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20 회)

상편

대궐주추돌을 피로 물들이다

제 1 장

귀양지에서 돌아온 조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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며칠이 지난 어느날 저녁해가 뉘엿뉘엿 저물어갈즈음에 연안고을부사 신각앞에 젊은이 하나가 자기보다 어린 총각을 데리고왔다. 젊은이는 완기였다. 총각은 한기남이였다.

부사 신각은 굵은 붓으로 한일자를 새긴것같은 장미아래 두눈이 번쩍번쩍하며 해빛과 바람에 다스러져 거무스레해진 얼굴에 귀가 부처님의 귀처럼 큼직하고 떡 벌어진 어깨우에 목이 기둥처럼 솟아있어서 굳센것과 너그럽고 부드러운것을 다 겸하고있는 무장다왔다. 그는 완기가 품속에서 내놓은 조헌의 서신을 보고 반갑게 고개를 끄덕끄덕 하였다.

《네가 완기로구나. 정말 몰라보게 성장하였구나. 너의 부친과 함께 조정에 있을 때 네가 대여섯살 쬐꼬마한 아이더니 이렇게 대장부가 되였구나.》

신각은 조헌과 우의를 두터이하던 지난날을 감회깊이 추억하듯 한동안 말없이 완기를 바라보았다. 그는 조헌이 보내온 편지를 다시 보고 너그럽게 웃으며 눈길을 한기남에게로 돌리였다.

《이 총각의 이름이 덕보라지?》

《네, 덕보라 하옵니다.》

한기남은 죄송하고 송구스러워 달아오르는 얼굴을 숙이였다. 그는 완기가 자기를 구원하여 여기로 데려오면서 《이제부터 너의 이름은 덕보라고 고쳐야 하겠다. 덕보는 우리 집일가의 먼 친척아이의 이름인데 지난해 열다섯살때 열병으로 죽었다. 너의 이름을 그렇게 아버님이 고쳐지으셨다. 네 나이도 한살 불구어 열여섯이라고 했으니 그리 알고 만약을 대비해야 한다. 보은현에 새로 부임해오신 고을원은 우리 아버님이시다.》라고 하던 말이 떠올라서 덕보라고 하지 않을수 없었다.

《네가 효성이 지극하고 의리를 제 목숨처럼 여긴다고 이 편지에 적어보냈으니 나는 그 말을 믿는다. 오늘부터 관가의 통인으로 있으면서 짬짬이 글을 배우고 무술도 익혀야 하느니라. 너는 앞으로 왜놈들을 쳐서 부모의 원쑤를 갚아야 한다.》

신각은 조헌의 편지에 덕보가 왜놈들한테 부모를 잃은 총각이라고 한것을 실지로 믿는것이였다.

《네, 알겠소이다.》

덕보는 감격이 가득히 끓어올라 고맙다는 말조차 올리지 못하였다.

이리하여 덕보는 신각의 수하에서 수년간 자라 뛰여난 무술을 지닌 군사가 되였었다.

보름전에 신각사또는 덕보를 불러 긴히 당부하였다.

《중봉이 귀양갔다가 돌아오니 너는 그를 마중해 마천령을 넘어가야 하겠다.》

《네. 그렇사오니까?! 그분의 귀양이 풀렸단 말씀이오니까?!》

덕보는 어느때나 기다리던 반가운 소식에 눈물이 글썽하였다. 자기 생명의 은인이 나라와 백성을 위하다가 지난 봄에 귀양을 갔다는 소문을 듣고도 털끝만큼도 도와드릴수 없는것이 한스러워 내내 죄송한 마음을 안고 살아왔었다. 자기를 구원하기 위해 아들 완기와 젊은이 하나를 시켜 천렵놀이를 하는척 하게 하고 감영으로 압송되여가는 자기를 빼돌리도록 하였고 신각사또에게는 일가의 먼 친척의 아들이라고 편지까지 써보내준 은혜를 죽어도 잊지 못할 덕보인것이다.

《사또님, 소인이 그분을 마중가겠소이다.》

《그래라. 그분이 너를 만나면 기뻐하실게다. 그분이 이 추운 겨울에 찬바람을 막을만한 옷인들 있겠느냐. 내 그에게 보내는 편지와 입을것, 먹을것을 준비해줄터이니 래일 아침일찌기 떠나도록 해라.》

덕보는 뜨거운 눈물이 왈칵 솟아올라서 떠듬떠듬 대답을 올리였다.

《고맙… 소이… 다.》

덕보는 신각사또가 내준 썰매발구에 말을 메우고 밤낮으로 달려 마천령을 넘어왔었다. …

여기까지 자초지종을 다 아뢰인 덕보는 조헌앞에 무릎꿇고 엎드리면서 《사또님, 이렇게 오늘에야 사또님을 뵙게 된 소인 덕보를 용서해주시옵소서.》 하고 눈물을 흘리였다.

조헌은 감개무량하여 목메인 소리를 하였다.

《내가 시련이 중중첩첩한 이런 때에 너의 도움을 받는고나. 반갑기 그지없노라. 그러나 내가 너를 살려낸것은 이런 도움을 받으려고 한것은 아니였다. 다만 효성이 백옥같고 자기를 뒤쫓는 놈이 있어도 독뱀에 물린 처녀의 다리를 깨물어 피를 뽑아주는 착한 마음을 지녔기에 하늘도 감응하여 너를 살려낸것이다.》 하고 그의 손을 잡아 일으켜주었다.

《덕보 이 사람, 우리를 모르겠나. 응?》

완기와 해동이가 덕보를 와락 그러안고 자기들쪽으로 끌어당기였다. 덕보는 그때에야 완기와 해동이를 알아보고 탄성을 질렀다.

《아, 그때 시내가에서 천렵놀이를 하다가 이 사람을 구원해준 형님들이시구려.》

그는 완기와 해동이앞에 또 엎드려 절을 하며 눈물을 씻었다.

《절은 무슨 절, 그러지 말구 저기 구석에서 아까부터 우는 처녀가 누구인지 보게, 응? 어서 보라니까.》

완기의 말을 들으며 귀를 기울이니 구석에서 흐느끼는 소리가 조금 크게 들려왔다.

삼녀는 덕보의 이야기중에 뱀에 물린 처녀의 다리를 입으로 깨물어 피를 빨아내였다는 말이 나오자 깜짝 놀라 꿈인지 생시인지 몰랐다. 바로 저이로구나. 바로 저 군정이구나. 나를 살려내느라고 독사보다 더 악독한놈한테 잡혀서 죽을 길을 후회없이 간 사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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