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9 회)

상편

대궐주추돌을 피로 물들이다

제 1 장

귀양지에서 돌아온 조헌

2

(6)

  

방안에는 쌍학을 수놓은 커다란 돗자리가 깔려있고 그우에 자개박이 큰 음식상이 놓여있었다. 음식상옆에는 젊은 녀종 둘이 서있다가 한 녀종은 박표를, 다른 녀종은 완기를 안내하여 비단방석에 앉혀주고 은은한 빛이 도는 자그마한 사기주전자로 술을 부어주었다.

《너희들은 물러가도 좋으니라.》

박표는 녀종들을 내보낸 뒤에 완기에게 빙그레 웃으며 술을 권하였다.

《이 사람은 인재를 귀히 여기는 사람일세. 임자는 부모슬하를 멀리 떠나 객지에서 고생이 많기에 내가 오늘 성의를 표함이니 사양치 말고 음식을 많이 들게. 자, 나와 함께 한잔 하자구. 예로부터 동소동락을 즐기라 했거늘 우리라고 어찌 동소동락을 즐기지 않겠느냐.》 하고 호방히 웃었다.

완기는 너무도 황송하여 자리에서 일어났다가 음식상너머 박표를 마주하여 부복하였다.

《참으로 황송하옵니다. 저와 같이 한미한 선비의 자식이 어르신님의 집에 온것도 죄송하온데 이렇게 보기 드문 음식상에 함께 앉혀주시니 몸둘바를 모르겠나이다. 또 술까지 들라 하시니 그 은혜에 백골난망이오이다. 이처럼 친절히 권하는 술 한잔이 백잔처럼 생각되여 벌써 제 정신이 아니옵나이다. 하오니 더 권하지 마옵소서.》

《허허, 학문이 깊으니 하는 말도 명언명담일세. 임자는 내 마음에 들어. 그러면 음식을 들게.》

박표는 기분이 무척 좋아서 술을 단숨에 마셨다.

완기는 저가락에 떡 하나를 꿰여들었으나 입으로 가져가지 못하고 송구스러워 이럴지 저럴지 몰라하였다.

이때 설향의 방에서는 상전이 데려온 도련님을 주안상에 안내하고 술까지 부어주고 나온 시녀 옥섬이가 깜짝 놀랄 소리를 하였다.

마침 설향의 방에 들어와서 남편의 전갈이 나오기를 기다리고있던 설향이 어머니가 옥섬에게 다그쳐물었다.

《응?! 그게 무슨 소리냐? 다시말해라. 내가 알아듣게 차근차근…》

《예 마님, 글쎄 이런 희한한 일이 생길줄 어찌 알았소이까. 나리님이 데리고오신 도련님인즉 지난해 아씨와 나를 구원해준 도련님이 분명하오이다.》

그 소리에 마님은 깜짝 놀라 그게 사실인지 아닌지 믿어지지 않는지 재차 다그었다.

《뭐? 작년에 리천고개길에서 길도적들을 치고 아씨와 너를 구원해주었다던 그 도련님이라구?! 아니, 네가 잘못본게 아니냐?》

《틀림없나이다, 마님. 쇤네가 방금 도련님께 술까지 부어주고 나오지 않았소이까. 첫눈에도 확 안겨드는 도련님인데 얼마나 듬직하고 의젓한지 눈이 다 시그러워 마주보지 못하겠소이다. 호호…》

《아니 원, 이런 변이라구야. 어른께선 소년과거에서 으뜸으로 장원하고 성균관에 다닌다는 그 도련님을 데리고오겠으니 한번 보라고 하였는데 그가 바로 너희들을 구원해준 도련님이고나!》

마님은 기뻐서 어쩔줄 몰라하고 설향이는 너무도 꿈같은 소리에 두눈을 휘둥그레 뜨고 옥섬이를 바라보았다. 그는 지금껏 자기를 구원해주었던 총각을 마음속에 그리며 사모해왔는데 뜻밖에 아버님이 그를 데리고온것이다. 진짜 그 도련님일가. 이 눈으로 직접 보고 틀림이 없다면 당장이라도 달려가 반가운 인사를 드리고싶었다. 그때 구원을 받고도 고맙다는 인사조차 미처 하지 못하고 헤여지지 않았던가. 하지만 량반집 규방규수의 몸으로 체모를 흐트릴수 있으랴. 설향이는 설레이는 가슴을 지그시 눌렀다.

바로 이런 때에 안방에서 아버님의 부름이 호기있게 울려나왔다.

《여봐라. 게 누가 없느냐. 우리 두 사람끼리는 동소동락이 잘 어울리지 않는구나. 여기에 마님을 모셔오도록 해라.》

《예- 들어가옵니다. 》

남편의 분부를 기다리고있던 마님이 반기며 얼른 일어났다.

그는 둥실둥실한 몸에 입고있는 비단치마저고리와 머리의 금비녀를 바로잡으며 설향에게 가만히 일렀다.

《내가 안방에 들어가면서 방문을 방실히 열어둘터이니 너는 그 짬새로 도련님을 살그머니 살펴봐라. 그 도련님이 옳은가 제눈으로 보아라. 알았느냐?》

설향이는 방긋이 웃었다.

《예.》

마님은 안방으로 들어가면서 약속대로 문을 꼭 닫지 않고 기쁘게 웃으며 완기를 바라보았다.

완기는 또 황송하여 자리에서 일어나 무릎을 꿇으면서 절을 하였다.

《마님께 문안드리옵나이다.》

마님은 마치 오래간만에 만난 아들처럼 그의 손을 덥석 잡아 일으켜주면서 어깨를 어루쓸어주었다.

《어서 편히 앉게. 어른께서 늘 임자를 자랑하길래 내 마음속에도 늘 임자가 있었네. 과시 소년과거에 장원한 사람답게 인물 또한 장원이구만. 아이구나, 이런 젊은이가 내 집에 왔구나. 반갑네, 반가와.》

마님의 다사스러운 칭찬이 너무나 지나쳐서 완기는 오히려 거북스럽고 게면쩍었다. 왜 이리도 과남하게 환대하는지 모를 일이였다.

어머니가 방실히 열어놓은 문짬으로 속눈섭을 살짝 들어올리고 완기를 바라보던 설향은 저도 모르게 터져나오는 탄성을 막으며 얼른 하얀 손으로 입을 가리웠다. 하더니 처녀의 새별같은 두눈에 기쁨이 찰랑거리고 봉긋이 솟아오른 가슴이 행복으로 부풀어오르듯이 들먹이였다.

옳았다. 지난해 그때 담차고도 용맹하고 슬기롭던 그 총각이 틀림없었다.

마님은 갖가지 음식그릇들을 완기앞으로 가까이 옮겨놓아주면서 사위감이 볼수록 미더워 함박꽃같은 웃음을 피웠다.

그는 남편에게 자랑스럽게 여쭈어올리였다.

《어른께서 아직 모르시는 꿈같은 일을 알려드리겠나이다.》

《꿈같은 일이라니 그게 뭔데?!》

《바로 이 도련님이 지난해 사나운 길도적 세놈을 때려눕히고 설향이를 구원해준 도련님이시오이다. 그런데 어른께선 이런 사연을 모르시면서도 도련님을 제일 귀히 여기시고 집에 데려오셨으니 꿈인지, 생시인지 모르겠나이다.》

《아니 뭐, 그게 정말이냐?》

박표는 깜짝 놀라 입을 하 벌리고 마님은 《정말이오다. 참말 하늘이 인연을 맺어주었소이다.》 하고 완기를 와락 그러안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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