는 그의 온몸이 어떤 분기로 하여 우들우들 떨었다.

《동무는 뭔가 오해하고있소. 우리가 사람들의 가정환경이나 성분을 따지는것은 어떤 피줄을 들추어서 적아를 구분하자는게 아니요. 그런데 동무는 무슨 억하심정으로 자기의 친아버지마저 부정하려고 하는거요? 도전인가?!》

설아는 가슴이 후두두 떨려 금시 주저앉을것만 같았다. 그리 높지 않은 량남지도원의 목소리가 천둥벼락처럼 설아의 뇌리를 쳤다.

《내가 동무에게 친아버지에 대해 말하는것은 동무가 렬사의 피줄이기때문에 이제부터는 아무런 문제도 없다는걸 증명하자는게 아니요. 아버지의 넋을 가슴에 새기고 아버지처럼 살기 위해 열백배로 분투해야 한다는것을 말해주고싶어서요. 조국의 미래를 위해 피흘린 아버지를 모욕하지 마시오. 동무에겐 그럴 권리가 없소. 딸로서도 그렇지만 그가 지켜낸 조국땅에서 사는 한 공민으로서도 말이요. 내 말뜻을 알겠소?》

어디선가 붕- 하고 렬차가 떠나는 소리가 들린다.

설아는 이 시각 자기 운명의 렬차가 새 궤도를 타고 출발하는듯한 느낌에 사로잡히였다.

진정 이밤에 나의 운명은 새길에 들어서는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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