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119 회)

제 5 장

사랑의 힘

6

 

송영숙은 날이 밝아서도 잠자리에서 일어나지 못했다.

요즈음엔 남편도 출장떠나고 없으니 지난밤에도 자정이 훨씬 넘어서야 실험실을 나선 그였다.

지금 그의 온몸은 땅속으로 하냥 잦아들기만 하였다. 다른 일이 없다면 이틀이고 사흘이고 그냥 누워있고싶었다.

부엌에서는 물소리와 그릇이 닿는 소리들이 문짬으로 간간이 들려왔다.

어머니가 아침밥을 짓고있었다.

송영숙은 어머니를 도와 집짐승들에게 아침먹이도 주고 마당청소도 하고싶었다. 여느날엔 남편이 하던 일이였는데 지금은 출장중이여서 그 모든 일이 어머니의 어깨우에 덧놓이게 되였다.

어머니에게 미안한 생각이 들었지만 피로가 몰려와 눈도 떠지지 않았다.

그는 나른한 몸을 반듯이 하고 누워서 어제까지 진행한 실험결과를 하나하나 더듬어보았다.

이윽고 그는 감고있던 눈을 번쩍 떴다. 어제밤 농축시험을 하면서도 느낀것이지만 베타인합성의 실마리를 잡은것같은 열띤 흥분이 그의 온몸에 찌르르- 전률을 일으켰던것이다.

(반응과정의 온도변화를 다시금 살펴보자. 베타인합성의 열쇠는 바로… 그러니 먹성인자는…)

송영숙은 빨리 실험실에 나가고싶었다.

출근시간전에 실험실에 들려 다시한번 확인하고싶었다.

(기술테타만 잡으면 그 공정대로 누구든 쉽게, 또 그 어떤 피해도 받지 않고 안전하게 먹성인자를 합성해낼수 있다. …)

그는 힘겹게 자리에서 일어났다.

세면장에 들어가 찬물로 쫙쫙 세면을 하고나니 몸이 거뜬해지고 어디선가 힘도 생기는것같았다.

송영숙은 어머니에게 빨리 아침밥을 먹자고 말한 다음 아래방에 들어갔다.

두 딸은 아직도 자고있었다. 잠결에도 꿈나라를 찾아가는지 큰딸애가 캐드득 웃자 무엇을 속삭이듯 얼굴을 맞대고 누운 작은딸애의 꽃같은 얼굴에도 웃음이 비끼였다.

잠자며 웃는 아이의 얼굴보다 더 고운것이 무엇이랴.

송영숙의 얼굴에도 웃음이 피여났다. 그는 머리를 수그리고 두 아이의 볼에 차례로 입술을 대였다. 꽃잎처럼 연하고 따스한 피부를 감촉하는 순간 그의 가슴은 형언할수 없는 기쁨으로 뭉클 젖어들었다.

한동안 아이들을 애무해주던 송영숙은 차던진 담요를 덮어준 다음 즐거워진 마음으로 거울앞에 다가앉았다.

그는 출근시간을 재촉하듯 서둘러 머리를 빗기 시작하였다.

다음순간 그의 입에서는 가느다란 비명소리가 터져나왔다.

빗살이 머리에 닿자마자 머리카락이 한웅큼 빠져나왔던것이다.

(아니! 이게 왜 이럴가? …)

깜짝 놀란 그는 다시금 조심스레 머리를 빗어보았다. 또다시 뭉청뭉청 뽑아지는 머리카락…

송영숙의 가슴속에서 무엇인가 철렁-내려앉았다. 무섬증이 머리를 쳤다.

그는 후들후들 떨리는 두손으로 수북하게 뽑혀진 머리카락을 와락 움켜쥐였다. 새털처럼 총이 가늘고 포시시한 머리카락이였다.

누구나 부러워하던 총이 굵고 숱이 많으면서도 윤기흐르던 어제날의 탐스러운 머리카락이 아니였다.

(이게 무슨 일일가? …)

그는 눈길을 들고 거울을 들여다보았다.

거울속에는 눈확이 움푹 패이도특 살이 빠지고 머리카락이 듬성듬성한 낯선 늙은이가 자기를 마주보고있었다.

거울앞에 마주앉을 때마다 자기의 아름다움을 의식하고 남모르는 기쁨과 자랑을 느끼군 하던 송영숙이였다. 그런데…

그의 눈가에 맑은것이 핑- 고여올랐다. 이윽고 방울방울 떨어져내렸다.

(아! 야속하구나! 내가 애타게 찾던 먹성인자는 결국 나의 젊음과 육체를 파괴시킨 대가로 얻게 되였구나! …)

송영숙은 거울앞에 앉아 어깨를 떨기 시작하였다.

부엌에서 아침밥을 먹자는 어머니의 목소리가 들려왔지만 그는 아무런 대꾸도 하지 못했다.

잠시후 방안으로 올라온 문춘실은 거울앞에 그린듯이 앉아있는 딸에게로 다가섰다. 그러다가 방바닥에 수북한 머리카락과 딸의 머리를 내려다보고 풀썩 주저앉았다.

《이게 뭐냐? 응? 도대체 이게 뭐냐?》

그는 머리카락을 움켜쥐고 떨리는 목소리로 같은 말을 반복했다.

송영숙은 여전히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목구멍이 막혀버린듯 무슨 말도 할수 없었다.

문춘실도 억이 막힌듯 헛손질만 할뿐 멍하니 쳐다보기만 했다.

이윽고 송영숙은 뽑아진 머리카락을 한오리도 허실할세라 종이에 뭉그려 쌌다. 자리에서 일어선 그는 머리카락을 싼 종이꾸레미를 건사해두려고 웃방에 올라가 옷장문을 열었다.

그 순간 아버지의 군복이 눈앞에 확 안겨왔다.

《아버지!》

송영숙은 나직이 아버지를 불렀다. 또다시 눈굽이 확 달아올랐다. 그는 떨리는 손으로 아버지의 군복을 쓰다듬었다. 문득 귀전에 아버지의 목소리가 들려오는것 같았다.

《장하다, 내 딸아! 언제나 이 나라의 딸답게 용감하고 억세게 일어나거라. 나는 너를 믿는다. …》

송영숙의 가슴은 뭉클 젖어들었다.

《아버지!》

그는 더운것을 꿀꺽 삼키며 아버지의 군복을 쓸어보고 또 쓸어보았다.

잠시후 웃방에서 내려온 그는 다시 세면장에 들어가 세면을 하면서 눈물자욱을 지웠다.

그는 어머니의 간청에 못이겨 아침밥을 몇술 떴다. 이윽고 그는 자리에서 일어나 출근준비를 서둘렀다.

《병원에 가볼 생각은 하지 않구 또 나가니?》

문춘실은 역증을 내며 물었다.

송영숙은 무표정한 얼굴로 무뚝뚝하게 대답했다.

《오늘은 나가야 해요, 며칠동안은… 그다음엔 병원에 갈테니 너무 근심마세요.》

그는 웃방 옷걸이에 걸려있던 푸른 바탕에 점점이 흰 꽃무늬가 있는 수건을 벗겨들었다. 그는 수건을 깊숙이 눌러쓴 다음 집을 나섰다.

길가에는 아직 출근하는 사람이 별로 없었다.

실험실을 향해 자전거를 몰아가던 송영숙은 또다시 자기자신에게 물었다.

(내가 정말 하나밖에 없는 귀중한 생명과 무모한 장난질을 하는게 아닐가? … 나의 젊음과 육체를 내 손으로 파괴하는 어리석은 장난질을 오늘도 계속 하려는게 아닐가? …)

문득 남편의 얼굴과 함께 잠자며 웃던 경아와 은아, 두 딸애의 꽃같은 얼굴이 눈앞에 다가들었다.

(나는 사랑하는 남편을 둔 안해이고 귀여운 딸자식들을 가진 어머니이다! 나의 건강은 우리 가정의 행복이다! 그러니 이 귀중한 생명과 장난질을 하는건 너무도 무모하지 않은가? …)

자전거도 점차 속도를 늦추기 시작했다.

다음순간 아버지의 군복이 떠오르며 눈굽이 화끈 달아올랐다.

이윽고 송영숙은 마음속으로 웨쳤다.

(장난질이라도 좋아! 먹성인자를 찾아낼수만 있다면… 그리고 아버지의 군복앞에 떳떳하고 남편과 함께 우리 경아와 은아의 맑은 눈동자앞에 내 언제나 떳떳할수 있다면…)

느닷없이 마음이 숭엄해지고 몸가짐도 경건해지였다.

아버지의 군복과 더불어 조국의 자유와 독립을 위하여 그리고 조국의 귀중한 한치의 땅을 위해 청춘도 생명도 사랑도 가정도 아낌없이 다 바친 이 나라의 훌륭한 녀투사들의 모습이 눈앞에 안겨왔다. 최희숙, 리계순, 조순옥, 조옥희, 안영애…

(어찌 그들뿐이랴!

이 세상엔 얼마나 많은 녀성들이 지혜와 재능으로, 힘과 열정으로 조국을 받들고 인류공동의 복리를 위해 자기를 다 바쳤던가! …)

어릴 때부터 책읽기를 즐겨온 그는 소설책과 영웅들과 명인들의 전기를 많이 읽었다. 녀류작가들의 작품들도 남달리 사랑하였다.

그 책들은 송영숙에게 고귀하고 값높은 삶이 무엇인가를 말없이 가르쳤고 그들처럼 조국을 위한 아름답고 값높은 삶을 지향하도록 해주었다.

송영숙은 자기를 채찍질하였다.

(나도 아버지처럼 사회주의조국수호전에 나선 이 나라의 딸이다!

내 조국을 지키고 내 조국의 부강번영을 위해 사랑하는 나의 모든것을 기꺼이 다 바치리라!

나의 젊음을 다 바쳐 내 조국이 젊어지고, 나의 아름다움을 다 바쳐 내 조국이 더욱더 아름다워진다면 그보다 더 행복한 일이 또 어디 있으랴!

어머니라 부르는 한없이 귀중한 내 조국을 위해, 내가 살고 나의 딸들이 살고 그 후대들이 살아갈 이 땅을 위해 사랑하는 나의 모든것을 아낌없이 다 바치리라! …)

송영숙의 눈굽은 또다시 쩌릿이 젖어들었다.

그는 머리수건을 더 깊숙이 눌러쓰며 실험실을 향하여 자전거를 힘껏 몰아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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