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39 회)
상편
대궐주추돌을 피로 물들이다
제 2 장
정사가 부패하면 성돌이 썩는다
5
(2)
정암수는 조헌을 높이 보았다. 아, 세상에 청렴강직한 사람이 조헌이로구나 하고 경탄해 마지않았다.
그가 조헌을 막역지우로 깊이 사귀게 된것은 또한 백성살이를 념려해주는 조헌을 여러번 보아왔기때문이다.
어느해인가 정암수는 조헌과 함께 산수유람길에 올랐다.
조헌은 바쁜 정사의 여가를 타서 전라도의 명승지를 편답하면서 아름다운 조국산천을 시에 남기고싶었던 마음이 간절하였던지라 정암수의 권고를 쾌히 받아들였다.
그들은 덕유산으로 떠났다. 덕유산은 전라도, 경상도, 충청도 세 도가 교차되는 곳에 있는데 지세가 장엄하고 깊은 골, 높은 령이 수려해서 명승고적이 많았다.
그들이 범골이라는 깊은 골짜기로 들어가는데 비바람도 가릴수 없는 초막이 하나 나타났다. 그런데 초막근처 어데선가 녀자의 울음소리가 가느다랗게 들려왔다. 그들은 이상히 여겨 울음소리가 들려오는 곳으로 찾아갔다. 했더니 세 무덤이 나란히 보이는데 그 앞에 뼈가 앙상한 로파 하나가 엎드려 슬피우는것이였다.
묘지 하나는 오랜 무덤같고 다른 하나는 그리 오래지 않은것 같고 세번째 무덤은 생흙이 그대로 덮여있는것이 며칠전에 생겨난것같았다.
《할머니, 그만 고정하시오이다. 이 묘지들은 어찌된 묘이오니까?》
조헌이 로파의 뼈만 남은 손을 잡아 일으켜주며 나직이 물었다.
로파는 파뿌리같이 하얀 머리를 들고 진물이 내돋은 눈으로 조헌을 바라보고 울음을 삼키였다.
《하나는 시
《세 사람은 어떻게 돌아가셨소이까?》
《시
《저 초막에서 사시오이까?》
《예, 불쌍한 손자 하나와 함께 사옵나이다.》
《남편과 아들이 호환을 당한 이 골안에서 어찌 살리까? 무섭지 않소이까? 마을에 내려가지도 않구… 할머니와 손자까지 호환을 당하려고 하시오?》
조헌은 걱정스럽게 할머니의 가엾은 정상을 더듬었다.
《아니옵나이다. 범보다 무서운 관가의 아전들이 있어서 마을에 내려가 살수 없소이다.》
《아, 그래서-》
조헌과 정암수는 너무나 억이 막혀서 다같이 《이런 변 보았나.》 하고 나직이 부르짖었다. 이 불쌍한 로파의 말 한마디에 백성들의 진혈을 짜내는 악착한 고을원과 아전들의 죄행이 다 슴배여있는것이다.
조헌은 넋을 잃은 사람처럼 할머니앞에 고개를 숙이고있다가 정암수에게 말하였다.
《죽산선생, 소인은 산유람을 그만두겠소이다. 이곳 고을에 내려가서 고을원의 악정과 아전들의 행패를 알아보고 대책을 세워야 하리다. 죽산선생, 선생도 이 사람과 동행하되 증인삼아 가만히 보고만 계시면 좋으리다.》
정암수는 오래동안 기다리던 정사의 여가를 얻어 기회를 마련한 산수편답길을 버리는 조헌의 뜻을 알았다. 그는 매우 아쉽고 섭섭하였지만 조헌의 요구를 받아들이였다.
《허, 산수편답이 백성편답으로 되였구려. 그리합시다.》
조헌은 편답길에 쓰려고 준비하였던 은자와 식량까지 전부 로파에게 주고 비바람 막으려던 우장과 무명덧옷까지도 내놓았다.
정암수는 조헌의 착한 마음과 진심에 경탄과 감복됨이 컸다. 그는 자기가 준비하여가지고온것을 조헌이처럼 로파에게 주었다.
이날 조헌은 고을관가를 찾아가서 도사의 명패를 내보이고 고을의 가호수, 조세와 군포장부, 온갖 잡세치부장을 일일이 조사장악하였다. 그리고 나라에 바쳐야 할 수량과 재고량, 횡령한 수자들을 찾아내고 고을원의 부정부패를 발가놓았다. 고을원과 아전들이 요리조리 회피해보려 하였지만 물계가 환한 조헌이앞에서 꼼짝 못하였다.
조헌은 또 고을 옥을 돌아보고 고을원을 꾸짖었다.
《왜 죄인이 이리도 많소이까?》
《고을에 도적이 많으니 어찌 잡아들이지 않겠소. 또 조세와 군포를 바치지 않은 놈들이 많으니 어찌 옥이 가득 차지 않겠소.》
고을에 기강을 세우는데서는 자기밖에 없다는것을 은근히 내비치며 고을원은 수염을 내리쓸었다.
조헌은 치솟는 의기를 참아내지 못하였다.
《이 고을에 다른 고을보다 도적이 왜 많이 생기고 조세와 군포를 못바친 죄인이 왜 많소이까? 그것은 이 고을 조세와 군포장부에서 나타난바와 같이 협잡, 사기로 악착하게 두곱세곱 받아내고 온갖 가렴잡세로 백성들을 략취하여 제 배속을 채워서 백성들이 당장 먹고 살수가 없게 되였기때문이오이다. 무엇으로 바친단 말이요. 먹을것, 입을것이 있으면 조세도 군포도 못바칠 사람이 없고 남의 물건에 손대는 도적도 없어지고 따라서 잡아들일 죄인도 없을게 아니오이까. 고을원은 백성들의 곡간에 낟알이 가득차면 고을옥이 텅텅 빈다는 말을 모르오이까?》
조헌은 소매를 떨치고 감영으로 돌아갔다. 정암수는 그와 함께 동행하면서 그가 한없이 돋우보이고 존경과 사랑의 감정이 더더욱 뜨거워졌었다. 두어달이 지난 뒤에 그 고을의원은 파직되고 악착한 아전들은 쫓겨났었다. …