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112 회)

제 5 장

사랑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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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그토록 정다운 마음으로 그려보는 서정옥이 다름아닌 기사장때문에 벌써 며칠째나 속앓이를 하고있음을 모르고있었다.

《오빠! 그게 정말이나요? 기사장이 저혼자 따로 첨가제연구를 한다는거 말이예요.》

서정관에게서 송영숙이 운수직장안에 실험실을 따로 꾸리고 첨가제연구를 하고있는데 당비서까지 도와나선다는 말을 들은 정옥은 그만 악 소리를 치며 까무라칠만큼 놀랐다.

거기에다가 며칠전엔 첨가제연구성과를 가지고 전국적인 보여주기를 하게끔 되여있는것을 기사장이 단독결심으로 취소시켰다는 말을 듣고는 억이 꽉 막혀서 풀썩 주저앉고말았다.

《기사장동지가 어쩌면… 어쩌면 기사장이…》

그에게는 자기의 억울하고 분한 심정을 그대로 표현할수 있는 적중한 말마디들이 잘 떠오르지 않았다. 그러나 방송화는 능수였다.

《그게 바로 복수라는거요.》

남편과 시누이의 말을 듣고있던 그는 단도직입으로 말했다.

《기사장은 일철이 아버지가 잘되는걸 절대 바라지 않아. 겉으로는 도와주는척 했지만 속으로는 복수를 하는거지 뭐요?》

헐뜯기명수의 말은 서정옥의 귀에 솔솔솔 흘러들었다. 그리고 즉시에 효력을 발생시켰다.

정옥은 두손으로 얼굴을 가리우고 흑흑 흐느끼였다.

그를 위로하면서도 방송화는 여전히 입방아를 찧었다.

《보여주기를 뒤로 미루게 한거야 그만두라는 말을 못해서 하는 말이지.》

남들이 맛있게 먹는 깨밥에 서슬을 치는것은 누구나 할수 있는 일이 아니지만 그것을 즐겨하는 사람도 있는것이다.

안타까운것은 그것을 가려보지 못하는 암둔성이다.

한동안 설음에 겨워 눈물을 흘리던 정옥은 마음이 약간 진정되자 남편과 기사장의 남다른 관계에 대하여 털어놓기 시작했다.

눈물이 가랑가랑 맺힌 눈으로 남편이 유상훈박사에게 하던 말을 옮기는 시누이를 보며 방송화도 제법 눈굽을 찍었다.

이윽고 그는 선언하듯 말했다.

《두고봐! 아마 그 녀자한테 잘되는 일이 없을걸! …》

그날 저녁 집으로 돌아온 서정옥은 남편에게 기사장이 전국적인 보여주기를 취소시킨걸 아는가고 조심히 물었다. 자기의 가슴은 아플지라도 남편의 마음속엔 상처가 없기를 바라는 그였다.

《알구있소. 지배인동지가 얘기하더구만. 연구를 더 잘하라면서…》

남편은 긴말을 하지 않았다.

정옥은 별생각없이 말하는 남편을 쳐다보며 그도 이 사실이 불쾌하여 덮어버리려 하는줄로 지레짐작하였다.

(지배인동지도 저이가 서운해할가봐 위로해주었을거야. … 그런데 당비서동지는 기사장이 첨가제연구를 가로채려는걸 모를가? … 어떻든 기사장은 너무하구나. 앞뒤가 다른 나쁜 녀자! 내 그런줄 모르고… 천길 물속은 알아도 한길 사람속은 모른다더니…)

서정옥은 기사장을 저주하고 원망하며 간밤을 뜬눈으로 보내였다.

그러나 그밤에도 송영숙은 실험실을 떠나지 못하고있었다.

화합물의 온도변화에 마음을 쓰며 그는 몇시간째 꼼짝않고 앉아있었다. 그의 모든 생각과 마음은 오로지 먹성인자를 찾기 위한 연구에만 가있었다.

한동안 긴장한 눈길로 페설물의 반응상태를 지켜보던 송영숙은 문득 마음속에 봄바람이 살랑살랑 불어오는것을 느꼈다.

《푸른 하늘 은하수 하얀 쪽배에…》하고 부르는 소녀의 청고운 노래소리가 울려왔던것이다. 송영숙은 얼른 손전화기를 꺼내들었다. 이맘때면 항상 어머니나 남편에게서 전화가 걸려오군 했다.

그런데 오늘은 딸 경아의 채롱채롱한 목소리가 귀전에 울려왔다. 이제는 제법 전화기를 들고 엄마와 전화를 곧잘하는 경아였다.

《엄마! 나 빨간별 탔어요.》

《그래? 우리 경아 뭘 잘해서 빨간별 탔을가? 응?》

송영숙은 쉽게 딸애와 같은 동심에 잠기였다.

《피아노 잘 타서! 선생님이 내가 제일 잘한대요.》

《무슨 노래를 탔니?》

《〈조선의 노래〉!》

유치원 높은반인 딸애의 목소리엔 자랑이 함뿍 담겨져있었다.

송영숙에게는 빨간별을 가슴에 달고 피아노건반을 오르내리는 귀여운 딸애의 고사리같은 손이며 이쁜 얼굴이 막 보이는것같았다.

언젠가 다른 애 엄마들은 매일 유치원에 찾아와 피아노타는 모습을 봐준다고 울먹이던 딸애의 목소리도 들려오는것같았다.

(이번 6. 1절엔 유치원에 꼭 가봐야지. …)하고 그는 생각하였다.

《우리 경아 참 용쿠나. 그래 은아는 지금 뭘하니?》

《할머니가 죽을 먹여요.》

경아의 대답을 들으니 제비처럼 암죽을 받아먹는 작은딸의 얼굴이 눈앞에서 얼른거렸다. 바쁘다고 뛰여다니는 엄마한테서 젖 한모금 변변히 먹지 못했지만 할머니의 두손에 떠받들려 용케도 앓지 않고 자라는 애였다. 자름자름하게 생기고 애리애리한 경아와는 달리 아버지를 닮아서 생김새가 큼직큼직하고 몸도 실했다.

문득 기사장사업을 시작한 첫해에 태여난 아이여서 임신중에 류산시켜버릴가 했던 일이 떠올랐다. 그러자 말 못하는 어린것에게도 죄스러운 마음이 들었다.

송영숙은 애틋한 마음으로 두 딸의 얼굴을 그려보았다.

그의 마음은 어느새 나래를 펴고 아이들의 곁으로 날아갔다. 그는 두 아이를 담쑥 품어안고 차례로 꽃잎같이 연하고 보드러운 아이들의 볼에 입술을 대이며 살뜰히 애무해준다. 그다음에는 따뜻한 아래목에 팔베개를 하고 나란히 누워서 조용조용 자장가도 불러준다. 아이들의 얼굴에 피여나는 고운 웃음꽃…

송영숙의 얼굴에도 웃음이 피여났다.

《경아야!》

그는 조용히 딸애의 이름을 불렀다.

《엄만 일을 더 해야 한단다. 그러니 할머니랑 은아랑 같이 어서 자거라. 아버지도 어서 쉬라고 말씀드려라. 응?》

그는 남편도 손전화기의 확성기를 통해 자기의 목소리를 듣고있다는걸 알고 미안한 어조로 말했다.

통화를 끝냈지만 그의 마음은 한동안 아이들의 요람에서 떠나지 못했다.

송영숙은 어둠이 깃든 창밖너머를 바라보며 마음속으로 속삭이였다.

(경아야! 은아랑 함께 꽃담요에 묻혀 아름다운 꿈나라로 어서 날아가거라. 그리고 아침이 창앞에 다가올 때면 어서 일어나 꽃나비처럼 춤도 추고 종다리처럼 고운 노래를 불러라!

너희들을 위해 저 하늘의 해님은 더 밝게 비치고 땅우엔 온갖 꽃이 만발하단다.

엄마는 이밤도 너희들의 요람을 지켜 노래를 부르고있다. 그리고 더 아름다운 앞날을 너희들에게 안겨주기 위해 이밤도 지새운단다.

잘 자거라! 사랑하는 내 딸들아! …)

이윽고 송영숙은 다시금 반응기앞에 다가앉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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