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1 회)

 

대장부의 높은 지조

위급한 때 나타나니

나라향한 일편단심

죽는다 변할손가

 

  (조헌의 시중에서)

 

상편

대궐주추돌을 피로 물들이다

제 1 장

귀양지에서 돌아온 조헌

1

(1)

 

1589(기축)년 섣달초입에 접어들자 때를 기다리고있었던것처럼 맵짠 눈바람이 터져서 행길우에 눈가루를 휩쓸어가고 가까운 바다가마을의 초가이영을 여러 집 벗기였다.

길주 령동역참에도 련 사흘째 사나운 추위가 계속되였다. 마치 얼어죽을 사람은 다 나오라는듯이 령동천을 두터운 얼음장으로 뒤덮었고 박우물이든 드레박우물이든 마을의 물이란 물은 전부 흰 판돌처럼 만들어놓았다.

역참에서 그리 멀지 않은 산기슭에 외로이 서있는 허름한 초가집추녀도 금시 벗겨져 날려갈듯 쉴새없이 불어치는 찬바람에 시달리고 문풍지도 부웅부웅 괴롭게 울었다.

이른아침 떠오른 해가 눈보라에 가리워 불그스레하게 보일무렵 방금 아침밥을 치른 중늙은이가 역졸들이 입는 더그레를 입고 흰 머리카락이 보이는 머리에 꿩깃을 꽂은 벙거지를 쓰고 문밖을 나서려는데 아래목에 누운 안해 신씨가 가까스로 몸을 반쯤 일으켜세우고 병색이 짙은 얼굴을 들었다.

《어른께선 오늘같이 추운날에도 역참에 나가시겠나이까? 이런 날에 어느 량반관리들이 행차하리까.》

조갈든 입술사이에서 걱정이 슴배인 가냘픈 소리가 간신히 흘러나왔다.

《나라의 급한 역체(역참에서 공문을 넘겨주고 넘겨받는 일)면 이런 날, 저런 날 가리겠소. 내 걱정은 말고 약을 제때에 드우.》

중늙은이는 안해곁으로 다가가 어깨와 머리를 베개로 고이 받쳐주고 조심스럽게 자리에 눕혀주었다.

역참이란 고을마다에 혹은 고을과 고을이 멀리 떨어져있을 때에는 그 중간에 두고 역말을 갈아타는 곳이다. 이 역참을 리용하여 조정의 지시가 지방으로 내려가고 아래의 보고가 우로 올라간다. 그러나 그보다도 높고낮은 벼슬아치들이 사사용무로 마필을 쓰는 일이 많아서 역참은 언제나 분주스럽고 역졸들은 그만큼 일이 고되였다.

《죄송하오이다. 곡경을 겪는 어른을 도와주지는 못할망정 오히려 걱정만 끼쳐드리니.》

안해는 저도 모르게 눈물을 주르르 흘리였다.

《원, 별소리를 다하우. 부인이 병난것두 다 내 잘못이 가져온 일이니 죄송한것으로 말하면 내가 더하우.》

중늙은이는 안해의 눈물을 맨손으로 살틀히 씻어주었다. 비록 역졸의 옷을 입었지만 큰 키에 귀도 부처님의 귀처럼 큼직하고 두눈이 맑고 예리하였다. 또 그의 곧은 성미를 말해주듯이 코가 우뚝 솟고 보기 좋은 다박수염이 단정히 다듬어져있었다.

이 사람은 나라일이 매일, 매 시각 근심되여 1586(병술)년에 공주교수로서 상소를 올린것을 비롯하여 여러번 임금께 상소를 올렸던 조헌이다.

그러나 어느것 하나도 실현된것은 없었다. 조정의 정사는 나날이 부패해지고 간신무리들이 살판치고 백성들은 굶주림에 허덕이고 왜놈들은 때를 만난듯 우리 나라를 침범할 기회를 엿보고있었다.

조헌은 기울어지는 나라의 형편을 보고도 어쩔수 없는것이 한탄스럽고 불만스러워 차라리 벼슬을 내놓고 모든 근심걱정을 잊으려 하였다.

그는 1587(정해)년 9월에 드디여 공주제독관(종5품)을 사임하고 옥천의 향가로 내려갔었다. 제독관이란 한개 도의 량반관리들, 선비들, 백성들속에서 나라에 해독을 끼치지 못하도록 미리 막아낼뿐만아니라 감히 딴마음을 먹지 못하도록 제어하는 직분을 맡은 사람이다.

조헌은 나라와 백성을 위해 제독관의 직분을 대바르게, 청렴강직하게 지켜가느라고 애써보았지만 아무 소용이 없었다. 조정이란 웃물이 맑아야 아래물이 맑을것이 아닌가.

그는 시골에 내려와 가족들과 함께 농사도 짓고 글도 읽고 시문도 지으면서 마음편히 살아가려고 하였다. 하지만 임금생각, 나라와 백성에 대한 근심걱정은 시골에 내려왔다 하여 가셔지지 않고 날과 달이 흐를수록 더더욱 짙어갔다.

그리하여 그는 1588(무자)년 정초에 더는 참아낼수 없어서 아무런 벼슬도 없는 백면서생으로서 나라와 백성을 위해 피타는 상소문을 임금께 올리였다.

조헌은 상소문에서 《강을 다스리는 사람은 물길을 터놓아 인도하고 백성을 잘 다스리는 사람은 그들에게 살길을 열어주는것》이라고 하면서 헐벗고 굶주리는 백성들을 잘 돌봐줄데 대하여 제의하였다.

그러자면 조세를 탕감해주고 가혹한 군포제도를 없애며 온갖 가렴잡세와 공납을 덜어주어야 한다고 아뢰였다.

다음으로 교활한 왜놈들을 방비할 계책과 왜놈들과 련계를 끊으며 우리 나라를 강하게 만들어 왜나라를 징벌할 계책을 내놓았다.

상소문에는 별지가 있었는데 3정승들의 뢰물행위, 그들의 온갖 부정행위를 실례를 들어가며 강하게 규탄하였다. 이와 함께 조정의 높고낮은 관리들의 불법행위들을 신랄하게 지적하고 임금께 발라맞추면서 자기들의 부귀영달을 꾀하는자들을 조정에서 몰아내야 나라가 제구실을 할수 있다고 하였다.

조정의 간신무리들이 가만있을리 없었다. 그들은 해를 넘기면서까지 조헌을 헐뜯고 그의 상소문을 시비하면서 그를 죄인으로 몰아갔다. 마침내 그는 상소문을 올린지 1년이 훨씬 지나간 이해 1589(기축)년 5월부터 여기 길주 령동역에서 귀양살이를 하지 않으면 안되였다.

조헌은 20여년 벼슬자리에 있었다. 그러나 너무나 고지식하고 청렴결백하고 나라와 백성들을 위하는 마음이 올곧아서 제살궁리를 하지 못하였다. 그때문에 늘 가난하였다. 가족들은 조상대대로 물려주고 물려받은 땅을 가지고 제손으로 농사를 지었고 조헌의 록봉을 보태먹으며 살아왔었다.

그의 집에도 삼녀라는 처녀와 해동이라는 총각이 종으로 있었다. 처녀와 총각을 종으로 두고싶어서 둔것이 아니였다. 여기에는 그럴만한 사연이 있어 부득불 집에 데려오지 않으면 안되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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