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27 회)

상편

대궐주추돌을 피로 물들이다

제 1 장

귀양지에서 돌아온 조헌

6

(6)

 

이리하여 이 상소문을 내려보내면 손상되는것이 아주 클것이라고 해서 상소문을 불태워버렸다는것이였다.

온 조정이 분격으로 팥죽끓듯 하였다. 사헌부에서는 조헌의 상소문은 조정을 얕보고 거짓을 꾸며낸것이라고 차자를 올려 조헌을 파면시키자고 했다. 또 그뒤를 이어 재차 조헌의 죄가 사형죄에 해당되는것만큼 다스려야 한다고 제의하였다. 홍문관에서는 조헌이 하나와 온 조정이 맞서 상소내용의 사실여부를 해명한다면 도리여 조정의 수치로 될것이니 빨리 죄를 주자고 했다.

새해 기축(1589)년에 들어서면서도 사헌부, 사간원에서 조헌을 도깨비라고, 그를 귀양보낼데 대한 제기를 그치지 않았다.

5월 신해일에 선조왕은 대간들의 제의를 승인하였었다. 이리하여 조헌은 길주령동에 귀양갔다가 돌아오는 길이였다. …

조헌은 지금 지난날 자기가 올렸던 상소가 옳았던가를 다시한번 깊이 생각해보면서 말없이 바람에 기울거리는 등잔불을 바라보았다.

《나리님, 어이 말씀이 없소이까, 무슨 피치 못할 일이길래 이 추운 때에 험한 마천령을 넘으시나이까?》

송익필이 생각되는바가 있어서 다시 물었다.

《허허, 자꾸만 물으니 대답하지 않을수 없군. 지난해말에 임금께 상소를 올렸다가 귀양을 갔더랬네. 그러나 임금의 은혜를 입어 다시 돌아오는 길이요.》

조헌이 쓸쓸히 웃으며 신씨의 머리맡으로 다가가서 이마를 짚어보았다. 신씨는 가느스름히 눈을 뜨고 가냘프게 웃었다.

《좀 나았소이다. 제가 무슨 약을 먹었소이까?》

《사향과 곰열이요. 이 사람들이 가져온것이지.》

조헌은 송익필형제를 바라보며 빙그레 웃었다. 그 웃음에는 뜨거운 감사의 정이 짙게 어리였다.

《젊은이들이 고맙네.》

신씨는 누운채로 나직이 속삭이듯 말하였다.

《마님, 무슨 말씀이시오이까.》

송익필이 불시에 솟는 눈물을 주먹으로 쑥 씻으며 송구히 말을 이었다.

《나리님과 마님께서 엄동설한에 이 고생을 하는것이 다 우리때문이라는것을 알게 되였소이다. 우리가 상소를 올려달라고 하지 않았다면 어찌 귀양을 갔겠소이까.》

송익필의 목메이는 소리에 이어 동생 한필이 《나리님, 우리들이 그때는 철이 없었으니 용서하옵소서.》하고 조헌앞에 엎드려 어깨를 떨었다.

《아니, 이러지들 말게. 꼭 임자네들의 부탁을 받고 올린 상소는 아니네. 나라에 바로잡아야 할것들이 많아서 미리부터 상소를 올릴 참이였는데 임자네들의 부탁도 있구 해서 그랬던것이지. 자, 그만들 하게.》 하고 그들의 어깨를 두드려주었다.

그는 이들형제가 《도적》이 되여 깊은 산속에 숨어살지만 의리를 알고 사람이 사람으로 되게 하는 착한 품성을 지니고있어서 믿음이 갔다.

어떻게 하면 이 형제를 옳은 길로 돌려세울것인가. 이 사람들은 도망친 노비들이다. 나라법에 도망친 노비가 붙잡히면 목을 쳐도 무방한것이다. 그런데 그 죄우에 더하여 칼을 든 《화적》의 죄가 있다. 그렇다고 한뉘 산속에서 살수 없는것이다.

조정에서는 송익필노비형제가 조헌을 꼬드겨 상소문을 내게 하였다고 떠들었다. 아마도 송익필형제가 량반선비들을 찾아다니면서 상소문을 올려달라고 하다가 나중엔 조헌을 만났다는 소문이 난 모양이였다.

이 소문이 임금의 귀에까지 미쳐서 진노케 하였다.

《개인의 남자종 송익필형제는 조정에 대하여 감정을 품고 사건을 일으키려 한다. 간사한 도깨비 조헌의 상소문에도 이 사람들이 사촉하지 않은것이 없다고 하니 지극히 통분한 일이다. 잡아가두고 끝까지 추궁할데 대하여 형조에 지시할것이다. 더구나 종으로서 상전을 배반하고 도망가서 나타나지 않고있으니 이것은 륜리에 관련되는 일로서 더욱 놀라운 일이다.》

임금의 이 지시로 형조에서 라졸들과 렴탐군들을 각곳에 보내여 송익필이네를 찾고있는줄을 조헌이도 당사자들도 알수 없었다. 이것은 조헌이 귀양지로 떠나간 직후의 일이다. 지금도 조정에서는 송익필형제를 수탐하고있었다. 그러나 이것을 모르는 조헌은 그들을 어떻게 바른길에 내세우겠는가를 생각하고있었다.

이틀이 지나서 신씨의 병은 퍽 나아졌다. 사흘만에 날씨도 온화해져서 조헌의 일행은 주인집 할아버지와 눈물로 작별하고 길을 떠났다.

조헌은 바래주려고 나온 송익필형제에게 그동안 깊이 생각해두었던 말을 꺼내였다.

《임자들은 이렇게 산속에 살수 없다. 그러나 임자네들이 세상에 나와 떳떳이 살아갈 길이 하나 있다. 한두해 더 여기서 살면서 사냥도 하고 약초도 캐면서 무술을 닦아라. 하나가 열을 당할수 있도록 해야 한다. 몇해 안가서 반드시 왜란이 일터이니 그때 공을 크게 세워 도망친 죄를 속공받아야 한다. 그러면 사람답게 살수 있느니라. 그때 임자네들의 공을 임금께 상주할수 있도록 왜란이 일면 나를 찾아와 함께 싸우자.》

당시에 우리 나라를 침략한 오랑캐의 목을 하나 베면 과거에 급제한것으로 쳐주고 둘을 베면 6품벼슬을 준다고 하였고 천인노비가 그런 공을 세우면 량인으로 신분을 고쳐주게 하였었다. 조헌은 이것을 념두에 두었던것이다.

송익필형제는 감격해 마지않았다. 캄캄하던 눈앞이 환히 내다보이듯 하여 그들은 조헌에게 맹세하였다.

《그렇게 하겠나이다. 왜란이 터지면 나리님을 찾아 공주로 가겠소이다.》

《아니다. 옥천으로 와야 한다. 대장부일언이 중천금이다.》

《알겠소이다.》

형과 동생이 다같이 기쁨에 겨워 기세당당히 대답하였다.

조헌은 일행의 앞장에서 잦은 걸음으로 말을 몰아갔다. 뒤따르는 말들도 썰매발구를 가볍게 끌고 잘 따라왔다. 이렇게 하루길을 달리니 마천령산봉우리들은 멀리 뒤에 남아 류다른 정희를 불러일으켰다.

아아, 마천령! 괴로움과 슬픔의 산악으로 조헌의 가슴에 솟아있는 마천령! 여기서 사랑하는 동생을 묻었고 귀중한 안해를 잃을번했고 열병으로 죽은 백성들과 얼어죽은 사람들을 수없이 보았다. 그런가 하면 잊지 못할 령규스님도 만났고 신각이 마중보낸 덕보도 만났고 송익필형제도 만났다.

 

되돌이
감 상 글 쓰 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