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95 회)

제 4 장

불타는 지향

9

(1)

 

송영숙은 두달가까이 시험호동에 가보지 못하였다.

하반년 생산지휘가 바쁜데다가 짬시간마다 운수직장 구석켠에 자리잡은 실험실에서 먹성인자를 찾기 위한 실험을 해야 했던것이다.

청년직장의 생산문제와 방역사업때문에 자주 나가기는 하였지만 시험호동에는 들리지 못하고 바삐 돌아서군 하였다.

기술준비소장 유상훈박사에게 별다른 일이 생기면 알려달라고 당부했는데 다급한 전화가 없는것을 보면 그곳 일도 무난하고 순조롭게 흘러가는 모양이였다.

송영숙의 온 하루는 그야말로 시간쟁취로 이어졌다.

자본가에게는 돈으로, 또 누구에게는 창조의 어머니로, 누군가에게는 황금으로 표시되는 시간이다. 그러나 송영숙에게 시간은 그 돈이며 황금이며를 다 합친것이였다.

그에게는 점심시간과 퇴근후 저녁시간이 실험시간이였다.

실험실에 한번 들어가면 시간이 어떻게 흐르는지 알지 못했다. 퇴근시간도 정해져있지 않았다. 실험에 열중하였다가 일어나는 시간이 퇴근시간이였다.

그의 생활에서 일어난 이 무질서를 누구보다 먼저 느낀 사람은 그의 어머니였다.

처음 문춘실은 매일 자정이 넘어서야 역한 비린내를 풍기며 들어오는 딸에 대하여 별다른 생각을 하지 않았다. 오리먹이에 어분가루대신 변질된 물고기를 섞어서 먹이느라 그런다고 나름으로 짐작했었다. 그러나 한두달이 지나도록 퇴근시간이 점점 늦어지면서 그 역한 냄새를 그냥 풍기는것을 보고 점차 이상한 생각을 하였다.

딸에게는 애당초 집과 젖먹이에 대한 생각은 없는것같았다.

휴가받고 놀러왔던 맏딸이 아이의 건강을 위해 수유시간을 꼭 지키라고 말했을 때에는 며칠간 채심하는것 같더니 지금은 아이에 대한 아무런 의무감도 없는것 같았다.

아이들은 아이들이라치고 제일 보기가 딱한것은 사위였다.

(아이들은 이 할미에게 떠맡긴다치구 제 서방한텐 미안하지도 않는지… 하두 너그럽구 무던한 사람이니 제 맘 내키는대루 나다니지 맏사위같은 사람이라면야 어림두 없을텐데… 내 오늘은 아에미에게 한마디 해야겠어. 제 서방까지 싫은 소릴 하지 않으니 당초에 들소 한가지라니까. …)

문춘실은 오늘 저녁에는 어머니의 자격으로 한마디 따끔한 소리를 하리라 마음다지며 부엌으로 내려갔다. 그는 터밭에서 따온 오이와 양배추로 김치를 담그었다.

탁아소와 유치원에서 돌아온 두 손녀는 아래목에 나란히 누워 꿈나라에 간지 오래였다.

얼마후 문밖에서 발자국소리가 났다. 사위의 발자국소리였다.

(또 이사람이 먼저 들어오누나. …)

문춘실은 저도 모르게 한숨을 내그었다. 제 딸이 먼저 들어와 제사람을 반겨 맞아주면 얼마나 좋아하랴 생각하며 그는 문을 활짝 열었다.

《이제 돌아오나?》

《예, 오늘은 좀 늦었습니다.》

백상익은 여느날과 다름없이 깍듯이 인사했다.

집에 들어선 그는 나란히 누워 잠자는 두 딸을 정찬 눈길로 들여다보았다. 그는 웃방에 올라가 옷을 갈아입고 다시 아래방으로 내려왔다.

백상익은 저녁상을 차리느라 그릇소리를 내는 가시어머니에게 동무의 생일에 초청되여 식사를 하고 왔다고 말한 다음 다시 두 딸앞에 다가앉았다. 이윽고 부엌에서 올라온 가시어머니에게 이렇게 물었다.

《어머니! 탁아소나 유치원에 가보면 우리 애들이 어떠나요? 건강상태라든가 지능상태가 말이예요.》

자기의 두 딸이 누구보다 곱고 똑똑하기를 바라는 사위의 그 마음을 재빨리 읽은 문춘실의 얼굴은 대번에 밝아졌다.

《에구! 말 맙세. 둘이 다 어찌 곱구 똑똑한지 모른다우. 선생들두 기차게 고와하구. 큰건 저들 피아노반에서 노상 일등이라오. 작은건 탁아소에서 손꼽히는 우량종이구. 동네애들두 우리 애들만 보문 너무 고와 야단이라우.》

문춘실은 갑자기 다사해졌다.

제 살과 피처럼 귀한 손녀들을 침 마르도록 자랑하는 그의 말은 억양이 센 북관사투리와 어울려 그 어떤 노래처럼 들렸다. 사실 승벽심이 남다른 이 녀인에게는 무럭무럭 자라는 손녀애들이 제일 큰 자랑거리였고 기쁨이였다.

그는 남의 열 아들이 부럽지 않다고 말하려다가 꿀꺽 삼켜버렸다.

가시어머니를 쳐다보며 백상익은 싱긋이 웃었다.

그는 두 딸의 앞날에 아름다운 무지개가 비끼기를 축복하듯 크고 두툼한 손으로 아이들의 볼을 쓰다듬어주었다.

이윽고 그는 TV앞에 다가가 스위치를 눌렀다.

화면이 펼쳐지더니 래일의 날씨를 알리는 방송원의 친근한 목소리가 울렸다. 잠시후에는 우리 나라 압록강체육단 선수들과 기관차체육단 선수들간의 축구경기가 방영되였다.

백상익은 TV앞으로 쑥 다가앉으며 온 신경을 경기장면에 쏟아부었다. 축구라면 오금을 못쓰는 그였다. 지금도 군급 기관, 기업소들의 축구경기때마다 군인민위원회 축구주장으로 이름을 떨치군 하였다.

그는 TV화면에 펼쳐진 경기에 직접 참가한 사람처럼 긴장되기도 하고 아쉬워서 어쩔줄 몰라하기도 하다가는 통쾌한 득점장면에서는 무릎까지 치면서 싱글벙글하였다.

어느덧 경기가 압록강체육단의 승리로 끝났을 때에야 그는 TV를 끈 다음 편히 쉬라는 인사말을 하고 웃방으로 올라갔다.

문춘실은 여느날과 다름없이 빈방으로 올라가는 사위의 뒤모습을 물끄러미 쳐다보았다. 제 색시가 곁에 있다면 TV도 함께 보고 밤이 새도록 아이들의 앞날을 꿈꾸며 이야기를 나누련만…

문춘실은 얼핏 벽시계를 올려다보았다.

벌써 밤 열시가 지난지 오래다.

또다시 딸에 대한 민망스러운 생각이 솟구쳐올랐다. 오늘은 밤이 깊더라도 지키고 앉아있다가 딸에게 말 몇마디 따끔하게 해야겠다고 생각한 그는 시간을 보낼 일감을 찾느라 방안을 둘러보았다. 마침 경아의 달린옷 단추가 가들가들 떨어질가 말가하고 치마기슭 혼솔이 터졌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단추달고 터진 혼솔을 기웠지만 여전히 딸은 들어오지 않는다. 하는수없이 그는 작은 손녀옆에 쭈그리고 누웠다.

웃방문짬으로 불빛이 새여나오는걸 보니 사위도 아직 잠자리에 들지 않은것같았다. 문춘실은 문소리가 나면 제꺽 일어나야지 하고 생각하며 눈을 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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