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107 회)
제 4 장
불타는 지향
13
(2)
지난 여름철에 실험실 꾸리는 문제를 내놓으며 《장난삼아…》하고 말할 때에는 그저 무심하게 생각했던 당비서였다.
그런데 오늘 송영숙의 어머니를 만나 매일 점심을 건느다싶이 하면서 자정이 넘을 때까지 무슨 실험인지 연구인지 한다는 말을 듣고서야 결코 《장난삼아…》하는 일이 아님을 직감했던것이다.
정작 실험실에 들어와보니 의혹은 더 커졌다.
기사장이 골라골라 남들의 눈에 잘 띄우지 않는 구석진 곳에 실험실을 정한것도 일리가 있다고 생각되였다.
《기사장동문 지금 몇달째 사람들의 눈을 피해가면서 무언가 하고있는데… 큰 비밀이 아니라면 나한테 말해줄수 없습니까? 예?》
당비서의 말에 송영숙은 눈길을 들었다.
그는 어쩔수 없는 운명에 봉착한듯 심호흡을 하였다.
《비서동지! 제가 미처 자기의 사업과 생활에 대해 당조직에 보고하지 못해 미안합니다. 늦었지만 이제라도 모든걸 터놓으려 하니 용서해주십시오. 그러나 한가지… 조건부가 있습니다.》
《?!》
《그건 저… 제가 하는 일을 당비서동지만 알구계셔달라는겁니다.》
김춘근은 기사장의 얼굴을 유심히 건너다보았다. 이윽고 그는 머리를 끄덕끄덕하였다.
그제야 송영숙은 책상우에 쌓여있는 몇권의 책을 당비서앞에 밀어놓았다.
《이건 제가 닭공장에서 지배인으로 사업하던 그때부터 몇년동안 정리해온 실험일지들입니다.》
《닭공장에서부터 정리해온 실험일지라구요?》
김춘근은 그의 말을 되물었다.
《예, 전 그때부터 새로운 첨가제를 연구하였답니다. 그런데 이것이 정기사가 지금 연구하는것과 거의 같지 않겠습니까?》
《?!》
당비서는 시약으로 얼룩지고 누렇게 퇴색된데다가 보풀진 실험일지들과 기사장의 얼굴을 번갈아 쳐다보았다.
풀기 어려운 난감한 문제와 맞선듯 그는 미간을 쪼프리였다.
송영숙은 눈길을 떨구며 말을 이었다.
《…하지만 전 남편의 뜻대로 제가 지금껏 연구한것들을 정기사가 알아차리지 못하게 모두 넘겨주었습니다. 정기사동문 남달리 자존심이 강한 사람이 아닙니까? 만약 자기가 남의것을 받았다면 모욕으로 생각하고 받지 않을것입니다. 그래서…》
《…》
《그리구 지금은 먹성인자를 찾기 위한 연구를 하는중입니다.》
그는 모든것을 솔직하게 터놓았다.
《먹성인자연구를요?》
당비서의 눈은 또다시 커졌다.
송영숙은 지난 여름 공장첨가제와 수입첨가제의 비교측정때 먹성인자를 반드시 찾아야겠다고 결심하였다는데 대하여 덧붙여 말했다.
김춘근은 한동안 그를 유심히 건너다보았다.
하면서도 의혹의 실머리를 놓치지 않았다.
(바늘구멍으로 황소바람이 들어온다는 이 추운 겨울에 문을 열어놓고 선풍기까지 돌리는것은 과연 무엇때문인가? …)
그는 연구에 필요한 설비와 자재들에 대하여 하나하나 묻기 시작했다. 그는 곧 와뜰 놀라며 굳어졌다.
군부대정치위원으로 복무하다가 제대되여 화학공장당위원회 부원으로 몇달간 사업했던 그는 거기서 나오는 페설물이 어떤것인가를 너무도 잘 알고있었다.
《화학공장페설물로 연구한다구요? 그게 어떤거라구… 안됩니다! 절대루 안됩니다!》
김춘근당비서는 끔찍한 일이라도 목격한듯 목소리를 높이였다.
송영숙은 언제나와 같이 부드러운 웃음을 지었다.
《근심마십시오. 저의 건강에 대해선 제가 잘 알아서 주의할테니 제발 다른 사람들에겐 얘기하지 말아주십시오. 사실 이 페설물에 대해선 저의 남편과 어머니두 모르고있습니다. 그러니…》
《그러니 나더러 눈을 감으라는건데… 난 그렇겐 못하겠습니다.》
그는 여전히 격한 어조로 말하며 홱 머리를 저었다.
송영숙은 야속한 눈길로 당비서를 건너다보았다.
잠시후 그는 첫사랑을 약속하는 처녀의 숫된 심정이런듯 얼굴을 붉히며 나직한 어조로 말했다.
《비서동지! 전 기사장이기 전에… 이 나라 공민입니다. 공민으로서 나라의 가금업발전을 위해 적은 힘이나마 다 바치고싶은게 소원입니다. 그리구 전 지금… 당분공을 수행하고있습니다. 첨가제연구를 힘껏 돕는건 제가 받은 첫 당분공이 아닙니까, 예?》
너무도 조용히, 그러나 너무도 절절하게 말하는 그를 건너다보며 당비서는 마음이 뭉클 젖어들어 눈길을 떨구었다.
이윽고 그는 한폭의 인물화앞에서 그 아름다움과 생동함 그리고 수백마디의 언어로써 표현되는 주인공의 심리를 감상하듯 오래도록 송영숙을 바라보았다. 얼마후에야 그는 이렇게 말했다.
《이미 약속을 했으니 기사장의 부탁을 지켜야지요. 하지만 내 당비서로서 권고하구싶은건 실험을 한다해도 이 겨울엔 중지했다가 따뜻한 봄날에 시작했으면 합니다. 그러지요, 기사장동무?》
그는 마치 웃사람에게 간청하듯 말했다.
송영숙은 빙긋이 웃으며 량해를 구했다.
《지금 가져다놓은 저 페설물을 다 쓸 때까지만…》
송영숙의 크고 정기어린 눈은 애타게 호소하고 절절히 간청하고 심심히 애원하고있었다. 어떤 거역할수 없는 억센 힘까지 발산되였다.
그 힘에 끌려 당비서는 머리를 크게 끄덕이였다.
다음날 점심시간에 김춘근당비서는 또다시 실험실에 찾아왔다. 그의 손에는 키높은 선풍기를 넣은 지함이 들려있었다.
실험실에 들어선 당비서는 말없이 선풍기를 조립하여 교반기옆에 놓아주었다. 그다음 도람통을 기울여 페설물을 실험용기에 담아주고 어설프게 놓여있는 전기선들도 한켠에 밀어놓았다. 무엇이든 도우려고 실험실을 둘러보던 그는 송영숙이 몹시 따분해하는것을 느끼였다.
그는 자주 찾아오겠다고 한마디 하고는 실험실을 나섰다.
송영숙은 말없이 당비서를 바래웠다.
(비서동지! 고맙습니다! 내 기어이…)
문가에서 물러선 그는 세차게 돌아가는 선풍기를 한동안 바라보았다.
가슴속 깊은 곳에서 불뭉치같은 뜨거운것이 울컥 솟구쳐올랐다.
송영숙은 눈을 슴벅이였다. 이윽고 그는 다시 교반기곁에 다가섰다. 교반기는 힘차게 돌기 시작했다.
크고 작은 두대의 선풍기도 경쟁바람을 일으키며 신나게 돌고 또 돌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