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22 회)
상편
대궐주추돌을 피로 물들이다
제 1 장
귀양지에서 돌아온 조헌
6
(1)
다음날 아침 일찌기 신각이 보내준 쌀로 지은 더운밥을 든든히 먹고 또 신각이 보내준 새 솜옷들을 두툼히 입은 조헌이네들은 주막집을 떠나 마천령을 넘기 시작하였다. 일행의 뒤에는 길량식을 실은 썰매발구우에 앉아 덕보가 따라갔다.
조헌은 멀고먼 고향길을 크게 걱정하지 않아도 되였다. 허지만 그의 마음은 무거웠다. 신각이 보내온 편지에 왜놈들의 기미가 심상치 않다는것이였다.
조헌은 문득 신각에게 시를 지어준 옛일이 떠올랐다. 그때 신각은 마천령이남의 군사들을 통솔하는 남병사의 벼슬을 지니고있었다.
하늘의 뭇별들 밝은빛 비쳐올 때
대장부 억센 기상 산악같이 일떠서네
하늘이 그대에게 장수담력 주었거니
남북방 오랑캐들 모조리 쓸어내리
그때 조헌은 신각에게 이렇게 고무하였었는데 오늘은 이 나라 대장부들이 신각이와 더불어 모두다 하나같이 일떠서서 왜오랑캐들을 모조리 쓸어버려야 할 때가 되였다고 생각하였다.
조헌의 분격은 하늘끝에 치솟아올랐다. 마천령이 하늘에 닿았다해도 그 분노의 산악에는 미치지 못할것이였다.
밋밋이 뻗어오른 령길의 좌우숲에는 흰눈을 뒤집어쓴 바위들이 마치 웅크리고있는 흰곰처럼 드문드문 보여왔다.
말들은 흰 코김을 힝힝- 내불면서 뚜벅뚜벅 기운차게 썰매를 끌었다. 세찬 눈보라가 나무가지의 눈을 흔들어 날려보내면서 고개길로 휩쓸어갔다.
그러나 조헌은 그것을 느끼지 못한듯 줄곧 깊은 생각에 잠겨 말을 몰아갔다.
(어떻게 하면 아직도 깊은 잠에서 깨여나지 못하고있는 임금을 정신차리게 할수 있겠는가. 이 조헌이 또다시 상소를 올려야 하겠는가. 임금의 어지에 언행을 삼가하고 극히 조심해야 한다고 하였는데 그것을 어기고 또다시 상소하여 죄를 쓰고 더 험한 사지판으로 귀양을 갈지라도 반드시 해야 할 일은 어떤 일이 있더라도 해야 하지 않겠는가.)
지난 5월에 마천령을 넘으면서 굶주린 백성들이 전염병까지 만나 떼죽음을 당하는것을 직접 보았었고 귀양이 풀려 돌아가는 이 추운 섣달에
얼어죽은 백성들을 보고도
조헌은 가슴이 꺼져내리는것처럼 괴롭게 한숨을 내쉬였다.
개주역참 늙은 역졸이 《나리님, 가시거들랑 상감마마께 백성들을 굽어살펴주십사 하고 말씀드려주시오이다.》하던 그 부탁이 귀에 쟁쟁해왔다.
《
뒤에서 덕보와 함께 발구를 타고오는 완기가 앞서가는 아버지에게 큰소리로 묻자 조헌은 무거운 시름에서 벗어났다. 그는 주변지세를 살피였다. 눈에 덮인 길 좌우에 바투 나앉은 나무들이 우중충하였다. 지난봄에는 나무잎이 무성하여 뒤가 보이지 않더니 지금은 눈을 들쓰고있지만 멀리까지 들여다보였다.
《음, 여기가 옳구나. 그때 스님이 호랑이와 맞다들었던 곳이다. 용감하고 슬기롭던 그 스님이 방불히 떠오른다. 그 스님이 아니였다면 어머니는 어쩔번 하였겠나.》
《참말 고마운 스님이오이다. 그때 어느 절간의 스님인지 알아둘걸 제가 미처 알아보지 못하여 후회막심하오이다.》
《나도 네 어머니병이 위급하여 그 생각을 못했구나. 자, 어서 가자. 조금만 더 올라가면 어머니를 눕혔던 초막자리가 있을게다. 거기는 양지바르고 안침진곳이여서 좀 쉬고갈만하다. 어머니에게 불돌도 달구어주고 밥이랑 데워먹고…》
《아이 좋아라. 불돌이랑 식어버렸구 약도 못드렸는데 마침이오이다. 마님.》
삼녀가 속삭이듯 말하고 방긋이 웃었다.
《거 정말 마침이로구나.》 하고 신씨가 고개를 끄덕이며 빙그레 웃었다.
덕보는 사랑하는 삼녀가 더없이 소중하게 생각되여 말없이 불타는 눈길로 그를 바라보았다.
잊지 못할 초막자리는 이내 나타났다. 한해여름 비바람에 시달리고 이 겨울에 눈에 묻혀있었지만 상기도 새초를 엮어 둘러쳤던 그것이 남아있고 돌로 쌓아 잠자리를 만들었던것이 눈에 덮여있었다.
그옆에 흐르던 맑은 시내물은 잊을수 없는 지난 5월의 사연을 그대로 흘려보낼수 없어서 얼음으로 굳혀놓은듯 하였다.
그들은 두어곳에 우등불을 지피고 불돌을 달구고 약을 달이고 밥을 데웠다.
신씨는 자기의 손맥을 짚어보는 남편을 미더운 눈길로 올려다보았다.
《저에게 약을 준 그 스님에게 무엇으로 보답할지 모르겠나이다.》
《나도 그 생각이우. 념려마오. 그 스님은 사람도 살려내는 의술도 있고 호랑이와 맞서는 담력도 있는 남다른데가 있으니 후에 반드시 찾아낼수 있소. 또 그 스님의 팔목우엔 뜸자리와 같은것이 여러곳에 나있었소. 당신에게 약을 줄 때 보았소. 표적도 뚜렷하니 쉽게 찾아낼거요. 허허허.》
《나리님, 의술도 있구 담력도 있구 손목우에 뜸자리가 무수하면 그 스님이 누구인지 짐작되오이다.》
말들에게 여물을 주던 덕보가 환히 웃으며 조헌을 돌아보았다.
《응?! 임자가?!》
조헌이 반가운듯 기대가 한껏 어린 시선을 덕보에게 보내였다.
《그 스님의 팔뚝에 큼직큼직한 뜸자리가 나있는것을 직접 보셨소이까?》
《보았다. 내 눈으로 말이다. 그 스님이 바랑에서 약을 꺼낼 때 긴소매자락을 걷어올리였는데 그때 보았지. 키도 훤칠하고 목소리도 굵고 중이라기보다 무인 같아보이고…》
《그러면 그 스님은 틀림없이 령규대사님이시오이다. 청주성밖 안심사 주지오이다.》
《청주성밖 안심사?! 그런데 임자가 어떻게, 응?》
조헌은 덕보가 그 스님을 알고있는것이 너무나 희한스러워서 눈을 휘둥그레 떴다. 신씨도 완기도 모두 놀라듯 덕보의 입을 바라보고있는데 삼녀는 더더욱 덕보가 자랑스러워 별처럼 두눈을 반짝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