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36 회)
상편
대궐주추돌을 피로 물들이다
제 2 장
정사가 부패하면 성돌이 썩는다
4
(1)
울밖에 하얗게 피여났던 살구꽃도 지고 산천을 붉게 단장하던 진달래도 한물 지났지만 옥천땅은 여전히 한폭의 산수화처럼 아름다운 경치를 펼쳐안고 사람들을 밭갈이전야에로 불렀다.
조헌은 보탑을 쥐고 밭을 갈아 나아갔다. 봄바람에 푸근해진 땅이 기다렸던듯이 보습을 안고 올라와 뒤로 번들번들 뒤집어지면서 련이어 편히 드러누웠다. 목에 걸은 흰 무명수건으로 이마에 흐르는 땀을 씻으며 《이랴, 낄낄-》소를 재촉하는 그의 모습은 밭갈이가 손에 익고 몸에 배인 실농군과 같았다.
밭머리 늙은 오동나무가지에 까치 한쌍이 깍깍 우짖더니 갈아엎은 밭에 날아내려서 땅우에 드러난 벌레들을 찾아다니였다.
조헌은 밭머리에 잠시 소를 멈춰세우고 봄빛이 가득한 산천을 바라보았다.
옥천은 북쪽에 금강을 경계로 하고 서쪽에 회덕과 령 하나를 사이에 두고있는데 이끼푸른 기암괴석들로 이루어진 돌산이 많고 산골짜기마다 맑은 물이 흘러내리였다. 산천이 정결하며 흙색도 맑고 깨끗하여 마치 한성의 동쪽교외와도 같다고 하였다. 그대신 땅은 기름지지 못하고 논의 소출이 적었다. 그러나 옥천은 문인들이 예로부터 많이 나왔다. 조헌의 먼 조상인 조문주라는 사람은 고려때 병부상서로서 몽골장수 차라대의 군사를 돌려세우도록 몽골왕과 담판하여 고려의 명맥을 보존케 하였으며 조헌의 증조부 조천주는 우리 나라를 침략한 홍건적을 박주(박천)에서 두번씩이나 무찔러버리고 승리하여 나라의 위세를 떨쳤으며 안주에서 한목숨 바치였다. 나라에서 조씨가문의 애국충정을 평가하여 땅을 떼주기로 하였는데 바로 옥천땅을 받았었다. 그렇지만 《나라를 위해 침략자들을 치는것은 백성의 도리다.》 하고 넉넉히 주는 많은 땅과 노비들을 다 사양하고 제손으로 밭을 갈아 먹고 입는것을 대여갈수 있는것만큼만 가졌다. 아버지 조웅지의 대에 와서는 몇명이 남지 않은 종들까지 내보내주고 그들이 다루던 땅도 나누어주어 자유롭게 살아가도록 해주었다. 그 자손들이 지금도 그 은혜를 잊지 않고 설명절과 동지명절, 팔월가위 같은 날에는 성의껏 무엇인가 들고 찾아오기도 하고 조헌의 집에 무슨 일이 생기면 너도나도 찾아와 도와주었다. 조헌이 귀양갈 때도 그랬고 돌아온 지금에도 여전하였다. 그러나 조헌은 오히려 그들의 살림살이를 걱정해주고 념려하여주었다. 아름다운 산천에 아름다운 인간이 태여난다는 말이 조헌이네를 두고 생겨난듯 하였다.
밭이랑에서 벌레를 쪼아먹던 까치 한쌍이 배불리 먹었는지 깍깍 울면서 밭머리 오동나무에 날아올랐다. 그리고 또 꼬리를 키질하듯이 달싹거리며 우짖었다.
조헌은 오동나무와 까치를 추억깊이 바라보았다. 바로 저 나무아래 책을 펴놓고 한이랑씩 밭김을 매고 글을 읽던 어린시절이 어제런듯 떠올랐다.
《부인, 이리 와서 좀 쉬고 합시다.》
쇠스랑으로 흙덩어리들을 찾아 부스러뜨리고있는 부인 신씨에게 조헌이 다정스럽게 말을 건늬였다. 신씨는 밝게 웃으며 허리를 폈다. 검정치마에 흰 무명저고리를 입고 흰 머리수건을 쓰고 일하는데 거치장스럽지 않도록 노끈으로 치마허리를 잘라맨 그는 꼭 농사집아낙네와 같았다.
《어른께선 밭을 갈아낼만하오이까?》
남편의 상처가 아물기는 하였지만 그래도 힘쓰는 일에 어떨지 걱정이 되여 묻는 말이다.
《그렇소. 해낼만하우.》
《그러면 됐소이다. 호호호.》
신씨의 얼굴에는 기쁜 웃음이 피여났다. 그 웃음은 아직도 얼굴에 비껴있는 병색을 밀어내면서 처녀때 곱던 옛모습을 되살려주었다. 밭에는 두 내외밖에 없었다. 완기는 땔나무하려고 산에 들어갔고 삼녀와 할멈은 햇나물을 뜯으려고 나물바구니를 들고나갔다.
오래간만에 젊었을 때처럼 아무도 없는 밭에서 일하여선지 신씨는 스스럼없이 남편의 곁으로 다가갔다.
《자, 여기 내곁에 앉소그려.》
조헌은 밭머리의 너럭바위에 앉으며 자리를 내여주었다. 신씨는 남편곁에 나란히 앉으며 다정하게 말하였다.
《쇤네는 저 오동나무를 볼 때마다 어른께서 어렸을적에 저 나무아래 책을 펴놓고 김을 매면서 글을 읽으셨다는 이야기가 절로 떠오르군 하오이다.》
《허허, 옛날옛적의 일을 어떻게 다 아오?》
《왜 모르겠소이까? 어른의 다섯살적의 일도 쇤네가 다 알고있는데…》
《으응?! 내가 다섯살때의 일을?! 허허허, 그게 무슨 일인지 나도 모르겠소.》
《어른께서 다섯살적에 어느 정승대감의 행차를 멈춰세웠다는 이야기를 우리
《부인두 원 참, 나도 잊어버린 철부지아이때 일을 무엇이라구…》
《우리
《허허 그 참, 내가 어릴적에 그 집
《어릴적에도 잘 보이고 자라서도 잘 보여서 그리된것같소이다. 호호.》
조헌의 다섯살때의 이야기는 소문이 크게 나서 모르는 사람이 없었다.
…40여년전 어느 여름날에 동네 쪼무래기아이들이 마을의 정자나무그늘아래서 천자문을 읽고있었다. 일곱살, 여덟살, 아홉살아이들인데 그중에 다섯살 어린아이 하나가 끼여있었다.
이때 《부웅-》하고 행차나발소리가 가까이 들려오고 《에라, 쉬- 물러까라, 사또님행차이시다아-》하는 길잡이 웨침소리가 울려왔다.
글을 읽던 쪼무래기들이 웬일인가 하여 벌떡 일어나 두눈을 휘둥그레 떴다. 앞에는 무슨 기발인지 높이 휘날리고 그뒤로 산수털벙거지를 쓰고 창을 든 군사들이 주런이 서서 성큼성큼 걸어오고 또 그뒤엔 말을 탄 군사들과 말을 타지 않은 군사들이 줄줄이 잇달렸다.
쪼무래기들은 이런 행차를 처음보는지라 희한스럽기도 두렵기도 하여 책들을 내버리고 뒤로 몇걸음씩 흠칫흠칫 물러서서 구경하였다. 그런데 지나가던 행차가 아이들앞에 멎어서고 관리가 가마에서 내리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