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21 회)
상편
대궐주추돌을 피로 물들이다
제 1 장
귀양지에서 돌아온 조헌
5
(6)
이날이때껏 마음속에 소중히 안고있었던 사람을 이처럼 뜻밖에 만날줄이야 어이 알았으랴. 반가와서 울고 고마와서 울고 그 은혜를 어떻게 갚을지 몰라 안타까와서 울고 또 나리님과 완기, 해동이 오빠들이 저 덕보를 구원해준것이 더더욱 고맙고 감사해서 울고있었던 삼녀였다.
덕보는 자기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우는 처녀가 녀자다운 헤픈 눈물이 많아서 우는것이라고만 여겼지 자기와 못잊을 인연이 있어서 울고있는줄은 미처 몰랐었다. 헌데 처녀가 누구인가 보라니 도대체 처녀가 누구일가. 그는 어스크레한 방등불빛속에 누구인지 알아볼수 없었다.
이때까지 자리에 누워 덕보의 이야기를 들으며 눈물을 머금고있던 신씨가 몸을 반쯤 일으키였다.
《이 사람 덕보, 난 임자를 처음 보고 임자의 지난날 얘기를 처음 들었네만 독뱀한테 물리였던 우리 삼녀를 살려준 총각이 잡혀갔다는 말을 듣고 늘 임자를 생각하였네. 얘 삼녀야. 울지만 말구 은인앞에 큰절을 올려라.》
신씨는 삼녀의 등을 떠밀어주었다.
삼녀는 어쩔줄 몰라하다가 마님의 분부대로 덕보앞으로 몸을 돌리면서 일어섰다가 엎드리며 큰절을 하였다.
《군정님께 무슨 말로 고맙다고 할지 모르겠소이다. 이 몸에는 군정님 이발자리가 고이 아물어있사오니 이 몸을 다 바치겠… 소이…다.》
삼녀는 울음을 삼키면서 엎드린채 일어설줄 몰랐다.
신씨는 기쁘게 웃으면서 삼녀가 못다 쏟은 심정을 보태주었다.
《삼녀는 내가 낳은 자식이 아니지만 내 딸과 같이 이때껏 귀히 데리고있네. 앞으로도 놓아주고싶지 않지만 시집갈 나이가 한돌기, 두돌기 차오르는데 그걸 어떻게 막아주랴 그래서 좋은 혼처가 나지면 시집을 보내주려고 했지만 삼녀가 하는 말이 〈소녀를 구원해준 총각이 죽었는지 살았는지 모르는데 어찌 시집을 가오리까〉하구 임자만을 그리워하였네. 호호호-》
조헌이 다박수염을 만족히 쓸어만지면서 웃었다.
《허허… 그래야지. 은혜를 입었으면 제몸을 다할 때까지 갚는것이 도리지, 그 참, 세상일이란 이렇게두 기이한 인연을 만들어낼줄은 몰랐구만. 난 이 덕보가 구원해낸 처녀가 우리 삼녀인줄은 꿈에도 몰랐구려.》
밖에서는 눈보라가 지동치는데 방안에서는 눈물과 웃음으로 나누는 이야기가 한밤이 지나도록 끝날줄 몰랐다.
눈보라는 연안성에도 사납게 휘몰아쳤다. 말을 타고 성안팎을 돌아보는 신각부사의 몸에도 하얀 눈가루가 차겁게 들씌워지군 하였다.
그는 말을 멈춰세우고 부지중 멀리 아득한 산발너머 북쪽하늘가를 더듬었다. 여기 남쪽에도 날씨가 이렇게 사나운데 마천령을 넘어야 할 조헌은 얼마나 춥겠는가 하는 념려가 저절로 생겨난것이다.
덕보에게 겨울옷과 량식을 주어 마중보냈지만 마음이 놓이지 않았다. 덕보가 마천령을 넘었을가, 혹시 길을 어기지나 않았을가, 아니면 조헌일행을 만나 함께 오고있지 않을가 하는 생각이 가슴그득히 차올랐다.
그 아까운 사람이 귀양지에서 고생하다가 돌아오는 길에 잘못된다면 나라에 빈자리가 크게 날것이라고 생각되였다. 그만큼 신각은 조헌을 사랑하고 또 그 인품과 충의를 귀중히 여겼다.
신각은 조헌이 감찰벼슬(정6품)에 있을 때 병조의 참지(정3품)벼슬을 지니였다. 그는 조헌이 감찰로서 조정의 높고낮은 문무관리들속에서 비법불법행위가 나타날 때면 그 누구도 가리지 않고 대바르게 충고를 주거나 혹은 신랄하게 규탄하는것을 여러번 보았었다. 그때마다 공정하고도 사리정연한 그의 론거가 옳아서 신각은 늘 감탄하였다.
한번은 이런 일도 있었다. 조헌이 교서관 정자(종6품)로 있을 때 어느날 대궐에서 수직을 서고있었다.
밤이 들자 궁인 하나가 초롱불을 켜들고 직소(수직서는 곳)에 찾아왔다. 조헌은 궁인이 밤에 찾아온것이 뜻밖이여서 나직이 물었다.
《무슨 일이 생겼습니까?》
《대비께서 불공을 드리려고 급히 향을 바치라는 지시를 떨구었소이다. 어서 향을 바쳐야 하겠소이다.》
당시에는 대궐수직을 서는 사람이 향을 보관하고있는 방의 열쇠를 인계받고 인계해주도록 되여있었다.
《향은 나라의 제사때에만 쓰는것입니다. 불공을 드리자고 향을 내는것은 규정에 어긋납니다. 대비께서 이것을 모르시고 지시한것 같으니 여쭈어올리기를 바랍니다.》
조헌의 말에 궁인은 놀라듯 눈을 휘둥그레 뜨고 그를 바라보았다. 대비의 지시를 부당하다고 거역하는 사람도 있단 말인가.
《그런즉 향을 바치지 않겠다는 말입니까?》
《나라의 법을 어길수 없지 않습니까.》
《어허, 이런 변이라구야. 대비의 지시는 나라의 법과 같은데 그걸 어겼다가 무슨 화를 당하려고 하오이까?》
대비는 임금의 어머니이다. 임금도 대비의 요구라면 무엇이든지 들어주는것이다. 그런데 한갖 교서관 정자가 무엇이란 말인가. 궁인은 더욱 놀라 한걸음 뒤로 물러났다.
《그대는 제정신이 아닌가봅니다.》
궁인은 빈손으로 돌아갔다.
이 사실이 어전에 보고되여 임금이 펄쩍 뛰였다.
조헌은 다음날 즉시 파면되였다. 그는 이듬해에 복직되였지만 그후에도 향을 바치라는 대비의 지시를 거절하였다.
조헌은 이렇게 불의에 대해서는 대비나 임금앞에서도 조금도 주저하지 않고 대바르게 제할소리를 다하였었다. …
신각은
조헌은 품계높은 당상관인 신각이 자기 집을 찾아준것이 너무나 뜻밖이여서 황송히 방안으로 모셔들이였다.
방안에는 낡은 장농 하나와 그우에 포개얹은 이불이 두어채 있고 그외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다만 자그마한 웃방에 책이 가지런히 눕혀있는 서가가 옹근 벽면을 다 차지하고있을뿐이였다.
조헌이 청빈하게 살고있는것이 한눈에 알렸다.
감찰의 집이라면 뒤문으로 들어오는 무엇이 더러 있을수 있겠지만 조헌은 그런것을 하나도 받아들이지 않았음을 그의 가난한 살림살이가 말해주는것이다.
신각은 조헌이 심산유곡의 맑은 샘처럼 남이 알가모를가 깨끗한 마음을 지닌 사람임을 잘 알게 되였다.
신각이 조헌을 더 잘 알고 친분관계를 두터이하게 된것은 그때로부터 일년이 지난뒤였다.
그동안에 신각은 영흥부사(정3품), 조헌은 통진현 현감(종5품)으로 나가게 되여 서로 멀리 떨어져있었는데 신각은 일년반만에 나라의 방비상 매우 중요한 요충지인 강화도에 부사로 가게 되였다.
강화도는 통진현 바다건너에 있다. 신각은 통진현을 거쳐 강화도로 가는 길에 조헌을 반갑게 만나 그가 어떻게 고을을 다스리고있는지 알아보았다. 했더니 고을에서 굶어죽은 사람도 없고 집을 버리고 도망한 가호도 없었다.
들에 나가보니 때마침 봄이라 밭갈고 씨뿌리는 사람들의 웃음소리와 노래소리가 들려오고 바다에 나가보니 물고기를 가득 실은 배들이 포구로 들어오는데 고을의 배타는 군사(수군)들이 고기배를 향해 손을 저어주면서 벙글벙글 웃는 모양이 보여왔다.
신각이 또 군기소의 야장간에 가보니 웃동을 벗어붙인 장공인들이 줄땀을 흘리며 흥겹게 창과 칼을 벼리고있었다.
그는 마지막으로 고을 옥을 돌아보았다. 옥에는 죄수들이 없어서 텅텅비였다.
신각은 조헌의 손을 덥석 잡으며 껄껄 웃었다.
《그대야말로 백성들을 부모와 같이 돌봐주는 고을원일세. 백성들의 얼굴에 양기가 돌아 어디서나 백성들이 성수가 나서 일하고있는것을 보았네. 고을원이 법과 형벌이 아니라 인덕으로 백성들을 돌봐주고있다는것이 제꺽 알려.
허허, 내가 더 기쁜것은 통진고을에서 바다수비가 든든해지고 군기소가 평시에도 힘을 내서 일하고있는걸세. 내 지난 기간 병조에 있으면서 여기에 이따금 내려와보군 하였는데 그때에는 백성들이 많이 굶어죽고 많이 도망치고 한숨소리, 울음소리가 그치지 않았더랬네. 하니까 바다수비는 말할것두 없구 군기소엔 거미줄만 바람에 날리였네. 그런데 오늘은 그런 일이 언제 있었느냐싶게 달라졌거던. 하하하, 참말 자네가 돋보여 ,
중봉이, 이제부터 임자는 나와 함께 손을 잡구 바다를 굳게 지키자구. 이곳 현의 주산봉화대와 남쪽약산봉화대는 우리 강화도봉화대와 서로 신호를 주고받는 봉화대일세. 왜 바다만 지키겠나. 우리의 우의도 굳게 지켜야지. 하하하.》
《그 말씀을 들으니 감격을 금치 못하겠나이다. 소신을 이렇듯 믿어주시니 그에 꼭 보답하겠소이다.》
그후에 신각은 강화도부사로 있다가 6개월도 못되여 전라도방어사로, 그다음엔 연안부사로 벼슬자리를 옮기였는데 지금까지 류임하여오는중이였다.
조헌을 그리워하는 신각의 마음처럼 저녁노을이 붉게 타올랐다.
신각은 조헌과 같은 사람들이 조정에도 있고 각 도, 각 고을의 방백들과 원들속에도 있고 변방장수들속에도 있다면 나라의 기강이 바로서고 왜놈들이 감히 이 땅을 넘보지 못할것이라고 믿어졌다.
그는 조헌이 귀양지에서 무사히 돌아오기를 바라며 먼 북쪽하늘가를 오래도록 바라보고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