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96 회)
제 4 장
불타는 지향
9
(2)
그날도 송영숙은 밤 열두시를 알리는 탁상시계의 종소리를 듣고서야 합성반응기의 스위치를 끄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기운차게 돌아가던 선풍기도 스위치를 끄자 얌전해졌다.
송영숙은 한동안 마른 세면을 하고 기지개를 하듯 두팔을 힘껏 늘구었다.
뿌듯하던 몸이 조금 가벼워진감을 느낀 그는 다시 자리에 앉아 방금전까지 진행한 실험결과를 세심히 돌이켜보았다.
아직은 모든것이 륜곽뿐이다.
새것의 창조는 항상 그렇게 시작되는 법이다.
송영숙은 책상우에 놓인 실험일지에 하루동안 진행한 실험과정을 구체적으로 적어넣었다. 그리고 다음날 진행할 실험에 대하여 머리속에 새겨넣고서야 자리에서 일어났다.
아무리 바쁘고 복잡한 일들이 겹쌓여도 하루사업을 구체적으로 총화해보고 앞으로의 사업계획을 세우는것은 닭공장에서 지배인으로 일할 때부터 굳어진 습관이였다.
실험실을 나서니 어디선가 장마구름이 밀려오는지 하늘은 잔뜩 흐려있고 캄캄 어두웠다.
《들어갑니다. 근무를 잘 서세요.》
송영숙은 자전거를 끌고 운수직장 정문을 나서며 한마디 하였다.
접수실 경비원은 기사장의 고정된 인사말에 습관됐는지 무관심한 어조로 《예-》하며 말꼬리를 길게 늘구었다.
송영숙이 지친 걸음으로 집마당에 들어서니 여느때와 달리 아래웃방에 불이 환하였다.
살며시 문을 열고 부엌에 들어선 그는 곧장 세면장에 들어갔다.
그가 세면장에서 손발을 씻고 나오니 어머니는 부엌에서 저녁상을 차리고있었다. 많지 않은 식구여도 매 사람 식사시간이 달라서 어머니의 수고가 이만저만 아니라고 생각한 송영숙은 자기 혼자 먹을테니 어서 들어가라고 말했다.
했으나 어머니는 그가 수저를 놓을 때까지 그냥 곁에 앉아있었다. 송영숙이 자리에서 일어나려고 궁싯거릴 때에야 못마땅한 눈길을 쳐들었다.
《요센 왜 이렇게 늦어지냐? 뭐가 그리 바빠서 맨날 한밤중에 들어오는지 모르겠구나.》
뜻밖의 지청구앞에서 송영숙은 다소 놀랐다. 지금껏 딸이 하는 일에 대하여 일체 간섭을 모르고 오로지 받들어주기만 하던 어머니가 아니던가. 그런데 오늘… 은근히 불쾌해지기도 하고 긴장해지기도 하였다.
《할일이 너무 많아서 그래요. 그런데… 무슨 일이 있었나요?》
(애들이 앓는가? 아침에는 별일 없었는데…)
송영숙은 어머니의 얼굴에서 그 대답을 찾으려고 유심히 지켜보았다.
《일이야 무슨… 내 보기엔 집살림이나 남편 생각을 다 던져버린것 같아서 그러지.》
《경아 아버지가 뭐라고 하던가요?》
《그 사람이야 어디 쓰다 달다 말이 있니? 하지만 난 그게 더 맘에 걸린다. 애들 큰에미도 그러지 않았니? 남편에게 너무 무관심하다구…》
어머니의 책망은 길지 않았다. 그러나 송영숙에게는 무척 자극적이였다.
《아무리 바쁘고 힘들어두 남편에게 성의를 다해라. 가정생활과 부부생활에 충실한것두 훌륭한 녀성의 품성이란다. …》
문득 귀전에서 언니의 말이 울려왔다.
《…영숙아! 난 네가 행복하기를 바란다. 사회적으로도 가정적으로도 모두 행복해라. 그러자면 남편을 잘 받들어야 해. 그래야만 옹근 행복을 가질수 있으니까.》
떠나기 전날 밤 언니가 속삭이던 말을 되새겨보던 송영숙은 깊은 자책에 잠겼다.
(내가 정말 경아 아버지에게 무관심했어. 매일 이렇게 늦게 퇴근해오면서도 례사롭게 생각했으니까. 그러다가 정말
생각만 해도 오한이 나듯 온몸이 오싹했다.
《내가 요즈음 바쁘다나니 그렇게 됐어요. 하지만…》
그는 변명하듯 말했다. 그러나 말꼬리를 여물구지 못했다. 실험이 끝날 때까지는 매일 늦어지지 않을수 없기때문이다.
(먹성인자, 먹이유인제를 찾을 때까지는…)
그는 마음속으로 이렇게 부르짖었다.
《어떻든 경아 아버지를 잘 리해시켜라. 매일 곁에서 보기가 딱해서 못봐주겠더라.》
친정어머니도 그 이상 어쩔수 없는지 퉁명스럽게 한마디 하였다.
부엌에서 올라온 송영숙은 웃방에 불이 켜져있는것을 보고 남편이 아직 잠자리에 들지 않은 모양이라고 생각하였다. 그는 조심히 웃방문을 열었다.
《난 물고기식당 책임자가 들어오는가 했구만.》
콤퓨터에 입력된 자료를 읽고있던 남편이 문소리에 눈길을 들었다.
송영숙은 억지스러운 웃음을 지었다.
《아직 쉬지 않았군요. 늦게 들어와서 미안해요.》
그는 남편의 기색을 살피며 한마디 하였다. 남편의 기분은 여느날과 다름없었다. 그는 인츰 콤퓨터를 끄고 방바닥에 내려앉았다.
《일없소. 이젠 당신을 기다리는데 습관됐으니까. 그런데 몇달째 풍기는 이 비린내는 뭐요?》
남편은 미간을 찌프리며 물었다. 송영숙은 시무룩이 웃어보였다.
《시약냄새예요. 자주 만지니 이젠 냄새가 몸에 푹 배인가봐요. 아무리 옷을 갈아입구 목욕해두 없어지지 않는군요.》
그는 난감한 표정을 지었다. 하면서 남편에게 지금처럼 늦게 들어오게 되는 사연을 이야기하기가 수월해진다고 생각하였다. 이제는 더 이상 남편에게 숨길수도 없었다.
옷을 갈아입은 그는 남편의 옆에 다가앉으며 물끄러미 쳐다보았다.
《여보! 난 지금 운수직장안에 실험실을 꾸려놓았어요. 그리구 거기서 첨가제에 필요한 먹성인자를 연구하고있어요.》
《먹성인자를?》
남편이 주의깊은 눈길로 되물었다. 안해의 속마음을 들여다보듯 지친듯한 그의 얼굴에서 눈길을 떼지 못했다.
송영숙은 머리를 끄덕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