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88 회)
제 4 장
불타는 지향
5
(3)
그런데 난처한 일은 주인격인 송영숙이 온다간다 소리없이 사라져버린것이였다.
《우리 기사장님이 하늘로 올랐나? 땅으로 잦았나?》
조광문이 진한 평안남도사투리로 롱담반, 진담반 섞어서 말하였다.
어머니의 생일을 기념하여 가족사진도 찍고 록화촬영도 하려고 보니 그가 없었던것이다.
초청을 받고 찾아온 사람들앞에 새옷을 입은 어머니를 내세우려는데 그 옷과 신발 또한 어디에 두었는지 몰라 아래웃방이 벌컥 뒤집히였다.
부엌에 앉았던 수정이까지 앞치마를 두른채로 여기저기 드달려다니며 송영숙을 찾아보았으나 누구도 아는 사람이 없었다.
은숙이 머리를 기웃거렸다.
《아침에 자재과장에게서 무슨 전화를 받고 나가면서 인차 들어오겠다고 했는데…》
《글쎄 말이예요.》
수정이도 머리를 끄덕거렸다.
그런데 백상익의 말이 더 걸작이였다.
《우리 집사람은 그게 정상입니다. 나가면 출근이구 들어오면 퇴근이지요.》
악의없는 그의 말에 집안식구들은 그만 허구프게 웃고말았다.
백상익은 초조감을 누르며 앉아있는 사진사에게 집사람이 들어오면 전화로 알리겠으니 그때 다시 와줄수 없는가고 물었다. 사진사는 벌깃해진 얼굴에 웃음을 담고 전화를 받은 즉시로 오겠노라고 대답하였다.
사진사가 돌아가자 집안의 분위기는 다소 어수선해졌다.
(도대체 어디 갔을가? 집식구들에 대한 생각은 통 없다니까…)
(어머니생일날에도 이러니 여느날엔 더할테지? …)
집안식구들의 얼굴에서 웃음이 사라질 그무렵 송영숙은 운수직장의 실험실에 혼자 있었다. 화학공장 페설물을 실어왔다는 자재과장의 전화를 받고 급히 집을 나온 그였다.
운전사와 함께 페설물이 담긴 도람통 두개를 실험실에 들여놓아준 자재과장은 기와집지붕같은 웃입술을 우습강스럽게 오무리며 말했다.
《거기선 이걸 모두 땅속에 매몰시킵디다. 꿀단지처럼 땅속에 파묻어야 보약이 되는 모양이지요?》
그는 기사장의 부탁을 실속있게 들어준것이 제켠에서도 기쁜지 노상 싱글거렸다. 기사장을 도와 페설물을 항아리같은 유리용기들에 담아주기도 했다.
《고마워요. 오늘 정말 수고많았어요.》
송영숙은 진정으로 감사를 표시했다.
《수고랄게 있습니까? 후에라도 필요한게 있으면 또 알려주십시오.》
얼마후 실험실엔 송영숙이 혼자 남았다.
그는 한동안 출입문쪽에 놓인 의자에 앉아 실험실을 둘러보았다.
(모든게 바라던대로 다 갖추어졌구나! 가성소다용액과 염산이 마련된데다가 페설물까지 실어왔으니 이제는 실험을 시작해야 한다. …)
그는 마음속으로 이렇게 생각했다.
그의 시선이 합성반응기며 교반기 그리고 키낮은 선풍기와 당반우에 가지런히 놓인 실험기구들에 닿는 순간 눈앞에는 문득 닭공장에서 생활하던 크지 않은 합숙방이 떠올랐다. 책상과 침대만 있으면 정말로 그방과 비슷하다는 생각이 들자 저절로 웃음이 나왔다.
(나는 결국 여기에도 《요정》들이 사는 집을 꾸려놓았구나! …)
송영숙의 생각은 저도 모르는 사이에 추억의 나래를 펴고 닭공장합숙으로 훨훨 날아갔다. 꿈도 많았고 웃음도 많았고 슬픔도 괴로움도 많았던 닭공장합숙의 3층 5호…
송영숙은 마음속으로 속삭였다.
(잊을수 없는 그 방에서 나는 대학생소조원으로부터 현장기사가 되였구 또 책임기사를 거쳐 지배인이 되였지. … 고려식물성성장촉진제연구로 학위를 받은 그날도, 공장지배인으로 임명받은 그날도 난 그 방에서 온밤 잠들지 못했지, 아버지와 마음속으로 이야기를 나누면서…
나는 정말이지 그때 지배인이라기보다 대학생처럼 열심히 일하면서 꾸준히 배우고 탐구하였어. 사랑의 아픈 상처도 로동과 독서와 실험으로 달래군 하면서… 웃음많고 노래많은 그 시절은 멀리로 사라져버렸구… 그땐 왜 그다지도 마음이 쓰리구 아팠을가? …
크지 않은 그 합숙방에 주규호당비서의 안내를 받으면서 남편이 찾아왔던 그날은 언제였던가?
그날 저녁 예고없이 불쑥 찾아온 당비서와 남편을 보고 나는 너무도 당황해서 문설주에 굳어진채 서있었지.
그날 내가 방에서 뛰쳐나가려 할 때 당비서동지는 엄하게 나를 꾸짖었지.
《난 지배인의 입당보증인으로서 두사람의 결혼을 지지하네. 그리구 이제부턴 날 친정아버지처럼 생각하라구. …》
그때 난 바보처럼 아무 말도 못하고 두손으로 얼굴을 감싸쥐고말았지.
경아 아버진 그냥 웃기만 하고…
지배인의 직무에 어울리는 덩실한 집에 화려한 창가림이나 번쩍거리는 가구는 찾아볼수 없고 각양각색의 크고작은 실험기구들만이 가득찼던 그 《요정》들이 사는 집! … 그래서 그 방이 더더욱 마음에 든다고 하던 말에 외롭던 처녀는 울었던가, 웃었던가. …
그날
꿈같은 신혼생활도 그 방에서 흘러갔어. 우리를 위해 당비서동지가 팔걷고 나서서 지어준 새 집을 내가 제대군인 수리공총각에게 먼저 양보했기때문이였지.
우리에게 딸 경아가 태여나고 지배인사업으로 바쁜 나를 위해 친정어머니를 모셔온 그해 가을에야 우린 그 정든 합숙방을 나왔지.
난 지금도 결혼식날 밤 경아 아버지가 한 말을 잊을수 없어.
그날 그인 이렇게 말했어.
《영숙이! 우리 한생토록 변함없이 뜨겁게 사랑하자. 불보다 뜨거운 그 사랑으로 우리의 생활을 가꾸고 사랑을 다 바쳐 나서자란 이 땅도 보란듯이 힘껏 가꾸어가자. …》
그때에도 난 바보처럼 그저 울기만 하였지. …)
멀리로 흘러간 그 나날들을 그려보던 송영숙의 눈가에는 저도 모르게 맑은것이 고여올랐다.
이윽고 송영숙은 눈굽을 닦으며 실험실을 둘러보았다. 그의 눈길은 푸르끼레하고 걸죽한 액체가 담겨진 유리용기에서 멎었다. 그는 역한 비린내를 풍기는 그 페설물을 바라보며 저도 모르게 심호흡을 하였다.
(내 저것과의 싸움에서 언제면 승리자가 될수 있을가? … 내가 과연 먹성인자를 찾아낼수 있을가? …)
그는 경기장에 나선 선수가 상대선수를 쳐다보듯이 페설물이 담겨진 유리용기를 지그시 노려보았다.
느닷없이 사랑하는 남편과 딸 경아와 은아 그리고 어머니의 주름많은 얼굴이 떠올랐다. 이윽고 그는 큰숨을 들이쉬며 입속말로 중얼거리였다.
《어디 너와 나, 겨루어보자! 나의 사랑하는 모든것을 위해, 보다 큰 사랑을 위해.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